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보다 1 -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의 조선사 여행, 태조~중종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1
박찬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학교 다닐 때 학생들을 제일 괴롭게 만드는 과목은 무턱대고 내용과 사항을 외워야 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저만 해도 학년 첫 국사 시간에 대뜸 외워야 했던 게 구석기 시대 유적지, "함경남도 웅기군 굴포리, 평안남도 상원군 검은모루, ..." 등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어르신들이 왜곡되이 주입받았던 것과 달리, 이 한반도에 그 오랜 예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확인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러워야 하겠습니까만... 그 자체로야 아무 의미 없을 주소 부호의 더미를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어야 하는 아이들의 고역이란.. 그래서 제 나라의 역사를 배운다는 희열과 감격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점수나 잘 받고 때우자는 지겨움이 들러붙는 게 국사 과목이었을 것 같네요.

 

이 책을 읽은 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바겠지만, "이미지 독서를 통한 스토리텔링 한국사"라는 컨셉에 잘 맞게, 한글을 깨쳤다면 취학 전 아동이라고 해도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게끔 독자 친화적인 편집이 이뤄진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아동 독자에 주안점을 둔 쉬운 스토리텔링 한국사 아이템이 지금껏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 중 대다수는, 우리가 종래 지겹게 봐 왔던 사항 암기 위주 컨텐츠에, "~는 이었어요. " , "~라는데, ~일까요?" 같은, 경어체 어미와 조사만을 살짝 토달아 놓은, 억지 문장화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대화체라는 옷만 입고 있을 뿐 결국은 내용 암기, 지식 전달이니, 어린 독자들이 딱딱한 교과서와 달리 느낄 바가 없었죠.

 

 

이 책은, 컨셉으로 내세우고 홍보한 바와, 독자가 실제로 책을 펴 읽고 느끼는 바에 별 괴리가 없다는 게 최고 장점입니다. 말 그대로 이미지 독서이며(참신한 도판 풍부), 말 그대로 스토리텔링 국사입니다. 지금껏 앙상하게, 키워드 위주로만 툭툭 던져 놓고 나머지는 교사와 학생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던 한국사가, 이제 발그레한 살색이 되는 피부에, 생기 있는 영혼이 비치는 눈빛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아니 그게 이런 내용이었어?" 같은 놀라운 느낌, "대하 역사 소설 못지 않게 재미있는 게 조선왕조 오백년사였군!" 같은 희열이, 모든 독자들의 뇌리와 가슴에 스치고 지나갔을 줄 압니다. 저도 정말 좋았습니다. 독서란 활자의 소화, 해독(解讀)이라는 고역이 아니라, 이처럼 읽는 쾌감과 보람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책은 조선의 창건자 이성계의 고조부에 관한 사연부터 시작합니다. "당연하다"는 건, 이 책이 조선사를 다루고 있으니 창업자 태조의 가계부터 훑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이 책이 다룰 내용 중 시간적으로 가장 앞서는 게 이안사의 사연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 챕터에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공민왕 때의 여러 사실(史實)들입니다. 대개 전주 이씨의 북방(삼척) 이주는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벌어진 지방관과의 알력" 때문이라고 간략하게만 짚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제법 상세하게 이 웃지 못할 소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 사관이 의도한 바는, 세력 다툼에서 부당하게 밀려 대거 사민(使民)을 단행해야 했을 때조차, 따르는 주민이 백여 호, 천여 명에 달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목조 이안사가 덕망 높고 결단력 있는 대토호였음을 암시하려는 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의방-이인(李麟. 이 책에서는 "이린"으로 씁니다) 이후 벼슬길이 막힌 이들 문중이, 농민 반란 비슷한 걸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패퇴한 것이라는 추측을 내어 놓습니다(학계에서 널리 통하는 유력설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가설이라면, 산성별감이 또다시 삼척으로 부임해 와 2라운드를 이어간 곡절도 보다 매끄럽게 설명이 됩니다. 이 사람은 중앙에서 파견된 일종의 "특임 초토사"였던 셈이라고 말이죠.

 

이 책은 이처럼, 불친절한 사항 나열과 제시만 툭 던져 놓는 식이 아니라, 역사 본연의 속성에 맞아떨어지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의 내용을 충실하게, 그리고 친절히, 독자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역사(history)란, 본질적으로 이야기(story)입니다. 프랑스어 어원상으로도 두 단어는 의미의 궤를 같이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배우면 재미도 있고, 시험에 출제되는 다양한 항목들에 대한 암기도 쉽게 이뤄집니다. "이야기"는 뚝 떨어진 지점과 지점을 잇는 고속도로이며 튿어진 자락을 붙여 주는 무지개실과도 같기 때문이죠.

 

 

