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개자식 뷰티풀 시리즈
크리스티나 로런 지음, 김지현 옮김 / 르누아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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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의 소개에도 나와 있듯, 크리스티나 로런이라는 단일 필명을 쓰는 두 여성 작가의 "Beautiful~" 시리즈 중 첫째 권입니다(지금까지 여섯 편이 출간되었습니다). 남주 베넷 라이언을 가리키는 게 분명한 저 별명 "잘생긴 개자식"은, 이 장편의 제목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소설 중에서도 이 베넷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캐릭터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로설의 설정이 흔히 그렇듯, 남자주인공이 대단히 재수없는 타입입니다. 성격이 그저 까칠할 뿐인 spoiled kid라면 그건 그냥 여성 입장에서 무시하면 그만입니다("버르장머리 없이 키워져서 사회성이 부족하군, 불쌍한 놈."). 그런데 베넷은 명문가의 둘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나, 완벽한 학벌과 초기 사회 경력을 쌓아 왔으며, 집안의 후광을 입어 낙하산으로 꽃혀 기업의 중역을 맡은 케이스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유능한 인재일 뿐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나 성격이 까칠하고 오만불손하니, 일 못하고 집안 변변찮고 직급도 낮으며 올라가야 할 계층 사다리가 까마득히 높게만 솟은 그저그런 부하직원(특히 여성)들은, 회사에서 그에게 깨질 때마다 속에서 마그마가 치밀이 오릅니다. 분노가 가라앉고 난 후에는 자괴감과 열등감의 두번째 파고에 신음하며 사직을 고민하는 게 공식이 되다시피 했죠. 이 베넷 라이언은 이 바닥에서 이런 쪽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베넷 라이언을 두고 사내에선 그런 추측도 일었습니다. "너무 미모가 빼어나서 누가 섣불리 그의 능력을 의심할까봐, 저렇게 가시를 곤두세우고 사는 거다." 회사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직장인의 모습만 노출하는 그의 동선을 본 사람이라면, 이런 평가를 두고 "괜한 질시, 못난 중상모략"으로 한칼에 후려칠 만합니다. 그만큼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부친과 친형의 회사("라이언 미디어")에 입사하기 전 프랑스 로레알(이렇게 실명이 나오더군요. 회사 입장에선 픽션 출현으로 간접 홍보가 되므로 마다지는 않겠지만)에서 훌륭한 실적을 쌓은 것이 그의 능력을 입증합니다.

 

여주 클로에 밀스의 표현을 빌리면, "이 베넷은 그의 아버지, 그의 형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는 두 명에 대한 한없는 존경, 찬사이자, 자신의 직속 상사인 베넷에 대한 폄하의 의도였습니다. 클로에 밀스는 학부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재원이었는데, 지금 라이언 미디어에서 인턴십을 병행하는 조건으로 MBA 장학금을 받으며 이제 학위 최종 취득까지 3개월을 남기고 있습니다. 마지막 관문만 잘 넘으면, 그녀는 학장으로부터 "최우수 CEO 추천장"을 졸업장과 함께 받게 됩니다. 인재 보는 눈이 누구보다도 탁월한 엘리엇 라이언은, 이 클로에 밀스를 지속적으로 후원해 왔습니다(말 그대로 후원일 뿐 다른 불결한 연상은 불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엇 라이언 회장과 개인적 친분까지 쌓게 된 밀스는, 그의 둘째 아들인 베넷 이사의 어시스턴트로 채용되어, 이 파란만장하고 시끄러우며 다분히 폭력적인(?) 데다 닭살 제대로 돋는 로맨스를 펼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 잠깐 적었듯, 필요 없이 까칠하게 구는 베넷의 심리 이면에는, 모종의 강박이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클로에 밀스와의 관계(베넷 개인과, 라이언 미디어 회사와의 관계 모두)가 파탄에 이르자, 부친과 형은 그를 질책합니다. 왜 공과 사를 구별 못해서 회사 분위기에 지장을 초래하고, 앞날 창창한 여성의 커리어에 중대한 흠집을 남길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하느냐는 거죠. 물론 우리 예전 신파 드라마마냥, "물정 모르는 남의 집 귀한 딸을 농락하여 몸을 망치게 했다" 운운은 아닙니다(세팅만 보면 딱 그런 오해를 받기에 좋습니다만). 여튼 이때 베넷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걸작입니다. "두 분 다 아시다시피 내가 좀 멍청하잖습니까." 사실 그렇게 학벌, 경력이 좋은 남성이 "통상의 의미에서" 멍청할 리는 없고, 단지 부친과 형이 너무 뛰어난 인재들일 뿐입니다. 능력도 탁월할 뿐 아니라, 감정의 조절과 모럴의 "유지, 보수"에도 도무지 패착이란 보이지 않는, 직무와 사회성 공히 달인의 경지에 이른 진성 엘리트들이기 때문이죠. 이런 압도적으로 뛰어난 혈육들 밑에서, 베넷은 적잖이 주눅든 성장 과정을 거쳤을 법합니다. "아버지만큼 뛰어난 사람이 되는 건 포기한다손 쳐도, 내가 형의 반만큼이라도 할 수 있을까?"

