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박정수 지음 / 천년의상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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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드의 시 한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가 맞나 봅니다. 육아일기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 들었는데, 저자 박정수 선생님이 어린 딸 매이를 아내와 함께 키우는 사연이 적힌 이 책은, 가벼운 어조에 실린 것처럼 들리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담론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아이는 부모인 내가 살아오면서 잊거나 잃고 지나쳐왔던 모든 가능성의 보물창고"라는 저자의 말씀처럼, 아이라는 존재도 그를 지켜보는 어른에게 많은 것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가르쳐 주는 스승일 뿐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 사회의 문제, 제도의 모순, 부모로서 동료, 이웃과 설정해 온 관계들에 대한 재검토, 반성을 행하는 계기를 일일이 맞이하게 된다는 걸, 아직 아이를 낳거나 길러 본 적 없는 독자로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거 겁이 나서 결혼이나 육아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낀 건 독서의 부작용일까요.



따님의 이름 매이는 한자로 每怡라고 쓴다고 하시네요. 영어로는 May라고 쓸 수도 있겠고, 아니면 현지에서 널리 쓰이는 여성 이름인 Mae로 쓸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가 커서 어떤 영어 이름이 더 잘 어울릴지, 어떤 개성, 혹은 정치성향을 갖추고 (이름대로) 아름답게 자라나는 영혼이 될지는 이제 두 부모님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이처럼 흥미롭고 교육적인 육아일기를 읽은 우리 독자 모두가 주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이 한 명을 바르고 예쁘게 키우는 일은, 어느 부모님에게나 나름 창조주로서 자신만의 작은 코스모스를 가꾸고 성장시키는 숭고한 과업일 터입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히고, 젖을 뗀 후 이유식을 먹이고, 어떤 어린이집을 보내며, 친구나 다른 어른들과 어떤 방법으로 소통하게 할지 일일이 돌보는 일은,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도 어렵고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투입된 노동량에 비례하여 상품의 가치가 매겨진다. 그러므로 아이의 출산은 약 5분 정도의.. " 사실 이런 말은 누구의 귀에도 그 부당함이 절로 폭로되는 허약한 강변입니다. 요즘 세상에 "밭"의 가치는 무시하고 "씨"의 중요성만 떠올리는 이가 과연 있을까요. 그 반대라면 모르지만. 다만 재밌었던 건 이 화제를 꺼내면서 아빠이신 저자가 "수태, 출산 중인 아내 옆에서 남편이 겪는 콜라보를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방이나 한반도의 서북향에서 남편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산모의 고통을 "복제"하는 풍습처럼, 인류는 그 태초부터 2세의 탄생과 양육에 대한 공동의 책임, 공동의 환희를 지어 온 전통이 있습니다. 폐습이나 편견이 이런 정직한 인식을 방해할 수 없죠.

다만 좀 이상한 건, 상품의 가치가 그런 식으로 결정된다는 건 오히려 맑시즘의 입장이고, 자본주의 주류 입장은 노동가치설을 부정하죠. 모두가 잘 알듯 한계혁명 이후 "가격은 (아무리 억울해도) 수요와 공급 곡선이 만나는 점에서 결정될 뿐"이라는 게 메인스트림의 교리입니다. 여튼 투입된 노동의 소중함을 인식할 줄 아는 시선만이,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본연의 휴머니티를 다른 어떤 가치와도 타협하지 않은 채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에일리언>이 관람자들에게 공통으로 남긴 "원형적" 공포는, 여성들에게는 출산의 고통, 남자들에게는 "의사(擬似) 출산을 통해 여성의 지위로 떨어진다는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게 그 본체라는 말씀이, 정말 크게 공감되었습니다. "태아와 모체의 관계는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와 같아서, 임부가 설사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도, 태아는 모태로부터 최대한 필요한 영양분을 다 섭취한다."는 비유는 섬뜩하기까지 하지만, 의학을 전공하신 "매이 어머니"가 직접 하시는 말씀이라, 아빠인 저자분이나 읽는 독자로선 그 쿨하고 냉엄한 진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더군요.

아이가 다른 친구와 물건을 놓고 다투는 건, "소유욕"이라기보단 "닮은꼴, 거울상에 대한 반응"이란 분석이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 중에 배타적 소유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저자분에게는 중대한 질문이겠습니다. 소유와 타인 배제가 패러다이스를 지옥으로 타락시킨다는 믿음과 신념이, 정작 내 아이에게서 뚜렷이 보이는 징후에 의해 그 뚜렷한 기초를 배반당한다면... 매이 어머님은 부군에게 이런질문을 하는군요. "우리 아이가 커서 파시스트가 되어도 좋아?" 어린이에게 자신이 지닌 영혼 고유의 색채를, 분명하게 아름답게 키워나가게 돕는 일도 중요하고, 한편으로 부모님이 자신들의 양심어 비추어 용납될 수 없는 가치가 아이들에 침투해 들어가는 걸 막는 것도 중요할 겁니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참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폭력이나 위험한 접촉으로부터 무조건 아이를 방어할 게 아니라(이는 현실의 부정, 회피에 가깝다는 이유에서), 그런 예측 불가의 소통을 어떻게 순화하고, 건전한 교류로 바꾸어 나가느냐 하는 고민,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나와 남의 영역을 분명히  구별하고(이는 결국 차별로 이어질 수 있죠), 나와 타인을 선명히 고립화하는 시도는 결국 공동체의 해체를 부를 수 있다는 시사도 무겁게 와 닿았습니다. 이런 각성의 연장에서, 이른바 "중산층의 가식"으로, "먼 곳에서 고생하는 유색인종, 난민의 고통에는 연민을 표하면서 정작 자신의 지척에 있는 노동자의 희생에는 눈을 감는" 미국 리버럴들의 행태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이 미국 노동계급이 자본가에 대해서보다 더 적대감을 갖는다고 지적한 것을 떠올립니다. 저자분이 지젝의 저서를 번역한 적도 있어서 이런 인용은 더 실감을 갖는데요, 제가 책장을 찾아 보니 과연 역자 성함이 같았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질문은 유치하긴커녕, 인간 영혼의 본질을 밝혀 줄 수있는 단서일 수 있습니다. 고려가요 <사모곡>에서 "어머님같이 괴실 이 없세라"는 대목이, 능동이 아닌 수동("피동"이라고 적으셨지만 "수동"이 정확하겠죠?)이라고 국문학 전공인 남편께 의문을 제기하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언제나 두 분이 설전을 벌이면 매이 어머니가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 같은데, 아빠를 차별한다면서도 수세에 몰리는 순간 "시끄러워!"를 외쳐 콜드 게임을 만들어 약자를 돕는 게 매이입니다. 사리의 진위, 당부를 가리려면 이런 치열한 논쟁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동의된 결론에 충실하게 육아를 행하는 작업은 또 다른 단계란 걸 생각하면, 행복한 어느 부부의 육아역정을 그저 구경만 하기도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길에 나가면 발에 채이는 게 사람인데, 어린이 하나를 버젓한 성인으로 길러내기가 이처럼이나 어렵다는 사실은, 숨 쉬고 사는 사소한 동작조차 그것이 생명과 관련되어 있을진대 가벼이 여길 구석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아찔함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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