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남자 2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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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의 지도에 잘 나온 것처럼, 이 소설은 중국 남단 복건성에서 유구(류큐, 오늘날의 일본 영토 오키나와입니다)를 거쳐 조와(자와 혹은 자바)를 지나 지구 반대편의 네덜란드 제일란트(책에는 "젤란트"라고 표기됩니다)까지 흘러들어가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양 회화 낭만주의 사조의 대표적 거장이었던 루벤스의  어느 그림에까지 모델로 등장한 걸로 여겨지는 "조선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존 인물은 아니고 작가님의 기발한 상상이 치밀한 연구와 기획에 의해 장편 소설로 옮겨진 중에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지도와 연표, 그리고 소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은 이 2권의 부록으로 실려 있으니, 1권만 보신 분들은 1권 내용의 충분한 감상과 이해를 위해서라도 이 2권까지 같이 구해서 읽으셔야겠습니다.

"조선 남자"는 이 소설(특히 이 2권) 속에서 자신의 본향을 딛고 누비는 모습은 거의 없고, 원양의 거친 물결을 헤쳐 가는 배 위에서의 활약, 그리고 네덜란드 젤란트에서의 눈부신 족적과..... 비장하다 못해 참담한 운명을 맞이하는 행보만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이국에서야 현지인들이 당연히 그를 "조선 남자"라고 부르겠지만, 설사 조선 땅 안에서라 한들 그 누구도 그가 전형적인 "조선 남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성에게 다정하고, 같은 민족, 동포가 부당한 처우를 입으면 내 일처럼 나서서 한풀이를 해 줘야 직성이 풀리고, (이게 중요한데요) 흑인이건 미개한 남방인이건 약자가 강자에게 잔혹한 대접을 받으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비분강개 열혈지사입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도 다 이렇지 않습니까?(아닐까요...) 주인공 "조선 남자"는 그래서 루벤스의 그림 속에 생소한 변칙 복식을 하고 있는 이유에서만 조선 남자가 아니라,. 개성과 용모, 정신적 지향,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조선 선비"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란 이유에서 "조선 남자"입니다. 생김새도 준수하고 태도에 기품이 있을 뿐 아니라, 의로운 정신으로 세상사를 다루는 인격이 누구 눈에도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국 땅에서 만나는 여성들마다 이 "조선 남자"에게 반하고, 그에게 정조를 아끼지 않으며,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해로하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1권의 유구 여성 고미가 그러했고, 2권에서는 다나가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의탁하여 도움을 받는 것 외에도 그에게 남성으로 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젤란트의 어느 노부인은 그의 손을 잡으며 "젊은이, 내 아들이 인도에 있는데 조선과는 거리가 먼가?"라며 묻는 장면도 나옵니다. 워낙 질 나쁜 악다구니들이 많이 나와서 그렇지, 품격 있는 평균적 시민들에게였다면 이 서양 땅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다만 우리의 "조선 남자"는 너무도 힘이 없습니다. 육체적 완력은 "양귀"나 "흑귀"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익힌 해동의 무예에 통달한 그이기에, 덩치 크고 힘깨나 쓰는 자들이 설사 흉기까지 들고 덤벼도 퍽퍽 나가떨어집니다. 지옥과도 같은 세계 일주길에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는 장부입니다. 문제는, 이 주인공이 너무 정보가 부족하고, 개인 차원에서의 의협심만 갖고 서양에서 "무구의 본(총기류나 화포의 도면, 시방서를 말합니다)"을 가져 오겠답시고 아무 권한 위임도 못 받은 채 조국을 뜬 터라, 바다 위, 혹은 정박 항구에서 어느 천한 불한당들에게 개죽음을 해도 따질 곳 하나 없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자신이 선하니 남도 내 맘만 같을 줄 압니다. 이런 주인공이 만약 통쾌한 미션 완수를 해 내는 결말이라면 그게 오히려 개연성 부족이었을 겁니다.

특히 이 2권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야심가 "카피탄(그냥 캡틴의 와전입니다)", 신흥 부호들에게 기득권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공작, 이익을 추구한다기보다 배신 그 자체를 즐기는 악종 중 악종인 경리관, 구세주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보다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표출하는 데에 온 정력을 다 바치다시피하는 늙은 목사 등의 속고 속이는 음모와 모략이 주축인 전개라서, 주인공이 "조선 남자"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들이 주인공으로서 존재감이 드러나냐면 그런 것도 아니고,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게임 속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처럼, 패악질 자체가 존재의 목적인 양 이를 갈고 날을 세우는 비인격체만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2권은, 사람이 아니라 "지옥"이 주인공을 겸하는 배경 요소입니다. 조와(자바), 젤란트, 넓고 넓은 공해,.. 어디 가릴 것도 없이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고 기뻐 날뛰는 모든 곳이 다 지옥입니다.  이런 지옥에서 주인공 혼자 공맹의 도(道)와 조선 고유의 풍류 정신을 실천하는 선인(善人)이니 무슨 재주로 제 의지를 관철하며 목숨인들 부지하겠습니까.



