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종말 - 다른 세상의 시작
모이제스 나임 지음, 김병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OO의 종말" 같은 테제, 선언에서, 만약 subject가 "권력"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독재 권력', "부패 권력", 혹은 "무능한 권력" 등 부가 수식어가 따로 붙어 줘야 하지 않나 같은 느낌을 조건반사처럼 갖게 됩니다. 그런 느낌의 이면에는, "나쁜 권력은 없어져야 한다 쳐도, 권력 일반, 혹은 권력 일체가 사라진대서야 인간이 어떻게 질서 있는 삶을 살까?" 하는 우려가 서려 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권력의 종말"이라고 하면, 그건 정치/사회학의 테마라기보다는 형이상학의 논제만 같습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지상에서는, 정부니 권력(권력은 심지어-당연히- 정부보다도 더 상위의 개념입니다)이니 하는 것이 소멸할 일이 없을 것 같고, 또 없어야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건전한 상식의 범주에 드는 것 아닐까요. 링컨의 그 유명한 말, "국민의, 국민에 의한... "도, 문장의 술어는 "결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will never perish)로 끝납니다.


물론 일부 독자(저 포함)의 괜한 우려와는 달리, 모이제스 나임의 이 책은 "권력이란 한때의 공룡처럼 멸종하게 되어 있다!"를 외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의 성향대로, 무정부주의에 온정적이고, 패권적 권력을 혐오하며, 중앙집권을 우려하고, 소수로서 버티고 저항하며 그 모든 권위에 침을 뱉는 투사들을 옹호합니다. 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수사를 동원하면서도 의미의 명징성과 가치지향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평선 멀리를 응시하면서도 신중히 발 아래를 살피는 스칼라십으로 비전과 훈고(訓故)를 동시에 좇습니다. 어언 육십줄에 접어든 그가 학자적 권위와 관료적 유능함으로 평판을 받는 외에 대중들 사이에서 락스타적 인기를 누리는 데에는 글과 저서로 표현하는 이런 탁월한 재능과 관록 덕분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권력의 종말"은, "권력"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환과, (사후적이라고 해야겠으나 사실상 사전적이 되어 버린) 현상으로서의 권력이 보여 주(고 있)는 확연한 규모적 퇴조를 가리킵니다. 크면 클수록 좋았고, 피치자의 동의만 구한다면 더 확실하고 더 강력한 행사가 가능한 모습이 선호되었던 권력,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빚어낸 피조물이 더 이상 아니라 오히려 저를 빚은 인간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 들었던 금송아지 우상과 같았던 권력이, 이제 진짜 주인들의 자각과 필요에 의해, 줄어들고, 능멸당하고, 나눠지고, 심지어 폐기까지 고려되는 처지로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산업화 시대를 풍미했던 거대조직 지상주의는, 이제 산업계건 정부부처이건 자치공동체이건, 심지어 문화, 스포츠, 예술계에서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장을 과점하고 진입장벽을 높다랗게 쌓아 올리며, 철조망을 넘는 이들에게 사정없는 총질을 해댔던 타이쿤들은, 내부 활력을 잃거나 외부 게릴라의 간헐적인(그러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 더 이상 제 자리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1984년 슈퍼보울 결승전에서 만장(滿場)의 관중과 TV 시청자들에 선보였던 애플의 전위적인 디스토피아 컨셉 광고는, 이 책에서 "권력의 종말"을 의미심장하게 예언했던 묵시적 퍼포먼스로 저자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는 각국의 정치계를 조망하며, 도대체 한 번 뽑혀 나라를 다스리라는 위임을 받은 총리, 대통령들이, 정당성에 일점의 하자도 없는 상황에서, 안정감 있게 리더십을 행사할 여유조차 없이, 스캔들과 능력 폄하에 시달리며, 기소와 탄핵, 정쟁과 압력(시민사회나 로비단체)에서 벗어나질 못하다가, 임기도 못 채우고 낙마하는 일이 잦음을 지적합니다. 대통령이 헌법에 보장된 권한으로 지명한 각료들의 취임에조차, 상원의 인준을 통과하려면 6개월이 넘는 일이 다반사니, 행정부의 4년 임기 중 1/8을 허송하는 이 같은 풍경이 지난 세기 중반만 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는 지적은 우리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개인"이라는 미국 대통령이 이 정도이니, 전통적으로 내각의 수명이 짧았던 유럽 여러 나라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사실 21세기 들어 한국의 대통령들이 줄곧 맞고 있는 운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죠(여담인데, 이 책에서 한국 관련 토픽은, 기존 차산업계의 굴지의 거인으로서 행세하던 유명 메이커 외에, 최근 크게 약진한 글로벌 중규모 업체로서 현대자동차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위 문단에 적은, 산업계에서의 거대 권력 붕괴를 예증할 좋은 케이스죠).



