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역사 - 현대판 노예노동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예지(Wisdom)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8년 전에 타계한 철학자-인문학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명저가 한 권 더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학부 과정 교양교재로 널리 쓰이는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 그리고 몇 년 전 웹과 미디어에서 작지 않은 화제에 올랐던 <인종차별의 역사> 덕분에, 인문 쪽에 별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은 않은 울림을 남깁니다. 그를 존경하는 독자들에게 "전작"으로 인식되는 <인종차별의 ..>과 같은 역자분, 같은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네요. 하정희 선생님의 매끄럽고 정확한 번역은 정평이 나 있는데,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가 내용과 모습이 너무너무 맘에 들어 구입, 소장한 <마지막 대부>(마리오 푸조의 장편)을 통해 이분의 솜씨를 처음 접하게 되었더랬죠.



우리 동양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선하니 악하니 하는 오랜, 그리고 치열한 논쟁이 이미 2300여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책은 대개 청동기 문명과 도시 문명의 본격 정착기로 그 시발을 잡지만, 노예 제도야말로 "영혼을 지닌 인류의 수치"이며 누대를 이어오고도 영원히 씻을 수 없을 것 같은 본질적 죄의식의 한 근원이 된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점과 거의 기원을 같이하는 이 노예제는, 들라캉파뉴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시발을 우루크 도시 문명의 발생기 정도로 잡는 데에 의견을 같이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핵심에 자리한 이 도시의 명칭은, 오늘날 "이라크"라는 나라 그 이름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그 이른 시점에 남겨 요행히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기록의 잔해 중 가장 앞선 것들에 벌써 노예, 노예제에 대한 언급이 나오니, 노예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는 언명이 그리 과장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들라캉파뉴를 비롯, 많은 서양 학자들이 큰 윤리적 회의감과 이론 구성의 난점에 빠져드는 대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철학의 토대를 놓은 헬라 인문의 거인들이, 거의 한결같이 노예제에 대해서만은 뚜렷한 언급이 없거나, 되레 지지, 옹호에 가까운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의 경우 이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 고국 아테네 아닌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 등으로 후대의 독자, 학습자에게 당혹을 안기는 인물인데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처우, 냉담한 정서를 노예(헤일로타이)와 외국인에 대해 유지했던 스파르타의 여러 현황과 정치 사회 제도가 그토록 플라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계몽과 인본의 확고한 토대로만 여겨졌던 헬라 사상 체계가 기실 대단히 취약한 내실을 지니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를 서술하며, 당시의 이 시스템이 "인종차별적 요소"와 어떤 교차, 종속, 상호 영향 관계를 가지는지 잠시 짚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가 큰 반향을 일반독자와 학계에 불러일으킨 <인종차별의...>의 저자이기도 하기에 우리에게 큰 설득력과 매력을 풍기는 서술이기도 합니다. 결론에서 다시 언급되지만, 노예제는 결국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경멸→증오→노예화"의 기제를 밟아 정착된다는 게 이 저서를 일관하는 저자의 관점이요 "가설(이는 저자 자신의 표현입니다)"이 되고, 우리는 이를 기초 인식틀로 삼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 노예 시스템을 다룬 다큐나 이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항상 궁금한 게, 왜 저들은 그 지옥 같은 억압에 정면으로 대항, 봉기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의 경우 수적(數的)으로 얼마 정도의 지배층-노예소유자가, 얼마나 되는 노예를 재산으로 간수했는지에 대해 명확한 통계, 혹은 비슷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아테나이오스의 한 저술은 1:33 정도로 적고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다는 게 저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평가입니다. 오히려 미국 남부 노예제처럼 대략 2:1 정도의 우위를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게 통설적 추론이죠. 로마인들의 메인 오락 중 하나인였던 검투사 시합 산업에 소속된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대해서도 상세한 서술이 베풀어져 있는데, 다만 저자는 "계급 해방 투쟁의 선구"로까지 이 사람을 평가하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래된) 태도에 대해 회의어린 시선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기록은 고대 로마 귀족이 보유했던 많은 노예들 중 상당수는 가재관리, 회계, 자녀교육(그리스 출신 노예에 한정) 등 가혹한 육체 노동이 아닌 고상한 영역에 다수가 종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해방노예"가 발생했으며, 이들은 제국의 역사에서 미미하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을 두고 이뤄진 다소 무리하다 할 현대의 일부 해석은, 이 시기의 노예상에 대해 "목가(牧歌)적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일각의 큰 비판을 받고 있는데("노예제는 그 당시에도 역시 극단적 비인도성을 띤 시스템이었다!"), 물론 저자 역시 이런 스탠스를 견지하는 편입니다. 결론에서 다시 강조되듯, "노예제에 대해서는 제로 톨러런스라야 한다."는 게 이분의 일관된 주창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등이 확립한 도그마 때문에, 이념적으로 어떤 경향이건 무관하게 널리 지니고 있는 잘못된 상식이, "중세에는 노예가 없었다"입니다. 노예 대신에 장원이나 영지에는 "농노"가 그 기능적 신분을 차지했다는 게, 일반인뿐 아니라 학자들에게도 널리 퍼진 인식인데, 이를 최초로 교정한 업적은 마르크 블로흐의 몫으로 돌려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입니다. 중세 유럽에는 노예 역시 분명히 존재했으며, 우리는 사실 우리 세기에 쏟아져 나온 (비교적 고퀄의) 역사 팩션물이나, 심지어는 <데카메론> 같은 고전을 통해 파편적으로는 이 인식에 아주 어둡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공식적인 질문에 대한 정형화한 응답으로는 "노예는 없었음"을 내놓는데, 이는 어쩌면 "원죄적 수치심"이 심층 심리에서 기만 기제를 활성화한 소치가 아닐까 하는 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저의 추측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고대와 근세(자본주의 태동기 직전)에 엄연히 서양에 만연한 채였던 노예가 유독 그 "암흑기"에만 부재했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죠. 다만 보편적으로 "가난했던" 유럽이 노예까지 부려가면서 영위할 산업이 없었다거나, 가사노동에 활용할 여유가 없었다는 정도의 해석이 가능하겠구요. (다수 후대인들의 낙천적 기대를 배반하게도) 당시 지배이념이었던 "기독교적 박애주의"가 여기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았다는 정도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노예제와 노예무역의 르네상스(!)는 유럽인들의 상업활동, 군사모험의 활기가 살아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때에 일어납니다. 고대 로마 이전까지만 해도 "피부색"은, 특정인에 노예 신분을 부여함에 있어 결정적 요소가 되지 못했습니다(저자가 지닌 "인종차별"에 대한 고유의 관점 때문에, 저 토픽은 이 책 내내 주요 논제, 준거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의 공격적 모험상인들이 식민지 개척 후 노예의 "수입"을 중요 수입원으로 간주하고부터는, "노예=유색인종"의 공식은 노예경제와 직접 연관을 맺지 않은 유럽인에게조차 "상식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통렬히 비판하는 점은, 소위 계몽사상의 선구자, 대가들 중에, 부인할 수 없는 반계몽 반휴머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예제에 대해, 명시적 비판이나 반성을 드러낸 이가 한 명도 없다시피했다는 거죠. 오히려 대가들(로크,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왕성히 활동하던 기간은, 노예무역이 극성을 이뤄 막대한 수입을 창출하는 산업 구도의 확고한 일부로 자리한 시기이기도 했다는 거죠. 로크의 경우 "노예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항구적 전쟁상태의 연장, 부산물"이라는 게 그의 인식인데, "정당한 전쟁"에서 패배를 겪은 이가 노예로 사는 건, 패전국이 전쟁배상금을 물고 그 지도자가 전범으로 처벌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는 취지이니, 오늘날의 우리는 그 황막하고 냉정한 논리의 기조에 전율할 만합니다.