 

여튼 이런 건 그 집안의 내밀한 속사정이고, 바깥에서 보기엔 셋 모두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반신반인의 경지일 뿐이죠. 부친 엘리엇과 형 헨리는 그럼 외모가 좀 처지는 편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클로에 밀스의 말을 빌리면, "나이가 들고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뿐 내가 본 중 가장 잘생긴 남성"이, 이 라이언 미디어의 수장이자 휘황찬란한 엘리트 가문의 어른 엘리엇이라고 하네요. 아마도 이런 이끌림에는, 그런 남성적 외형의 완성도뿐 아니라, 내면의 자상함과 완비된 인격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클로에는, 이런 두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인 베넷과, 소설 초장부터 위험천만한 불장난에 빠진 걸까요? 클로에가 대단히 침착하고 지능이 높은 데다 절제력, 감정 조절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참 의외입니다. 클로에와 베넷이 그것도 회사 집무실, 복도, 기타 그닥 안전하다 편하다 여길 수 없는 여러 장소에서 무차별 정사 행각을 벌이는 장면 묘사를 읽기 위해, 여러 페이지를 읽어 나갈 수고와 인내를 독자는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몇 장 안 넘겨서 바로 시작이고, 이 소설은 성애 묘사와 그 다음 묘사 사이에 과연 몇 페이지의 간격이 필요한지 고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땀흘리고 애쓰는 캐릭터들(둘 다 파워풀 플레이어들입니다)보다 독자가 더 빨리 지칠 지경입니다.

 

답은 클로에와 베넷 모두 아는 것처럼, "이성이 거부해도 몸이 끌리는 걸 어쩔 수 없다"입니다. 베넷이 더 적극적이고, 사회적으로 우위의 신분이니만치 행동의 재량이 더 폭넓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 31세의 청년이 진성 bastard는 아니기 때문에, (전혀 안 그럴 것 같아도) 여자에게 함부로 하는 타입이 아닙니다(만약 그랬다면 아버지와 형이 그를 가만 두질 않았을 겁니다. 가정 교육과 가풍이란 이래서 중요한 거죠). 그렇다고 해도, 여성이고 하급자인데다 아직 학생이기까지 한 클로에는 분별 없이 굴 수 없습니다. 베넷은 집안 배경이 있으니, 설사 큰 실수를 해도 어디 다른 데서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하지만 일개 시골 치과의사의 딸인 그녀는, 한번 평판이 망가지면 재기가 불가능하죠.

 

클로에는 괜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베넷은 알고보니 진짜 순둥이 타입이었고(따라서 까칠함은 모두 가면), 자기 친구이자 또 한 명의 엄친아이며 역시 부친과 형이 대단히 아끼는 인재인 조엘 치뇰리가 그녀에게 접근하자 "저놈 내 것에 접근하다니, 어디 조용히 묻어버려야겠군." 같은 생각을 품기까지(물론 농담이고 베넷이 그런 치정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다 둘은 오랜 절친이죠) 합니다. 냉혹하고 까칠한 사람이면 절대 이런 젤러스한 감정을, 그 무엇 그 누구에 대해서도 품지 않습니다. 지켜낼 게 있으면 그저 책략과 계산으로 해 내면 되니까요. 근데 베넷은 정말 클로에에게 홀딱 빠져, 여태 성실히(?) 얼굴에 착용하고 다니던 페르소나의 끈이 끊어져 쌩얼이 드러나고, 일자로 언제나 곧게 굳게 닫혀 있던 입가에선 (클로에에 대한 상사병 때문에) 침이 질질 흐르는 것도 이제는 의식하지 못할 지경이 된 겁니다. 이 소설은 이런 이유에서, "잘생긴 개자식(은 어쩌다 폐인으로 떨어졌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건 클로에 밀스가 남자 다루는 요령이 좋아서일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사실 아주 속된 관점에서 보면, 팔자를 고칠 남자 하나가 지금 제발로 굴러 들어와 한입에 먹어달라고 조르는 격인데, 밀당이고 뭐고 다 번거로운 소모전 중간 과정일 뿐이죠. 게다가 남자 집안에서 반대라도 하면 모를까, 그렇기는커녕 겉으로 봐서는 어른 두 명이 자식보다 더 호의적입니다(클로에는 회장 사모님인 수전 라이언과도 친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여주인공은, 예사로운 된장이라면 태생 소경 상태에서 눈이 번쩍 뜨이기라도 할 이 블리스포인트에 머무르지 않고,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맙니다(뭔지는 스포일러라 적을 수 없습니다). 거 참 이상합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게 나름 작전이라든가 밀당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커리어우먼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는데 청춘사업에 재미들려 시간을 낭비하고 원칙을 훼손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런 자각과 신념이 워낙 강한 겁니다, 밀스라는 처녀 자체가요. 어찌 보면 클로에 밀스가 딱히 외모가 출중하고 섹시한 매력이 넘쳐서라기보다, 베넷, 그의 부친, 모친, 형 모두가 그녀의 이런 내면을 제대로 꿰뚫었기에 그녀에게 모두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반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운이 좋은 베넷이, 그녀의 성적(性的)인 면모에 정통으로 꽂혔을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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