이 책의 도입부는, 평소 그의 문장이 보여준 날렵한 스타일답게, 세계 체스 리그의 판세 변화를 예증으로, 그리고 하나의 비유로 끌어대고 있습니다. 그가 새삼스럽게 지적하는 것처럼(언급 안 하면 독자가 못 알아들을 걸로 생각했나 봅니다), 체스는 권력현상을 설명할 때 구조에 대한 직유 수단으로 쓰이거나, 문학적 수사의 일부로 자주 인용되는 범주입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체스라는 프로스포츠의 판도에서도, 나이 어린 고수들이 (종전과는 달리) 훨씬 어린 나이에 훈련을 마치고 데뷔하거나, 그랜드마스터의 자리에 오르는 기간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정도 성취를 이뤘으니, 얼마나 오랜 동안 지존의 신분을 유지할까... 이전의 패러다임에 젖은 이들은 이렇게 예상하지만, 천만의 말씀, 일찍 오른 만큼 퇴장, 퇴위 시점도 그만큼 빠르고, 정상에 군림하는 기간은 정말 순간이라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카스파로프 같은 "체스 차르"는 더 이상 나오기 어렵고, 이 체스판의 요동치는 구도는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실물 그대로의 정치판 사정과도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과거 전쟁은, 압도적 전력을 갖춘 편이 이기게 되어 있었습니다(사실 여기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편이지만, 책의 의도가 이 부분 진위 판명에 있지 않으므로 사소한 딴지를 걸 필요는 없겠죠). 현대전은 그렇지 않아서, 설사 열세에 있는 쪽이 이길 수는 없다 해도, 패퇴하거나 궤멸당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강자측에 천문학적인 비용 지출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그 큰 덩치를 갖고도 피로스의 승리만이 가능하다면, 마치 테르모필라이의 전투에서 이기고도 결국 퇴각해야 했던 페르시아 제국처럼, 이긴 게 이긴 게 아니게 되는 모호한 형국에서, 결국 거대권력은 쇠망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취지입니다.

1장에서 그는 이안 맥밀런의 유명한 2x2 도식을 인용해 권력과 영향력의 본질을 저자 본인의 해석과 관점으로 다시 해명합니다. 이 서론이 굳이 필요한 이유는, "권력은 이미 태동기부터 본질적으로 자기 모순을 품고 있었으니,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는 주장에 대한 기반을 치밀하게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언제나 그의 저서가 그렇듯 쉽고 재미있게 푸는 설명이 독자를 전심 집중하게 도와 줍니다. 아무튼, 권력은 이제 쪼개지고, 서로 대립하며, 어느 한 쪽의절대 우위를 끊임 없이 부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게 책을 관통하는 기조입니다.

WTO가 창설된 계기가 뭔지 아십니까?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대세가 된 미국의 "일방주의"였습니다. 무역 현안을 논의함에 있어 하도 미국이 고압적 태도를 보이니, 그러지 말고 다자간 대화의 창구를 공식화, 기구화하여 작건 크건 각 주권국가들의 조화로운 이해를 도모하자는 취지였습니다(일단은 말이죠). 이때 화두가 된 게 유니래터럴리즘(일방주의)에 대치되는 다자주의(멀티래터럴리즘)입니다. 이 시기를 회고하며 저자 역시, "세계 역사상 문화, 국방력, 경제력, 정치적 권위 등 모든 면에서 타국들에 우위를 누린 패권 국가는 미국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여태 적은 대로입니다.

여기서 저자의 제안은, 미시화하고 자치적이며 전문적이고 직접민주적인 세분화한 권력 주체가 각각 자기 영역에서 경쟁하고, 협력하고, 참여하고, 주도하며 양보하는 틀을 가리켜, "미니래터럴리즘"으로 부르자는 것입니다. 다만 저자는 여기서 사려 깊은 걱정 하나를 따로 개념분석하여 제시합니다. 폭압적인 권력이 자유와 인권의 억압을 부른다면, 지나치게 원심화한 권력(해체나 종말을 맞이하는 듯한)은 구성원의 소외를 부른다는 거죠. 그는 다소 특이하게도, 오바마 이후에 등장한 자발적 정치 성향 압력단체인 티파티가, 보수적 시민과 부유층의 소외(내지는 위기 의식- 그의 용어를 이렇게 풀어도 될 것 같습니다)를 대변한 실체라고 봅니다. 기존 정당의 구조와 기능이 더 이상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역시 권력의 퇴조에 있어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해당 정당의 지지자들이 느끼는 "소외"를 해소할 다른 통로가 필요하던 시점에 용케 실체화한 예로 이것을 들고 있습니다. 반대로는, 미국 노동계가 보이는 현저한 조합 가입률 하락 현상을 거론합니다.

사실 저도 일을 하면서 기존 분석틀에 지나치게 매이다 보니, 사모펀드 같은 신종 유력 투자 실체에 대해 개운한 긍정을 못하고 유보적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저자는 고령이면서도 훨씬 유연한 시각으로(그는 본디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격변하는 금융시장과 산업계의 현상을 일관된 모형으로 단순화한 후 효과적 해명에 성공합니다. 다만 그가 해외 정세, 종교계의 각종 사건 사태에까지 적용을 확대하는 건 다소 억지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권력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것도 실천할 수 없고, 심지어 '사고'조차 할 수 없던" 우리들에게 냉수 한 사발 시원하게 끼얹는 각성제 노릇만은 잘 해 준 것 같습니다. 권말의 후주는 문헌 출처를 밝혀 놓은 외에 저자의 단평과 코멘트가 많이 들어 있으니 꼭 읽어 보셔야겠고, 뒤집어 놓은 U자 곡선은 이 책이 어려웠던 독자에게 "한 줄 요약" 기능을 해 주니 설사 시원하게 완독한 분이라도 클로징 미디어로 쓰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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