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 1 - 눈썹달
윤이수 지음, 김희경 그림 / 열림원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1권의 제목은 "초월(初月)"로 붙어 있는데, 작가님은 이걸 "눈썹달"로 운치 있게 다시 고유어로 풀고 있습니다. 달이 삭(朔) 즈음에 살포시, 흐릿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듯 감추듯 자태를 보이는 광경에다 이 권의 내용을 비긴 거겠죠. 주인공은 17세의 소년인데, 사내면서도 여자아이처럼 자태가 곱고 영리하며 "문장을 잘하는" 센스를 갖춘, 운종가(현재의 종로 일대)에서 복덩어리로 통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름은 홍.라.온.인데... "라온"이란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가 "즐겁게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줬다고는 하나 왜 그 음소에 그 뜻이 대응되어야 하는지는 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해 보면 뭔가 긍정적인 주문처럼 발랄하게 들리긴 합니다. 사실 중요한 건 그의 성씨가 "홍"이란 사실인데, 여기에 담긴 내력은 2권에서 거의 완전히 드러나더군요.

 

판타지 로설과 본격 역사소설의 차이점은, 다른 캐릭터들은 몰라도 최소한 주인공(특히 여주)은 철저히 현대의 틴에이저들이 갖는 개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사가 고어투이건 아니건 간에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윤이수 작가님은 사료를 통해 시대 어휘를 많이 연구하신 분인지, 적절한 용어들이 문장과 대화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고 있습니다. 고어를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고 처음에 밝히고 있는데, 너무 현대어화하면 "궁중로맨스"만의 맛이 떨어집니다. 반대로 고어를 요령 없이 문장 안에 편입하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느낌을 전달할 때 아주 어색해질 수 있는데요. 작가님은 이 딜레마를 참 쉽게 해결하고 있어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옛 어휘에 대한 공부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홍라온은 우리 동시대의 소년(...)이 갖는 감성 그대로를 갖고 2백년 전 조선에 태어난 별종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예쁘장한 외모, 싹싹한 태도와 밝은 심성, 민첩한 판단 등 어른들에게 이쁨 받을 장점을 많이 갖고 태어난 인생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는 그 나름대로 많은 아픔을 지니고 누구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역경을 헤치고 살아와야 했던 처지인데... 이 사정을 알고 나면 주변의 어른들은 더 그를 기특히 여기고 도움을 주려 들게 됩니다. 자기 걱정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고 나이까지 어린데도, 그는 주변의 어른들이 가진 고민을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노숙한 솜씨로 척척 해결해 주는 걸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가 장기를 보이는 건 연애 상담입니다.

 

여동생의 병 때문에 그는 궁궐에 들어가 3년 정도 일을 해 주고 대신 큰 돈을 미리 빌려 쓸 수 있는 계약을 맺습니다. 헌데 우리가 잘 알듯, 사내가 왕궁에 고용직 신분으로 드나들 방법은 없습니다. 남성이 왕의 거처 부근에서 시중을 들고 기거하려면, 생식 기관이 먼저 제거된 상태라야 자격이 주어지고,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당시 "내시, 환관"이라고 불렀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내시의 자격을 갖추는 시술은 아주 끔찍하고 원시적인데, 책에는 두 가지 방법이 "내관 만드는 장인, 마스터"의 입을 통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무시무시한 작업장에 들어온 소년 홍라온은 그러나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니 마음대로가 아니므로" 엄공 채천수의 시술을 받아야만 할 처지입니다. 라온의 빼어난 요량으로 까짓 탈출 정도야 당장 못 할 바 없지만, 문제는 계약(속아서 맺었다 해도)을 어길 때 병든 여동생의 치료와 늙은 어머니의 형편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라온은 이 기회에 궁정에 들어가서 3년을 버텨야 합니다. 아직도 더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는데, 라온과 그의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로, 사실은 라온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는 겁니다. 장비를 들고 다가오는 채천수는 이제, 그가 시술을 베풀어야 할 신체 부위가 라온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할 수 있겠는데... 늙은이가 놀라건 당황하건 그게 중요하지는 않겠으나, 라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시로서 궁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앞에서 말한 사정 때문이죠.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요.