어쩌면, 넓은 세상에 만연한 악(惡)과 만행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자기들끼리 예를 갖추고 염치를 지키며 안온하게 살던 우리 겨레가, 외방과 교류를 트고 못된 재주는 충분히 배우고 익혀 이웃의 허술한 태세를 용케도 알아차리고 탐욕을 채우려 쳐들어온 왜놈들에게 짓밟힌 건 역사의 필연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약(弱)한 것이야말로 악(惡)한 것이다, 약하면 제 아내와 노부모, 어린 자식도 지키지 못하고 몹쓸 욕을 보는 꼴을 지켜 봐야 한다... 조선 남자는 외방을 떠돌며 비로소 그가 고이 배우고 지켜 온 유림의 도가 현실에서 아무 쓸모 없다는 걸 깨달았을 터입니다. 설사 그가 제 소임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한들, 1권에서 "뱃놈"이 조소한 대로, 허락도 없이 밖을 다니다 왔으니 손에 뭘 쥐고 있건 그 자체로 죽은 목숨일 지도 모릅니다. 시스템이 이 모양인데 개인이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2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실 다 비극적이고 끔찍하고 슬픈 장면밖에 없어서 말하기가좀 그렇지만, 첫째 동생 자라가, 조선 남자는 물론이고 두 누나와 자신의 정체성까지 재판관 앞에서 모조리 부정하는 장면입니다. 누나인 다나는 그가 어린 동생이니까 "저것이 얼마나 살고 싶으면 저럴까"하고 다 이해를 하지만, 읽는 독자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까지 팽개친 그 적나라한 몸부림에 그저 전율할 뿐입니다. "조선 남자"가 등가죽이 벗겨지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선고도 소름끼치는데, 자라는 "등뼈가 드러나도록 태형을 당하게 하라"는 판결을 받는 대목에선 정말.... 두번째로는 젤란트로 오는 도중에서, 노예선의 혹사를 당하는 흑인들의 참상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눈 한쪽에 구더기가 끓는 소년의 넋나간 모습... 이런 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자라가 아마 그런 최후의 발악을 시도한 거겠죠. 세번째로는 혼령으로 바다 위를 떠도는 OOO이, 자신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다나의 모습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장면입니다.



트로이에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는 객관적으로 성공적인 귀향을 할 가망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트로이의 원혼들이 끈질기게 그의 운명에 저주를 내린 탓인지, 바다의 괴물과 몹쓸 귀신들은 모조리 그의 항햇길에 들러붙어 영웅의 금의환향, 개선을 방해하고 있고, 설사 이타카로 돌아온다 한들 성질 사납고 불의한 토족들의 손에 그는 무사하지 못할 공산이 컸습니다. 신들의 가호로 그는 목숨을 건지고, 악한들을 토멸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편의를 위해 개종한 "조선남자"는 마뜩지 않게 보았는지, 도와줄 듯 말듯 하다 결국 무참히 운명의 바닥으로 내던져 버립니다. 하지만 조선 남자는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도 감연히 의(義)를 위해 목숨을 걸었기에, 그의 모험과 절조, 의기는 오디세우스의 그것보다 더 거룩한 면마저 풍기기도 합니다.

책 뒤의 연표를 보면 이미 작가님이 조선 남자와 다나 사이에 생긴 아이가 커서 루벤스를 만나는 장면 등을 구상하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기대하는 건, 유구의 고미(덕천 막부군이 침략한 와중에 죽지 않았다면)가 낳은 아들, 그리고 조선 고국에서 노모가 키운 본처 소생 아들, 이 셋이 힘을 합쳐 죽은 부친의 원수를 풀고 오대양에 정의가 회복되는 활약을 해 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현실에서 역사가 그린 궤적이 엄연히 있기에 너무 무리를 하실 수는 없겠지만, 이로부터 백 년 안짝이면 영국이 공식적으로 노예 무역을 정부 차원에서 불법화합니다. 그 이면에 이 배다른 3형제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고 하면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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