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가 기억하는 비범한 여성들
서영 지음 / 책벗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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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저는 막연히 "중국 역사에 이름을 떨친 여걸들"로 선(先) 프레임을 잡고 있었습니다. 15인의 여성 면면을 들여다 보니, 그 중엔 꼭 "여걸"이라고 할 수 없는 위인도 더러 있더군요. 그런 생각이 들고서야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책 표지를 다시 들추니, 책의 제목은 의연히 <중국 역사가 기억하는 비범한 여인들>이라고 적혀 있음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이 책에 실린 15명의 여인은 다들 비범했습니다. 어설픈 과잉자의식이나 근거 없는 사이비여권론이 아닌, 자신의 자아, 개성, 재능과 사회적 직분에 충실하고자 했던 성심(誠心)과 성의(誠意)로 가득한 영혼은, 설사 숨쉴 틈 없이 척박하고 부조리와 모순에 가득 찬 남성 위주 체제 아래에서도, 그  맑은 향취와 찬란한 광채를 이처럼이나 빛내고 있었던 거죠. 그런 여성들이 어디 이 15인뿐이었겠습니까. 세상의 하늘 반은 여성이 떠받치고 있는데, 당대인이 몰랐거나 애써 외면했을 뿐, 혹은 우리가 무지해서 알아 보지 못했을 뿐, 아마 훨씬 많은 수가 음지에서 인류 문화의 발전, 정신의 윤택화에 이바지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후대인들이 제한적으로나마 "기억하는" 여성 15인이라는 의미이겠으며, 앞으로도 역사가 영원히 기억해야 마땅한 인생과 족적이라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는 제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책은 처음 받아들었을 때 독자를 많이 놀라게 하더군요. 표지 디자인이 예쁘고, 그 표지 화면 다소 오른쪽에 치우친 채 정면을 비스듬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시선으로 대하는 여성의 자태가 매혹적이기도 하고, 내용을 인쇄한 속지 모두가 초고급 백상지인데다, 천연색 도판이 잔뜩 실려 있다는 점에서였습니다. 내용이 설사 별로라고 해도, 이런 편집이면 독자에게 베푼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시덥잖은 기분으로 책을 읽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내용도 최강레벨이었습니다...


주로 중국 저자, 혹은 한국의 신출내기 저자들의 컴필레이션 중 이런 컨셉을 잡은 책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런 책들은 대개 일관된 퍼스펙티브가 없고(혹은 지루한 내용 나열 중 편협한 독단과 아집이 느닷 튀어나온다거나), 여러 원전을 인용한다고는 하지만 내용을 보면 아주 흔한 대중서, 혹은 지나치게 자주 인용되는 고전 두어 권에서 내용을 조금씩 뽑아 이은 게 전부입니다. 그런 책들은 보통 본격 역사 대중서라기보다 자계서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데, 사실 역사의 원전을 충실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계서의 기능조차 온전히 수행한다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일단 중국 정사(正史)를 직접 참조한 흔적이 완연합니다. 우리가 권위 있는 개론서를 보더라도, 저자의 명망을 그저 믿고 내용을 섭취할 뿐이지, 그 중 어느 정도나 확고한 문헌적 근거를 지니고 전개되는 주장, 정보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눈을 감을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기존 개설서에서 무심히 게재되었던 여러 낭설, 혹은 의심스러운 명제 등에 대해, 본 텍스트 외 별개 꼭지나 박스를 마련하고, 교차 검증이나 치밀한 논리를 통해 반박하는 대목이 제법 많습니다. 대중서라고 해도 이 정도의 내용 밀도가 확보되어야, 독자들이 아까운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보람이 있을 겁니다. 저자가 자신만의 역사관(아집이나 낭설이 아닌, 문헌적 통찰의 산물)을 가지고 원전을 비평적, 비판적으로 재단, 재구성하는 노력과 내공이 엿보여야 그걸 역사서라 불러 줄 자격을 확보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다음으로, 아무리 중화 24사(二十四史)가 권위를 지닌 기록이라고 하나, 현대 사학의 관점에서 무류의 텍스트로 군림하게 할 수야 당연히 없습니다. 이 책은 해당챕터의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여인들에 대해, 문집이 남아 있으면 그 기록을 토대로, 또 사인(私人)의 회고가 남아 있으면 그것대로 충실히 검토하여, 이를 균형 감각 있게 조합하여 자신만의 시선이 관통하는 멋진 구축물을 짜내고 있습니다. 대중서 한 권에 이만한 공력이 들어가기가 정말 쉽지 않고, 요즘의 척박하고 개탄스러운 출판 풍토에 공연히 독자 눈높이만 높여 놓은 게 아닌지 하는 우려(?)도 들었습니다. 저자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은 중국 현지의 지인들과 접촉해서 의문을 해소했다 하니, 작가에게 있어 인적 연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구요.