 

이 일이 있기 전 라온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어떤 옥골선풍의 귀공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쪽으로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치가 전혀 없는 라온은, 이 사람이 그저 돈 많은 한량이거나 행세깨나 하는 양반 댁 자제인 줄로만 알지, 그 엄청난 신분상의 비밀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합니다. 라온이 "화초서생(온실 안 화초처럼 곱게만 자란 서생)"이라 부르는 이 귀공자는, 영리한 라온만 까맣게 모를 뿐 조선 나라님의 아들, 세자 신분의 지존인 몸입니다. 독자들은 다 아는 걸 주인공만 모른 채로 귀여운 삽질을 하게 하는 패턴은 뭐 이 장르의 정해진 공식 중 하나겠습니다.

 

궁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희한한 기남자를 또 한 명 만나는데, 알고보니 이 사람은 저 "화초서생"의 친한 벗이라고 합니다. 라온은 그를 "김 형"이라고 부르는데, 이 "김 형"은 라온을 "성가신 녀석"으로 즐겨 호칭합니다. "김 형"은 철저히 마음을 숨기는 타입이고, 구체적으로 뭔진 모르겠으나(1권 끝에 대충 나옵니다) 웅대한 뜻을 속에 품은 지사형 인물로 등장합니다. 잘생긴 외모는 로설의 필수 요소라 이 사람 역시 "화초서생"에 별로 처지지 않는 풍신인데, 우리의 주인공 라온도 짐짓 이런 사태에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보여 독자 앞에서 속보이는 뻔한 쇼(?)를 하고 있습니다. 로설의 정해진 공식이라 해도 될, "아주 높은 신분의 남성이 여주를 좋아하고, 여주는 그를 알면서도 팅기면서 그보다는 낮은 지위(보통 친구 같은 측근으로 설정)의 또다른 남성을 더 좋아하는" 삼각 관계 패턴이 깔리는 게 이 작품 속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화초서생"의 이름은 이영(李旲)인데, 이 이름은 순조의 적장자였던 효명세자의 휘와 같습니다. 즉 누가 뭐래도 이 소설의 남주는 조선 24대 임금이 될 뻔했던 실존 인물, 능력과 자태가 공히 뻬어나 만약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국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그 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김 형"의 이름은 김병연인데, 이는 우리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본명입니다. 실제 두 사람은 두 살밖에 나이 차가 나지 않는 같은 또래였으나, 물론 두 사람이 역사상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단 한 번이라도 조우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보통은 이 둘이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텐데, 기발하게도 이 점에 착안하여 가공의 여인 하나를 두고 연적 아닌 연적이 되는 설정을 꾸린 작가분의 착상이 놀랍습니다. 1권 끝무렵에 라온이 "김 형"에게 이게 어울린다며 어디서 삿갓을 구해 와 씌워 주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 장면은 또한, 세자 이영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라온의 태도가 이영의 심기를 자극하고, 동시에 라온의 본심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 독자에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긴요한 장치입니다.

 

저는 처음에 전혀 의식 않고 읽어내려가다가, 중반 쯤에 세도정치가인 장김의 김조순이 갑자기 등장하기에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가 세자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 중에서도 명시적으로 그런 언급이 나오지만, 조선조의 왕세자 중 정실 소생의 장자로 보위에 오른 이도 드물고, 아예 세자 시절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된 이도 제법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출생상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보기 드문 예였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회화 솜씨나 구사하는 필체 역시 출중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삿갓은 대중의 통념상, 홍경래의 난 당시 적도에 붙어 일신의 안위를 구차하게 도모한 조상을 힐난하는 답안을 써서 급제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속세를 등지며 풍자시인으로 산 인물인데(다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작가는 여기서 반체제-혁신의 코드를 짚어 내어, 리버럴 성향(이 역시 작가의 상상입니다만)의 효명세자와 사회 변혁에 한 뜻을 모으는 동지 정도로 꾸며 내려 하는 것 같습니다(마치 합스부르크가의 모 황태자를 연상시키는). 이 정도 깊이라면 종래의 로설의 구성, 밀도 수준을 조금 넘어서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궁중을 배경으로 삼은 한국 문예에서 언제나 그렇듯, 여기서도 못된 상궁 대신 교활하고 사악하며 가학성향의 내시 몇이 등장하여 신참 라온을 괴롭힙니다. "신래침학"의 악습은 비단 내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킬 만큼 횡행했는데, 우리의 라온이 이 난관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지켜 볼 일입니다. 말미에 이영의 친여동생 명온공주가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도도하지만 매우 단순한 기질과 사고의 소유자로 보이는 이 여성이 향후 극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도 주목할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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