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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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라는 정치단위가 주는 감흥, 동경, 위엄이란 실로 남다른 바 있는 듯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임했다가 상대가 저지른 뜻밖의 전술적 실책에  힘입어 광대한 소(小) 아시아 영토를 만지케르트에서 확보했을 때, 이들은 이곳에 룸  술탄국(國)이라는 경계를 새로 설정해서 다스렸습니다. 천 년을 지중해에서 패권자로 군림해 온 실체에 대해, 이름의 잔해라도 그대로 보존해 주는 게 자신들의 자존에 그리 해 되 것은 없다 여긴 소이입니다. 이로부터 다시 수백 년이 지나서야, 부족 시조를 달리하는 별개의 제국이 나서서, 최종적으로 "로마"란 이름을 지닌 제국의 심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현지의 신앙, 풍습, 언어에 대해 일단은 원상의 존중이란 관용적 정책을 취했습니다. 인종과 사고, 기질이 판이한 종족을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그 정도의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덕입니다. 여튼 과거의 늙고 쇠잔한 제국을 정복한 젊은 제국은, 인수한 유산과 그 유산이 뿜어내는 영광을 가능하면 본 모습 그대로 후대에 전하려고 애썼고(쉽지 않은 결단이었겠죠), 그 결과가 우리 현대인들이 목도하는 대로, 그저 평범해 보이는 공화국 터키에 그토록 많은 "인류 문화 유산"이 분포해 있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터키 정복자들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태에 대한 평판에 그 표현, 그 글자 하나마다 신뢰를 준다면, 이는 대단한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지에 가서 보아야, 투르크 제국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긴밀하고 따뜻한 호흡을 교차하고 있었는지 그 확인이 가능할 테니까요.



이 책은 한국에서 터키사 연구, 현대 터키 정세 연구에 권위자이신 이희수 교수님이, 천연색 사진 자료와 인문적 통찰, 지론을 복합해서, 현재 터키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이해가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지, 일반 독자 입장에서 편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돕는 내용입니다. 터키는 최근 IS의 발호로 다시 국경 일부가 정세 불안에 빠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서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치안 유지, 건전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당장 여행자들의 안전이 위협되는 수준은 아니죠. 이 서평이 작성된 5월 31일 현재, 터키는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교부에서 발동한 어느 주의단계(여행 자제 등)에도 해당되지 않은 국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다방면의 교류를 해방 직후부터 이뤄 오기도 했죠.

책에는 "서양이 터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신적 빚을 졌는지"에 잦은 언급이 나옵니다. 이 논의의 배경을 알려면, 서양이 터키에 대해 얼마나 나쁜 선입견, 편견을 지녔는지부터 먼저 살펴야 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소위 "성지"를 점령하고, 동시에 동서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한 후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부터, 서유럽인들은 터키에 대한 경계와 증오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십자군의 원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실상 현지인들에게 피해를 준 건 우리가 잘 알듯 기독교들의 과오가 더 큽니다. 종교를 표지로 한 두 진영의 대립이 이처럼 첨예해지고 나서는, 보다 격렬한 양상으로 군사적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잔혹한 만행이 자주 빚어졌죠. 어느 싸움이건 가해자가 피해자가 분명히 구별되는 건 아니고, 대개 자신이 도발한 범위에 대해선 쉽게 잊는 게 상례입니다. 중근세사 전체를 통해 투르크는 기독교 세력에 대해 공세적 태도를 유지했고, 서구 국가들은 자연 과장, 왜곡된 인식을 그들에 대해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술탄의 일인 전제정이 통치 전반에 걸쳐 불러온 해악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해소, 극복되지 않고 이어졌기에, 터키에 대한 나쁜 인식이 더욱 고착된 건 일부 그들이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에서 그들이 저지른 제노사이드 역시, 비슷한 시기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한 만행을 잊을 수 없는 처지에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소행입니다.

