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돌아봐야 멀리 내다볼 수 있다 - 꿈.사랑.도전
이인태 지음 / 리안메모아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사진이 많이 실려 있지 않으나 인생의 깊고 진득한 사연을 담았다"는 평가를 먼저 접한 후 책을 읽었으나, 이 책에는 사진도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도, 어느 한 번의 여정에서 시리즈로 찍힌 것들이 아니라, 저자분이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갓 취업한 삼성을 다니면서 자주 수행한 해외 출장, 근무시에 틈틈히 찍은 기록들이라서, 긴 세월의 흐름과 변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 제목에 나온 그대로, 젊은 시절 세계를 누비고 다니신, 그리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어느 시니어의 깊고 굵게 살아오신 어느 인생을 통해, 진정 ""깊게 돌아보고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도와 주는, 울림이 묵직한 수상록이었습니다. 해외에서의 다양한 체험이 실려 있으니 여행기로서의 노릇도 겸하는 책이랄까요.



우리는 보통 중국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1990년대 후반에 문호를 개방한 줄로 알지만,  특히 한국 기업과 사회 유력 인사들이 이 나라를 자주 드나들고 교류를 튼 건 벌써 1980년대 중반입니다. 웬만한(?) 어르신들은 "나 중공 다녀왔다"며 아이들 앞에서 자랑삼아 견문을 늘어놓곤 했었습니다. 거진 우리나라 민주화가 막 시작될 무렵과 궤를 같이하는데, 실제로 천안문(텐안먼) 사태가 발발했다가 덩샤오핑에 의해 며칠 만에 진압된 게 1989년, 한국의 유월항쟁이 있은지 2년 뒤(그리고 삼성 창업주 이병철씨가 타계한지로부터도 대략 그쯤 지난)이고, 한-중 수교가 있던 해로부터 3년 전 시점입니다. TV 화면에는 북경 시내의 탁 트인 도로로, 널찍이 열린 직장의 문을 향해 "자전거 부대"가 출근하는 장면을 자료로 보여 주던 시절이죠.



당시 한국 서울은 교통 지옥 출근길, 지하철 푸시맨이 화제에 오르던 때였습니다. 신출내기 사회 초년생 티를 아직 못 벗던 저자께서 삼성전자 직원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된 게 딱 이 무렵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2005년 경에 "앞으로 중국어 못하는 사람은 기업에 취직도 못하는 때가 앞으로 몇 년이면 다가올 것"이란 말을 한 적도 있는데, 벌써 1989년에 삼성은 중국에 진출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저 발언은 새삼스러운 말이었다고 생각되기까지 하네요. 여튼 저자분은 공대를 졸업하시고 연구원 신분으로 재직하면서, 당시의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낯설고, 낯설다 못해 금단의 땅이었던 중국에서 치열한 근무를 했던 회고를 적고 계십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단체 여행 다녀온 경험담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요즘(이라기보다 대략 10년 전부터 쭉)에조차, 중국인들 잘 안 씻고 다닌다, 부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평균적 시민들은 미개인 같은 인상이다, 등등 폄하하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명동이나 동대문 등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요우커들보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게 보통인 우리들입니다. 하물며 30년 전에는, 그것도 중국 현지(베이징이라고 해도)라면 그 형편이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죠. 진출한 외국 기업이 물론 삼성만은 아니었기에, 중국인들은 체재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여러 전용 시설을 (대단히 미흡하나마)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기가 설치된 현대식 공중 화장실이란 것도 그들로서는 매우 생소했는지, 큰일을 보는 자리에는 앞 칸막이가 아예 없어서, 저자분이 매우 난감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현지 직원 왈 "그래도 여긴 옆 칸막이는 각각 있습니다. 그게 어딘가요." 이러면서 식당에서는 외국인 줄은 따로 서게 하고 식대는 몇 배로 더 받았다는군요. 메뉴의 질이 서로 큰 차이도 없는데 중국인 줄은 그 책정가가 매우 저렴해서 불평을 털어놓으니, "안 씻고 지저분한 차림으로 그냥 중국인 줄에 서서 식사하시죠."라고 하다가, "아닙니다. 지금 상태 그대로 가셔도 통과되시겠네요." 라고 짖궂은 대꾸를 하는 동료분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는 기억도 술회되어 있습니다.

저자분이나, 이 책에 등장하시는 다른 분들의 사정만 꼭 그런 게 아니라,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인은 용모가 비슷해서 구별이 잘 안 되죠. 밖에서 보기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들끼리도, 옷 입은 거나 헤어스타일, 표정의 미묘한 차이를 보고, 혹은 주변 환경적 맥락의 도움을 얻어야 가능하지, 사우나에서 다 벗고 마주치면 얼굴만 보고 누가 중국인, 일본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같은 한국인이라도 홀쭉이 뚱뚱이 사이에 더 위화감이 들 겁니다). 저자분의 사연이 아니라 일본에 출장갔던 선배 분의 회고로,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니 주인이 하는 말이 "쉐쉐(謝謝)"였답니다. 그 무렵이라고 하면 (비록 일본이 우리보다 10여년 일찍 중국과 수교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인 방문객이 많을 시절일 텐데, 하필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착각했다는 점에 더 큰 실소를 터뜨리게 되네요. 센다이 출장 시 빈 호텔 방이 없어 사우나에서 매트 하나에 의지해서 임시로 1박하셨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게 꼭 센다이가 세계적 규모의 관광 도시라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보십시오. 타지인이 출입할 것 같지도 않은 외진 동네에도, 어지간하면 장급 모텔 하나 정도는 꼭 있습니다. 자영업(그 중에서도 숙박업)에 대한 우리 인식이, 미국과 일본 등과는 큰 차이가 나는 소산입니다. 국내 타지 출장이라면 어딜 가서도(심지어 시골이라고 해도) 잘 자리 걱정은 안 하는 게 한국이죠.