책의 1장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미녀스파이" 서시입니다. 고사 "효빈"의 모티브, 혹은 중국 3대 미녀니 뭐니 할 때의 그 여인이 맞습니다. 달기, 포사 등과 그녀가 차별되는 점은,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미션을 성취한 최초의 여인이었다는 사실이겠죠. 경국지색의 요녀들로 꼽히는 경우는, 대개 아무 생각 없이 말초적 향락이나 권세욕에 물들어 자신도 망치고 주위도 몰락시킨 "실패자"들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들이 어디, 폭군을 망하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황음을 유도한 "논개적 지사"들이라기라도 하겠습니까?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종래 유교적 윤리관에 의해 "악녀"로 규정된 케이스에 대해 무조건반사적 찬양을 하고 보는 태도 역시, 전근대적 무지의 산물임이야 재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책은 그런 관점을 지양하겠다는 듯 첫 챕터의 기수로 이 서시를 등장시켜, 비록 수동적 입장이었을망정 일관성 있는 의지에 의해 대업을 완수한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분이 부정적 요소가 끼지 않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도, 그녀가 다만 보기 드문 미인이란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3장은 한 고제(高帝)의 배우자이자 사실상의 공동 창업자였던 여후를 다룹니다. 이 책의 장점은, 챕터 첫머리에 인물의 최후라든가, 절체절명의 위기라든가 하는 사건을 소설투로 배치하여, 독자의 극적 흥미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도는 문장이 능란하지 못하면 자칫 유치한 호객행위로 끝날 수도 있는데, 이 책의 저자분은 필력도 참 좋으신 편입니다. 속어나 시쳇말에는 따옴표를 일일이 붙여서, 부득이하게 이런 어휘를 배치할 뿐이라는 의도도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니 어떤 소개도 새삼스러울 뿐이지만, 저자는 척 부인 등 다른 여인들의 관계나 시점을 자주 끌어들여 서술상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라고 터무니없이 미화한다거나, "그녀 역시 남존여비의 체제에서 일개 희생양일 뿐이었다"는 식의 천편일률 견강부회 합리화 없이, 악행의 응보를 받았다는 취지로 마무리하는 점도 깊은 공감을 자아내었습니다. 다만,.... 저자분은 여치를 두고 "정사에 단독 전기가 실린 유일한 여성"이라고 하시지만, 당장 8장의 주인공 무측천만 해도 <舊당서>에 본기가 따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新당서>의 경우 중종과 합술된 체재라, 아마 작가분이 착오한 것 아닐까 추측합니다.

2장에 실린 대사업가 과부 청(淸)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이 다 있었어?"라 할 수 있으나, <사기> 화식열전에 엄연히 나와 있으니 대중적으로 낯선 인물도 아닙니다. 물산이 풍부하고 비교적 남녀 평등 기조가 살아 있는 내륙의 파(巴) 지방에서 나온 인물이라, 사실 우리 선입견마냥 무슨 기적 같은 존재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요즘도 이런 여걸은 찾기 힘들다."고도 하시는데, 우리 나라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는 불굴의 의지, 불세출의 재능과 수완을 지닌 여성 사업가들, 제법 많습니다. 우리 시대의 청 부인이 혹시 누가 있을지, 먼저 현대의 한국부터 둘러 보게 해 주는 아주 유익한 내용이었고, 더불어 시황 영정이 모성에 대한 배반, 상실감에 의한 보상심리로 어머니뻘 그녀를 각별히 대접했다는, 여성 저자 특유의 시선, 해석도 제게는 흥미로웠습니다(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만).