여튼 터키, 투르크는, 근 오백 년(그 이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에 걸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 만나는 접점 일대의 광대한 영토를 호령하던, 세계사적으로 겨우 중화 제국 정도나 그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강성한 제국이었고, 통치 시스템의 지속성과 세련됨 면에서 몽골 제국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원칙과 일관성, 독특한 신조에 의해 피지배 종족 다수를 다스렸기에, 문화 유산은 지배자 고유의 것이 성취한 수준을 훨씬 넘은 기존의 유산을 넉넉히 아우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 이희수 교수님이 지적하는바 "서양이 터키에 크게 빚진 사실"입니다. 투르크는 그때까지 현지에 내려오던 소중한 유산을 제국의 이름으로 끌어안아 품위 있는 컬렉션을 만들다시피했고, 이를 제국이 망해갈 무렵에도 사방에 흩뜨리지 않은 채 비교적 잘 보존하여 현대인이 온전히 감상하고 그로부터 정신적 효익을 얻을 수 있게 도왔다는 것입니다.

성 소피아 성당의 사연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처음으로 이 도시에 이슬람의 깃발을 꽂았을 때, 정복자의 관용 덕에 대대적인 약탈이 이 성스러운 건물에서 행해진 바는 그닥 크지 않았습니다. 이 유적이 큰 시련을 겪은 건, 그보다 이백 년 앞서 라틴인(프랑스인, 베네치아 인 등)들이 "못 받은 빚을 받아내려 자력 구제를 시도했을" 그 시점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토록 대대적인 약탈, 파괴, 신앙에 대한 능욕이 행해진 적은 없었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토록 어이없는 만행이 이뤄진 점과 대조하면, 터키(투르크) 정복자들이 어느 정도 여유와 관용으로 제국을 다스렸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이스탄불 현지에는 1453 파노라마 박물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터키인들로서는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이룬 이 정복이 자랑스럽기도 하겠으나, 패배한 그리스인들에게도 지존의 황제까지 그 목숨을 바쳐 가며 마지막 투혼과 애국심, 신앙심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장엄한 긍지를 갖는 대목이죠. 저도 구경한 적 있습니다만, 이 당시에 벌어진 양측의 대접전은 인류 역사상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극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이곳을 둘러보고 온 한국의 모 전직국회의장이, 그 관람의 감흥을 살려 책 한권을 지어 내었을 정도죠. 터키 당국의 훌륭한 정책적 안목이 돋보이는 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또 그 조상들은 타 민족으로부터 인수한 바를 잘 보존한) 유산만으로 관광객을 끄는 게 아니라, 이처럼 지난 역사의 현대적 재현을 통해서도 볼거리를 제작하여 웅대한 과거의 위용을 외부인들에게 상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터키는 공화국을 수립하고 수십 년 동안의 노력으로 재건에 성공하여 현재는 인구 대국, (전성기에야 턱없이 부족하나) 영토 대국, 지역 강국의 위상인데도, 제국의 해체 몰라기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아직도 외국인들 사이에 그닥 존경받는 이미지를 쌓지 못하는 게 유감이긴 합니다.


문화 유산은 곧 지난 풍속의 자취를 더듬어, 옛 사람들이 어떤 의식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영위했는지를 짐작게 하는 좋은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혼사를 앞두고 시어머니 될 이가 며느리 후보자와 알몸으로 대면하며 서로의 인격과 됨됨이를 살핀 목욕탕 문화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고부 갈등이 심한 당사자가 같이 대중탕에 다니면서 서로에 대해 한 꺼풀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눈길을 끕니다. 아무래도 기원이 같은 동아시아다 보니, 현지 혼혈과 기후 적응을 통해 크게 달라진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터키에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이, 그리스 본토보다 더 양적 질적으로 풍부하다면 많은 이들이 놀랄 만합니다. 실상은 이 소아시아 반도부터가, 특히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농경, 무역 등 여러 경제활동으로 터전을 삼던 주무대였습니다. 서양 문명의 태반 구실을 했던 그리스인들의 본향 중 한 군데를 그토록 오랜 동안 지배한 게 터키였으니, 이처럼이나 많은 박물관이 자리하여 귀한 유산을 품고 있음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터키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물게, 동과 서를 자기 한 몸에 아우른 적이 있고, 오늘날까지 인류 문화의 연속성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큰 공적이 있습니다. 책은 올컬러 편집에 백상지 인쇄이고, 휴대하기에 가벼워 현지로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가이드북으로 삼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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