광해의 연인 3 - 개정판
유오디아 지음 / 시간여행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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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진짜 악당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연기를 펼치며 기만극을 펼치는 여성들입니다. 2권에서는 인빈 김씨, 그리고 이 3권에서는.. 생각이 깊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정국을 보이지 않게 수습하며 힘을 길러 나가던 광해군의 정실 유씨(세자빈)가. 가공할 음모와 술책을 부리며 최종 보스로 마침내 본색을 드러냅니다. 독자에게는 이 점이 충격일 테며, 이 장편 소설이 판타지, 로설, 아니면 본격 역사 소설로서의 면모 외에, 혹시 미스테리물로서의 성격도 겸한다면 바로 이 점에서 그 개성이 두드러집니다. 1,2권에서 부러진 옥패, 수수께끼의 소녀(경민이 아빠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구한) 등에 얽힌 내막이, 이 3권에서는 완전히 해명되고 정체를 드러냅니다. 책날개에 보면 "모든 세대의 독자들이 두루 읽을 수 있는.... "이란 작가의 포부가 나오는데, 그 말이 처음에는 예사로 여겨졌으나 책을 숙독하면서 진가를 알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중전의 자리에 오른 유씨는, 부군 광해의 사랑을 독차지한(여성 입장에서 그게 뻔히 보였겠죠) 경민이에 대해, 처음부터 증오나 질투 같은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아주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사태를 주시하고, "이 여인이 내 남편-남편이라기보다 정략 결혼에 의해 연을 맺은 파트너-에게 어떤 쓸모가 있겠구나"하는 판단에서, 일개 나인인 경민에게 후의를 베푸는 게 독자의 인상에 강하게 남았습니다. 어떤 여성적 직감으로 상대의 본심을 척 꿰뚫어 본다든가 하는 능력은, 순진한 경민이에게 그리 넉넉히 갖춰진 편이 아니라서, 2권의 경민이(이때는 그저 나인 김씨. 김상궁이었습니다)는 유씨의 검고 차가우며 무서운 영혼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소설이 철저히 경민이의 시점에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독자 역시 유씨의 무서운 본색에 대해 전혀 감도 못 잡았다가 이 3권에서 반전 비슷한 체험을 하는 것도 괜찮은 기분이더군요.

<계축일기>에 보면 인목대비는 물론 그 밑의 천한 시종들까지도, 광해군(한때 삼천리 강역을 지존의 몸으로 다스린 이인데도)을 두고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표현이 마구 나와 현대의 독자를 당혹하게 하죠. 우리 생각으로 그녀와 광해군은 불구대천의 원수일 것 같은데(<실록>에도 그리 적혀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인목대비와 광해군이야말로 이심전심의 동맹 관계처럼 묘사됩니다. 광해군이 좀 융통성이 부족한 편이라 정치적 성과가 미진했고,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간 건 중전 유씨가 이 기회에 자신의 친정을 조선 제일의 세도가로 만들어 보려는 헛된 야욕이라고 이 소설은 짚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튼, 이런 정치적 원모심려가 엉뚱한 희생자만을 낳았으며, 능양군 이종이 주도한 반정군은 기실 "혼군(폭군이 아니라)" 광해가 아닌, 대북파와 유씨 일문의 타도를 도모한 셈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폐비와 폐세자가 더 참혹한 죽음을 맞고, 광해군은 유배지에서나마 천수를 누린 기이한 사정이 아주 매끄럽게 설명은 됩니다.

2권에서 경민과 광해군은 달기니 주왕이니 하면서 고사를 원용해도 하필 흉칙한 것을 들며 불길한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두 남녀는 사실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평범한 남녀로서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고 싶었던 순수한 영혼이고, 괜히 옆에서 애정사의 교통사고를 당한 정원군 역시 순정파 중의 순정파입니다. 역사는 그러나 승자의 기록이라, 이들은 혼군, 탕녀, 파락호의 오명만 쓰고 정작 더 악독한 이들의 모략에 밀려 사라져갔습니다. 여튼 경민이의 지극한 사랑(부친과 연인에 각각 향한 두 갈래의)은, 시간의 진행을 다스리는 물리법칙마저 삐긋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익히 알되 그 속에는 좀 다른 사연을 간직한 슬픈 역사 하나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치밀하면서도 자유롭고, 이지적이면서도 애상적인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얼마나 연구하고 사색해야 이런 작품이 나오는지 감탄하게 되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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