5장의 반소는, 여성의 손으로 쓰여지는 역사서가 다루는 여성 사학자라는 점에서 이 책에선 각별한 의미, 자기지시, 나아가 책의 요체와 주제를 함축하는 의의를 지니겠습니다. 흔히, 공(功)은 군주나 가장(家長), 무리의 수뇌에 대표로 돌리고 마는 동양 특유의 악습 때문에 최초 단대사(斷代史) <한서>의 저술을 반고의 업적으로 치부하고 말지만, 보기 드문 탤런트였던 그녀가 이 대사업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이미 종래의 개설서들에도 인색하게나마 크레딧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6장의 채문희와 더불어, 여성이라도 특별한 두뇌와 소양, 능력을 지닌 이라면, 특히 남성 군주가 자신 역시 특별한 자질을 지닌 조건이라 성별 불문 재능의 소중함을 알아볼 자질이 있을 때, 언제라도 특채되어 제 기량을 발휘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조맹덕 역시 수백 권의 문헌을 선 채로 암기하는 문희를 보고 얼마나 대견하게 여겼을지, 그 흐뭇해하는 미소가 지면 너머에서 선히 전해지는 듯만 합니다.



8, 9장의 주인공은 무측천과 상관완아입니다. 무측천 역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라 이 챕터에 실린 내용이 그리 새롭게 와 닿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대신 그녀의 치세 한 귀퉁이를 든든한 들보로서 떠받든 명리(名吏) 상관완아는, 이런 책의 한 장(章)의 주인공 노릇이 따로 맡겨질 만한 자격이 충분하죠. 어떤 이는 사서에서 자주 만났으면서도 그가 여성인 줄도 모르더군요. 중국 역사상 빼어난 행정능력과 기민한 정치력을 지닌 여성 인재가 어디 그녀뿐이었겠습니까만, 이처럼 "여인천하"의 무대가 마음껏 펼쳐질 수 있는 호풍(胡風) 완연한 세상이라야 두각을 나타낸 이름이 한둘 거명되는 게, 얼마나 큰 역사의 손실이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챕터에 곁가지로 나오는 위황후니 태평공주니 하는 이들도 보통이 넘는 수완이었겠으니, 가히 이 시대야말로 여인들이 규중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한껏 켜던 드문 황금기라 하겠습니다

"여류 문인"이란 말은 부당한 편견이 잔뜩 서린 지난 시대의 용어입니다. 섬세한 감성과 미묘한 포착력으로 별천지의 심상을 제시함은 본디 여성 본연의 영역이니, 주객이 전도된 비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현기, 이사사, 이청조 등은, 여성의 문재가 어느 경지, 어떤 성취를 보여 줄 수 있는지를 증명한 일류 문인들이라 할 수 있스습니다. p196에 보면 청대의 그림을 소개하며, 어현기의 이름이 "원기"로 적힌 것에 대해, 강희제의 본명인 "현엽"에 대한 피휘 목적이라고까지 친절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분 역시 당나라 때 인사라는 게 못내 아쉬운 점입니다. 이후 송대, 명청대라고 해서 이만한 여성 문인의 재목이 일정 비율로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겠습니까? 도교가 성행한 왕조답게, 어현기 역사 도사 신분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점입니다.

저 위 상관완아와 비슷한 처지(그러나 상관씨는 재상 취급을 해 줘야 할 관직을 보유했다는 게 다르죠)로, 북제의 여관 육영훤이 소개됩니다. 역시 국내 독자들은 잘 모르는 이가 많을 것 같은데요. "태후로 사는 것보다 장안 기생 노릇이 더 즐겁다."고 했던 호황후 시절 내관이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겠죠. 제가 이 책 읽으면서 특히 즐거웠던 건, 저런 인기있는 에피소드에 대해, "정사에 근거가 없으니 야사일 수 있다"고 분명히, 일일이, 선을 긋는 저자의 태도였습니다.

심지어 14장을 보면 "내조의 여왕 마황후"라고 해서, 발 크기로 소문난 마황후 이야기뿐 아니라, 그 부군 주원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까지 돕고 있습니다. 사실 주원장이야 그 흉칙한 외모, 불우한 성장 과정 탓에, 세상 누구보다 외로운 인간이었을 텝니다. 이런 그에게, 성격상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마황후야말로, 필생의 동반자요 요철의 궁합 아니었을까요. 책 중에는 주원장 본인의 회고를 인용, 화적 시절이나 탁발승 처지에서 천자의 자리까지 오른 자긍과 호연지기를 마음껏 표현하는 문장이 남아 있는데,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특정 한자를 금칙어로 만들었다는 건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놀랐는데, 제가 아는 바와 크게 달라 주말에 국회도서관에 가서 확인을 해 볼 생각입니다.

권말에 참고문헌 목록이 없는 건 아쉽지만, 대신 본문에 일일이 인용 문헌 제목을 대고 있으므로 흠잡을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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