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에 사는 남자
피터 S. 비글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묘지란, 죽은 이들을 위한 장소이지 산 사람이 거기서 터잡고 의지할 데가 당연히 못 됩니다. 죽은 뒤 한 줌 흙으로 변할 육신에, 따로 그를 뉘일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엄밀히 말해 죽은 이들을 위한 곳이라기보다 그를 먼저 떠나 보내고 남아 있는 이들의 마음을 위한 장소가 묘지일 뿐입니다. 설사 망자와 각별한 사연, 연고가 있는 이라 해도 묘지에서 숙식, 기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 유교 문화권의 경우 "시묘살이"라는 미풍이 권장되기도 했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 상황입니다.

 

산 사람이, 그곳에 딱히 연고를 가진 이의 유해가 안장된 것도 아닌데 묘지에서 내내 생활한다면, 그리고 그곳의 유령들, 그곳을 자주 찾는 금수들과 대화를 즐겨 나눈다면 이는 분명 정상이 아니고, 아마 사회로부터 (정신 병원 입원 등) 특별한 조치를 받기에 충분한 "질환"을 지닌 걸로 판정받을 수 있습니다. 조너선 리벡은 초로에 접어든 남성인데, 놀랍게도 그는 19년째 지역의 공동묘지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관리측으로부터 들키지 않고 이어 온 기인입니다. 예전, 한국의 국가대표 양궁팀 코치진이 담력 강화 훈련의 일환으로 선수들에게 밤중에 묘지 일주를 시키곤 했다는데, 이 리벡이란 분은 묘지 안이 아니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고 하니, 그가 자발적으로 세상을 거부해서 묘지에 정착했다고는 하나, 세상 역시 설령 그가 묘지 밖으로 나오겠다고 해도 그의 정신 건강을 의심해 모처에 격리할 만도 하겠습니다.

 

여튼 그는 (묘지 관리 당국을 포함하여) 세상에 들키지 않고, 19년이란 긴 세월을 버텨 왔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본디 망자들과 친한 걸로 여겨져 온(그래서 인간들에 의해 불길하게 취급받아 온) 동물 중에 까마귀가 있지요. 까마귀 중 별난 놈 한 마리가 이 리벡 씨와 친합니다. 이 까마귀가 매번 어디서 훔쳐 오는 음식에 의지해서 리벡 씨는 살아왔습니다. 리벡 씨는, 이 지능 높고 시니컬하며 의리 있는 까마귀와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리벡 씨가 신통하다기보다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신문까지 읽을 줄 아는(작품 중간쯤에 나옵니다) 이 까마귀의 능력이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벗으로 사귀어 왔건만 리벡 씨는 까마귀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지 않고, 까마귀도 자신이 종(種)을 대표한다고 여기는지 아무개라 불러달라는 요구를 (리벡 씨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군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나 둘리틀 박사도 아니면서 리벡 씨는 이 까마귀와 의사 소통이 가능하지만, 그 외에도 조너선 리벡은 망자의 혼령들과 대화가 가능하고 혼백들의 형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혼백들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걸로 나오는데, 리벡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현재 꼴을 묘사해 줄 수 있으니, 유령을 보고 까무라치지 않는 것만 신통한 게 아니라 분명 오랜 묘지 거주 생활 동안 모종의 능력자가 된 겁니다. 리벡의 신통력은 아닌 것이.. 소설 중반 쯤에 이런 능력자 한 명이 더 등장합니다. 리벡은 그리 긴 시간을 공동묘지에 살았으면서 "그"도 그런 능력을 지니게 된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능력자(?)라곤 하나, 다 자란 성인으로서 경제할동에 참여하지 않고, 모든 (살아 있는)이들이 기피하는 장소로 숨어들었다면, 그런 사람은 무능력자로 취급 받아 할 말이 없을 건데요. 사실 그는 약제사라는 버젓한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소설 후반에 나오듯) 직업인으로서 그리 지식과 기능이 뒤떨어지지도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전문직종 종사를 통해 부를 쌓고 성공을 누리는 길을 거부하고 가장 침침한 응달로 퇴장한 건, 어떤 사연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작품을 직접 읽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소설을 처음 읽어나가는 이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서술은, 사람이 죽고 나서 그 영혼이 과연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되는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실감(?)나게 써 놓은 첫 오십 페이지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체가 없어도, 마치 불구가 된 이가 아직도 팔다리가 그 자리에 놓인 걸로, 아픔도 느끼고 거동도 가능한 듯 착각을 하는 것처럼(이런 걸 유령감각이라고 하죠), 죽은 지 얼마 안 된 혼백들은 생전의 신체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감각이니 감각에 대한 기억이니 하는 게 죽은 자신과 무관한 사정이라는 걸 깨닫고 다 잊기 시작합니다. 추억은 신체의 작동과 딱히 관련이 없지만, 죽은 자에게는 시간(과거-현재-미래) 개념도 없으니 결국 자신이 누구였는지,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헸으며 어떤 취향과 세계관을 갖고 살아 왔는지 차츰 잊어갑니다. 이렇게 모든 기억을 잊으면, 그 영혼은 비로소 "무(無), 부존재"의 상태로 변한다는 게, 리벡 씨가 신참 유령들에게 들려 주는 진실입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솔직히 재미있다기보단 마음이 슬퍼지더군요. 사람은 돈보다, 명예보다, 자신이 순간순간 살아오며 쌓아올린 기억과 추억이 가장 소중한 건데, 육신을 잃고 마침내 정신까지 잃어가는 그 사후의 과정.... 그래서 리벡 씨와 막 친해진(죽은 지 얼마 안 된) 마이클 모건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있지도 않은 팔다리를 놀리고 기지개를 켜고 정신을 집중하여 사멸해 가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온갖 애를 씁니다.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한 자신과는 달리, 무기력 속에 사실상 자살을 택한 로라(의 유령)를 맞이한 그는, "죽지 말고(?) 자신처럼 유령으로서 깨어 있으라"며 격려도 하고 자극도 주고 아주 열심입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리벡 씨는 이 젊은 유령들의 이상한 교제를, 다소 시큰둥한 태도로 바라봅니다.