인도의 카스트를 짚으며 저자는 "인종차별"의 문제를 다시 환기합니다. 초기 카스트 성립 당시 "바르나"는 분명 피부색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체계였습니다("카스트"는 포르투갈어일 뿐이며 현지에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던 것이 점차 인종적 색채가 옅어지고 사회 제도와 종교의 요소가 개입하며 "자티"로 대체되었다는 건데, 인도뿐 아니라 동양권 전체에서 노예는 세습신분, 혹은 범죄에 대한 응보와 관련이 있을 뿐 인종차별과는 거의 무관하죠. 하긴 근세 이후 상대적으로 문물 교류가 부진했던 이들 권역에서 "차별할 외부 인종" 자체와 만날 기회부터가 적었겠지만.

저자는 특히 동시대의 국지적 "노예 실상"을 짚으며, 발전된 서구에서는 "인식과 정서 속에 인종차별이라는 다른 형태로 잔존"하며, 그렇지 못한 권역에서는 아직도 고대적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강제노동"의 악습으로 남아 있는 게 이 노예제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양심과 품위를 뿌리에서부터 갉아먹는 이 "노예제라는 해악"에 대해서, 인류는 "무관용"이라는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하며, 그 구체적 전략은 "즉시 행동에 옮김"이라는 결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이에 앞선 마지막 챕터에선 (다소 소략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벌어지는 수요집회에 대해 사진과 간단한 언급 등으로 자신의 담론 체계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편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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