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의 연인 1 - 개정판
유오디아 지음 / 시간여행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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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출생하여 발달된 문명의 온갖 이기가 주는 혜택을 받고, 기본적인 생존 조건의 결핍이 주는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온한 환경에서 감성의 건전한 계발과 감각의 세련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건 참으로 큰 행운입니다. 주인공(그것도 여주)에게 이런 말을 꺼내서 좀 안됐긴 합니다만, 18세 소녀 김경민이, 시간 여행이라는 특출한 능력을 타고나서 서기 환산 1597년에 가 꽂힌 게 아니라, 그저 당대인으로 태어난 후 여차저차한 곡절로 궁궐 무수리가 되었다면, 과연 지존의 몸 조선 세자와 말을 트고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요? 치도곤을 맞고 당일로 목숨을 잃을 중죄인 신세나 면하면 천행이겠습니다.

 

김경민은 21세기(2013년)에도 그 자유로운 영혼을 주체하지 못해서, 또래들 다 다니는 정규교육도 변변히 이수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나 준비하는 신세입니다. 이런 소녀가, 시대상 근 500년을 거슬러가, 반상의 구별과 신분제의 차별이 엄존하던 조선 시대 한복판에 불시착한다면, 단 하루도 온전히 체제와 사회에 적응 못하고 비참한 신세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당대 만인이 존숭하는 지존의 몸으로부터, 존중, 친밀감, 우정, 나아가 사랑 비슷한 감정을 얻어,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딱한 처지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는 건, 제 생각에 현대인으로서 어느 신분적 굴레, 사회적 폐습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은 채 자신의 영혼 그 순수성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랄 수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우리의 경민이는 용모가 예쁜 편입니다(안 봐서 모르긴 하나, 그런 것 같습니다). 키가 크다는 말은 아직 이 1권에서 분명히 표현되고 있지 않은데, 제 생각에는 "현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매력 요소인 장신까지 갖추었으면 좋았을 텐데, 영양상태로나 섹시함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버프를 받아서나 중세인은 이 점에서 상대가 안 될 겁니다. 그런 설정이 빠진 건 아마도 자신보다 키 큰 여자를 광해군,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이 과연 좋아할 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정원군은 특히. "그 나라는 대개 다 여성들이 기가 센 모양이죠?"하며, 이복 형에게 전언으로만 듣고 상상으로만 떠올리는 모습으로도 김경민과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광해군처럼 강단이 있는 사내는 몰라도, 정원군처럼 우유부단한 구석이 많고 로맨티스트 기질이 다분한 남자라면 장신 여성에 끌릴 만도 한데... 그러나 경민이가 저런 모습을 한 데에는 모르긴 해도 작가님의 원모심려가 다 있었겠죠.

 

소설이 아닌 실존인물로서의 정원군은 거의 실록 전체를 통틀어 왕족 출신 악당 랭킹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말종에 가까운 방탕아였습니다. 그 아들 이종- 여기서 네 살짜리 꼬마로. 보모 상궁 김경민의 보살핌을 잠시 받기도 하는 - 역시, 군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는 도무지 보기 힘든 변변치 못한 왕족 정도로 평판이 난 사람인데, 어찌어찌해서 시운을 잘 탄 끝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까지 되고 말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정원군은, 광해군 못지 않게 정이 많고 선량하며(광해군도 그리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는데... ), 우리의 주인공인 김경민에게 깊은 정을 주는 남성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려 "보지도 않고" 사랑에 빠졌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이 정원군의 사랑이야말로 광해군의 그것보다 순도가 높은 것 아닌지 하는,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사에 빠져 들기도 합니다.