 

리벡 씨는 새 친구가 생기는데, 망자는 아니고 미망인(....)입니다. 부인의 행색이나 망자를 위해 조성한 묘역(영묘)의 규모를 봐선 대단히 부유한 계층 같습니다. 죽은 남편 모리스를 몹시도 그리워하던 거트루드 클래퍼 부인은, 이 리벡 씨를 우연히 발견(그는 숨어 사는 처지입니다)하고, 자신보다 좀 더 나이 든 초로의 그에게서 죽은 남편의 모습을 찾고는 그에게 갑자기 친밀감을 느낍니다. 물론 묘지에 숨어 사는 괴짜, 정신이상(으로 오인되기 충분한) 노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구요.

 

리벡 씨가 19년 동안 묘지에 숨어 살았다고는 하나, 그는 속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들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을 지 모릅니다. 특히 소설 2/3 정도가 지난 후, 그가 "누구"와 주고받는 희극적 대화 속에는, 아예 "은둔의 발각"을 바라고 있는 그의 속내가 드러나다피합니다. 리벡 씨는 자신이,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의 대체물이 되는 걸 극력 기피하는 마음이었는데, "누구"를 만나고부터는 그런 부담을 마음에서 씻어 버리고, 자신을 향한 "누구"의 진심을 확인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는 결단을 내리죠.

 

작품에는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마이클이 젊은 나이에 이 묘지에 묻히게 된 건 그의 아내로부터 독살을 당해서라는 게 그의 설명인데(초반에 이 대목으로 끝나는 챕터까지 읽고 독자들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마이클의 부인 샌드라 모건은 남편을 독살했다는 혐의로 사법기관에 의해 기소됩니다. 소설은 까마귀가 신문 보도를 통해 알려주는 재판의 경과 소식으로 이 사연의 꼭지를 한편에서 이어가고 있으며,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독자는 이 흐름으로부터도 관심을 놓지 않습니다.

 

나머지 한 번의 반전은... 이게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어느 작품이건 결말에선 그간 꼬이고 악화되어 왔던 인물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모럴의 고양과 보통 함께 해소됨을 추구하죠. 이 소설은 리벡 노인이 "누군가"의 쿨한 훈계를 듣고 마음을 다잡으며, 로라 역시 "누군가"의 실제 사연이 듣던 바와 다르다는 걸 알고 마음을 놓은 후 리벡 등 "산 자들"에게 어떤 부탁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야 우습기 짝이 없는 소동인데, 사건 전개를 지켜 봐 온 독자들은 마음이 짠해지는 내막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커플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해로를 하게 되고, 다른 커플(?)은 죽음도 갈라 놓지 못할 결합을 이룹니다. 환상과 위트가 가득한 속에, 우리들도 과연 존재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미워한다는 그 숭고한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내러티브와의 만남 후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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