"개혁의 아이콘" 신돈이 일선에서 물러난 후 고려의 국운은 돌이킬 수 없이 쇠퇴일로를 겪습니다. 공민왕은 상처(喪妻) 후 이성과 통제력을 잃고 방황하다 죽음을 자초하다시피 했고, 우왕은 요동 정벌을 하라고 보낸 이성계, 조민수에게 배신을 당한 후 최영과 함께 몰락, 최후를 맞죠.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소위 "4불가론"의 논리적 허점,원정군의 진군보다 귀환 속도가 "두 배나 빨랐다"는 사실 등을 들어 위화도회군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을 취합니다. 정사 위주의 고정되고 호도적인 관점만 취하는 게 아니라, 어린 독자들에게 어떤 강요된 결론 주입이 아닌, "비판적으로 볼 것"을 은근 권유한다는 면에서 이는 바람직합니다. 다만 1) 기존의 텍스트를 놓고 회의적 의견을 피력할 때에는 문헌적 반대 근거를 충분히 갖추어야 하고, 2) 학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이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를 넉넉히 살펴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 나온 주장, 견해들은, 저자만의 관점이 아니라, 많은 토론과 논쟁을 거쳐 걸러지고 검증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학부형들은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조선 건국 당시 대륙도 원명 교체기였고, 불세출의 인걸이라 할 주원장이 건국의 토대를 놓던 시절이라, 우리 조선 건국의 주역들과 이들 명 조정 핵심 세력 간에 오간 교류, 다툼, 일측족발의 위기가 제법 자세하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종래 우리 국사 교과서나, 그 주제가 조선사에 한정된 개론서들은, 대명 관계 서술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어, 국내사와 밀접히 얽힌 이 시기 동아시아 국제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데 대단히 미흡한 바가 많았습니다. 정도전의 표전문이 어디가 불손하고 무례해서 명 태조가 그를 압송하게 했는지, 어쩌다가 그런 외교갈등이 유야무야 봉합되었는지, 서술이 소략해서 알 수 없고 따로 논문을 찾아 봐야 했었는데, 이 책은 어린 독자들을 상대로 하고 있음에도 이처럼 명쾌하고 상세하고 가르쳐 주고 있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명 태조에 얽힌 에피소드 중, 자신의 지난 시절을 부끄러워 한 그가 특정 글자(則, 禿 등)을 금지했다는 사실은 유명한데, 정도전의 표전문이 이와 관련있다는 점도 지적하여, 중국사와 한국사의 교점을 매혹적이고 종합적으로 서술상의 구축을 꾀하고 있군요.

 

 

국사(국사 뿐 아니라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는 정치사에 한정된 영역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적, 유물이 과거에 어떤 의미와 기능을 지녔는지, 지금과 과거를 유기적으로 소통시키는 것도 그 고유의 목적입니다. 이 책은 정도전의 한양 건설기를 다루면서, 사대문의 원위치와 현 모습, 각각의 쓰임새와 변천사 등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링"이란 구성, 체재를 취하면, 정해진 분량 안에 다룰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는 게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만, 이 책은 그래픽을 적절히 활용하여, 구구절절한 텍스트보다 더 효과적으로, 필수 정보를 (더 이해하기 쉽게)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왕자의 난을 다룬 대목도 흥미진진합니다. 조선 자체가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지만, 왕조 초창기가 그토록 골육상잔의 후속 쿠데타로 점철된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저자는 건조하게 가치중립적 정보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예컨대 정도전은 저서 <불씨잡변>에서 불가적 인과응보를 몹시도 힐난한 바 있었는데, 과연 응보의 원리가 미흡하게 작동해서인지 그가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며 짧게 평하고 있습니다. 양녕대군에 대해서도, 그가 적장자로서 왕위에서 밀려난 원한을, 세조의 쿠데타와 조카 살해를 지원함으로써 비열하게 풀었다고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역사의 숨은 컨텍스트와 의미를 애써 발견,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 책의 본 취지인 "스토리텔링, 살아있는 맥락의 재현"이란 컨셉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 장을 읽으면서 이성계의 2처 6자 이름과 칭호가 한 번에 정리된 건 가외의 소득입니다.

 

세조에 대한 평가는 몇 차례의 변천을 겪어 왔죠.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대로, "조카를 죽이고 형을 배신한 패륜의 악당- 사육신에게 혹형을 가해 죽인 폭군"에서, "국가의 펀더멘털을 재정비한 유능한 독재자"로 바뀌었고, 이제는 실록의 완역과 왕성한 연구에 힘입어 "국가 이념인 성리학적 질서를 근본에서 부정했고, 측근과 공신들의 방종, 부패를 조장한 악덕 정치인"으로 다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예전부터 민중들 사이에 인기 있었던 "사육신의 장렬한 최후"를, 야사에 머물지 않고 숨겨지고왜곡, 은폐되었던 진실의 지위로 다시 끌어 올려, 역사의 정(正)과 사(邪), 직(直)과 곡(曲)에 대해 에두르지 않고 서술자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수대비의 시동생인 예종의 죽음에 대해 저자는 독살설을 지지하는 듯합니다. 세조에게 "표빈"이라 불렸던 그녀는 일찌감치 자신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잘산군)을 보위에 오를 후보로 점찍고 있었으며, 금상의 승하 직후 지체 없이 보위의 승계가 이어진 점이 그리 석연치 않고, 담당 어의가 이후 후한 대우를 받고 신분이 상승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꼽습니다. 독살설은 근래 무분별하게 이곳저곳 추측 적용되는 감이 있어 학자들에게 비판도 받지만, 이처럼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경우에야 제때 제기되어도 무방하겠죠.

 

연산군은 풍운아같은 삶을 살다, 조선 들어 처음으로(그리고 이후로도 단 한 번의 유례만 남길 정도로 드물게), 신하들에 의해 "반정"의 형식으로 쫓겨 난 임금입니다. 출생이나 정통성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명석한 두뇌와 군주다운 용모를 지녔음에도 그런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저자는 특히 내시 김처선의 일화 소개를 통해, 천한 신분도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직언하다 목숨을 내놓는 장거를 펼칠 수 있음을 예증합니다. 이처럼 이 책은, 건전한 주제의식과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 매 페이지, 매 챕터에서 돋보입니다. 1권은 중종 때의 혁신가, 유림들의 아이돌이었던 조광조, 그를 숙청한 사장파의 거두 남곤, 심정의 사연으로 마무리됩니다. 죽는 순간 묘비와 문집을 일절 남기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서, 요즘의 타락한 정치인들보다 오히려 낫게 볼 구석이 저들 유취만년의 양심 일말에 남아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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