삼성 직원 신분으로 중국보다 먼저 방문, 체류했던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유학에 대해 많은 갈등도 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하시는데(저자분은 서울대에서 학부, 석사까지만 마친 분), 그 이유가 "유학생 부부치고 결국 잘되는 경우가 없었다"란 조언을 윗분에게서 들었다는 이유입니다. 물론 요즘엔 해당 없을 이야기입니다. 저자분이 유학을 하던(혹은 유학을 계획하던) 시절이라면, 도피성 유학 같은 허수 아닌, 진짜 실력되고 능력 있는 알짜 인재만 모색하던 때였죠. 출세도 좋고 학문적 대성을 이루는 일도 좋지만, 가정의 화목과 유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셨는데, 부모가 자녀들에게 반드시 갖춰 줘야 할 여건으로서, 수영 실력,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적금 통장이라고 하시는군요. 이 역시 제가 어렸을 적 특정 부류의 어르신들이 자주 하던 말씀입니다. 연배는... 저자분보다 조금 손위이시긴 하나...... 꼽으시는 삼대 리스트는 세번째 항목에서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만, 수영과 영어는 꼭 들어가더군요. 사실 그 이유(특히 수영을 두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근무하시던 시절 업무상의 일로 자주 접하시게 된 게 골프였습니다. 처음 손에 잡은 클럽으로 너무도 샷을 잘 날리셔서 "인생의 길을 이참에 아예 바꾸라"는 충고(?)까지 들으셨다고 합니다. 꼭 보면, 공부만 잘하는 것도 부러운데 운동신경까지 탁월해서 이렇게 펑펑 스윙하며 그린을 누비는 분들 보면 시샘이 생깁니다. 골프 실력 외에 회사에서의 순항 승진에 필요한 건 역시 얼굴만 보고도 척 심리를 감 잡는 눈치, 육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 앞에서 "No"를 말할 수 없는 상사분이 계셨는데, 하루는 어느 동료분이 "오늘은 기필코 안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히고 말겠어!"라고 다짐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보고를 마치자마자 그분 하는 말이 "너 지금 아니요라고 하려고 했지?"라고, 속을 훤히 꿰뚫은 선제 멘트를 날리더라는 거죠. 저자분이 이 챕터를 마무리짓는 문장은 "이분은 이후 사장까지 지내고 물러나셨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고 영예로운 별을 다느냐 하는 점에 대해, 직장인으로서 깊은 생각을 하게 도와 주는 에피소드라 하겠습니다.

휴양지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신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이 책에는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아주 근황의 샷이라기보다는 십오륙여 년 전, 어떤 건 이십 년 전쯤의 모습들로 추측됩니다만, 저자분 본인이나 사모님 표정이나 막연한 이미지 등으로 미루어, 그보다 십여 년 전, 혹은 더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셨으며 어떤 집안 출신이시겠다 하는 점까지 (제 마음대로) 짐작해 보았습니다. 저자분의 (젊은 시절) 모습도 그렇지만, 평균적인 한국 중류층에서 나고 성장하셔서 조심스레 여유로운 중산층의 삶을 가꿔 가시는 분들 특유의, 조신하고 소탈하며 겸손한 인상이 묻어났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깜짝 놀란 게, 사모님께서 일본인이셨다는 군요. 위에도 적었지만, 동아시아인들은 본디 잘 구별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전 틀림없는 (그 당시) 강남 중산층 주부님의 이미지를 사진으로부터 받았기에, 이 대목을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리고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특히 어떤 특정 성격, 타입을 지닌 분들이란, 반드시 비슷한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해로를 하는구나 하는 결론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께서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까지, 삼성이라는 굴지의 대기업(그때도 그 위상이란 마찬가지였죠)에서 청춘을 불사르던 시절, 한국의 청춘은 물론 장년층도 희망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 책 곳곳에서도 저자분의 일에 대한 집념, 애착, 그리고 사랑(이게 포인트죠! 사모님 만난 사연- 그리고 자녀분 이야기들-이 없으면 이 책의 내용은 매우 공허해집니다), 이 모두를 두루두루 돌보며 함께 몰아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권 거주 20대 절반이 백수라는, 놀라운 현실이 대한민국의 어깨를 짓누르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이 시련은, 그간 너무 앞만 보고 다른 걸 희생한 한국인들에 대해, 하늘이 우리들 자신을 돌아다 보라고 부과한 짐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책, (지난 과거를)깊게 돌아보고 (밝아오는 미래를) 널리 내다보길 권하는, 산뜻한 편제의 책을 읽고, 나이든 세대는 추억을 반추하며 공감을 보내고, 젊은 세대는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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