 

정원군의 어린 아들 이종 역시, 아이치고는 순하고 눈치도 빠른 영특한 개성으로 묘사됩니다. 역사를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원군은 물론 그 아들까지, 광해군과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정치적으로나 개인 간 감정으로나 지속적으로 대립하던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1권에서의 정원군은, 이복 형을 무척이나 따르고, 혹시 자신의 제안으로 형이 정치적 곤경에 빠질까 염려하여 상당한 배려까지, 왕족으로서 사소한 거동과 행사를 두고서도 일일이 베푸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린 아들 이종은 아직 광해군과는 컨택이 없습니다만, 주인공 경민이를 (비록 친어머니와 친할머니의 방해로 오래는 같이 못 지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만의 인연으로도 무척이나 따르는, 실존인물로서의 말로와 성격, 인생을 낱낱이 아는 우리들로서는 기겁할 만하게, "아주 귀여운"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실감이 안 나는 분들은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작가 정하연 선생이 틀을 짜고 배우 이덕화가 열연한 그 찌질한 군주 인조를 떠올려 보십시오. 애가 그 사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커서 저렇게 되어 버렸다는 걸까요..

 

이런 의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직 1권까지밖에 안 읽었지만, 김경민이 시간을 거슬러간 1597년과, 인조반정이 일어난 1523년,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건대" 그 좋았던 사람들이 저리 변해 버린 걸까요. 사람이 변한 건 정원군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이 1권에서도 경민이가 염려하듯,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에게 사형을 선고한 건 여간 잔혹한 심성이 아니고선 저지를 수 없는, 도덕적으로 떳떳지 못한 행동입니다. 자기가 아는 광해군은 그럴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경민이가 그 과거의 시간대에서 혹시 뭔가 "사고를 쳐서" 두 청년의 인격과 퍼스낼리티에 심대한 영향을 남긴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문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저 "아 그래서 역사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군"하는 통속적 감동을 예비하거나, 혹은 (속으로는 뻔히 다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짐짓 놀라움을 가장하는 장르 문학 애독자의 관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소설은, "시간 여행자는 결코 역사의 정해진 흐름에 간여할 수 없다."는, 작품 자신이 마련한 자체 규칙에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대로라면, 경민이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착한 두 왕자, 서로 우애가 좋았던 형제를, 악귀로 바꿔 놓는) 큰 실책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건 작품 내의 완결 우주를 붕괴시킬 뿐 아니라, 독자와 맺은 약속(우리가 먼저 청한 바 없다 해도)을 어기는 과오입니다. 이 구조적 갈등을 어떻게 무마하면서(혹은 멋지게 승화시키면서) 이야기가 발전해 나갈지 지켜보는 게 미학적(그리고 통속적 관람의) 포인트입니다.

 

멋진 표현이 많더군요. 특히 정원군이, 경민이와 광해군이 가까워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경민이의 다소 궁색해 보이는 변명을 듣고는 "남녀 사이에는 친구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핵심을 찌르는 한 마디를 단호하게 던진 뒤, "설령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 전혀 (이성으로서) 마음에 없는 여성을, 남자가 친구로 두지는 않죠."라고 덧붙이는 장면은, 독자의 뺨에 한 줄 소름을 쫙 돋게 하더군요. 저 말 자체가 얼마나 맞고 틀리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설령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라면서, 정원군이 자기 확신에 한 뼘 유보를 남기는, 여성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 신사다운 매너와 심성이 저 말 한 마디에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설령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라! 캬, 21세기를 사는 남성이라 해도, 자신의 여자에게조차 소위 mansplain을 하려 들고, 일장 설교나 늘어 놓으면서 우월감을 과시하는 자기 중심적인 모습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물며, 조선 시대 왕의 아들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 (자기 안마당에서야) 일개 나인에 불과한 여자의 의사 따위야 그저 무시하고, 폭력을 써서라도 잠자리에 끌어들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런 강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이, 저 정도라도 은근한 언사를 구사하며, 여성을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 마음을 사고 싶어하는 뜻을 표현하는 게 어딥니까. 이런 모습으로 보아 이 소설 속의 정원군은 정말로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이랬던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나 단단히 탈이 난다면, 그건 정말로 큰일이 또한 아닐 수 없겠구 말이죠.

 

판타지 소설이 자체적으로 엄격한 규칙을 마련하고, 앞으로 전개되는 행보에 있어 스스로 설정한 그 룰에 철저히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유분방한 상상력까지 마음껏 발휘한다면, 독자로서는 그 이상 고맙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남은 2, 3권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보겠으나, 왠지 이 장르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끔찍한 비극이나 결말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도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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