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추리물치곤 서두가 정말 독특하게 시작되는 편이라서, 뭔가 기막히게 박진감 넘치는 사연이 펼쳐질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성 넘치고 강렬한 프롤로그 이후엔, 그저 "평범한 미제 살인 사건"의 진행, 그리고 두 형사 듀오의 가망 없어 보이는 추격이 밋밋하게 이어지더군요. 제가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건, 이 남부 알비(중세 기독교 한 이단의 발생지로도 유명하죠) 출신의 로랑스 서장이 왜 근거 없는 "직감"에만 의존해서,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볼품 없고 소심한 유부남 자크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격도 없는 남자가 외람되게 차지하고 있는 그 부인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모습, 추리물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더군요. 그와 듀오를 이루고 있는 실비오는, 그나마 사냥개처럼 치밀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자그마한 가능성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직했습니다만(그리고 참 부지런하더군요. 해협을 멀다 않고 양안을 오가며 사소한 증인도 찾아 다니는 그 철두철미함이란), 이 사람은 자기 상관이 가지고 있는 영감 수용 능력, 전체를 한 눈에 꿰뚫을 줄 아는 통찰이 대신 부족했습니다.



세네갈 출신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데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입담과 재치, 타락한 영혼을 가진 수수께끼의 미술 중개상이자 전문 감정인 아마두 캉디가 그렇게나 칭찬한 것처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메워 줄 수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마을 지베르니 토박이였던 안과 의사가, 칼에 찔리고, 머리가 으깨지고, 물에 빠져 질식해 죽은 사건에 대해 그저 미로를 헤맬 뿐입니다. 다섯 명의 정부(情婦)가 시선에 들어오지만, 사건의 내막은 시원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더 꼬이고 꼬여 종적을 짙은 안개 속에 감추는 것 같습니다. 검은 피부색에 세상 악덕의 흔적을 다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캉디가, 소설 중반께 모습을 드러냈을 땐, 클로드 모네의 숨겨진 대작이 이 모든 혼란과  범죄를 부른 요인이 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검은 수련".... <검은 수련>이란,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유작으로 설정된 <희극론>처럼, 지베르니 마을 어느 한 구석에서(혹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건) 발견만 되었다 하면 미술품 시장이 사정과 몇몇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전설의 아이템입니다. "그런 건 절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소견이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런 멋진 환상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기만하려는 건지, 아니면 타지 사람들에게 조직적인 장난을 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속셈으로, 대를 이어 이 미심쩍인 이야기를 퍼뜨립니다. 하지만 검은 수련은 비단 자연계에만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맑았던" 모네가 생전 어느 시점에도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결국 드러나는 거죠.



책을 다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독자도(쇼크 안 먹은 분이 없을 줄 압니다), "대체 모네는 그럼 왜 나온 건가?"하고 의문을 가질 만합니다. 그가 마네, 드가 등과 함께 창시한 것이나 다름 없던 인상파는, 사물의 객관적, 정태적 형태를 화폭에 담은 게 아니라, 오브제가 "시간(이 키워드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과 함께 변화해 온 양상, 파동을 "인상"으로 포착하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한, 그래서 이후 현대 추상 미술로 향하는 물꼬를 활짝 열어젖힌 크나큰 공로가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그림이 2차원에 지나지 않았다면,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시간 차원 하나를 더 지니게 된 것입니다. 또,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이 과연 실체에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근본적 고민을 유도한 기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검정색은 그래서 모네에게 "색의 부재요 색의 혼융(이 빚은 지옥)"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인상파 기법으로 쓴 미스테리 소설이라 불러도 됩니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한 마디도 꺼내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바로 이 인상파의 지향이야말로 소설의 트릭을 푸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보통의 추리물에서 독자와 탐정은 서로 누가 먼저 진상을 발견하느냐를 두고 겨루는 입장이지만, 이 작품에서 로랑스-실비오 콤비는 우리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입니다. 로랑스가 치정에 눈이 멀고, 실비오가 그저 자료만 들이파는 고지식한 유형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2차원 세계에 박제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젤 바깥"에서 진상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처럼 독자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모든 독자는 그 유리한 판세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지고 맙니다. 왜? 로랑스 들과 함께 "착각된" 저차원으로 같이 휩쓸려 들어가기 때문이죠. 우리는 따지고 보면 언제나 (이 소설의 경우뿐 아니라) 전지의 신처럼 높은 지평선에서 전체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처지였는데, (스테파니 선생처럼) 키 작은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다 보니 같이 실패하거나, 아니면 경주에서 뒤처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그런 우리에게, "당신은 높은 언덕에서, 단일 지평선 아닌 교차하는 소실선을 다 볼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가르쳐 주고 있던 셈입니다.



모네라는 모티브 외에도 이 소설은 곳곳에서 범인의 정체, 혹은 그를 알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남겨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루하게 읽으시면 본인만 손해입니다. 아주 공정한 퍼즐이므로, 내가 반드시 풀어내겠다는 각오로 쫓아 가십시오. 로랑스는 "그녀와 관련된 세 사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은 거짓이야"라고 하는데, 근거는 딱히 없었으나 결국 이 직감은 옳았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는, 마을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음에 대해 내내 작은 회한을 표시하는데, 저 같은 독자는 "할머니도 이런 감정을 갖긴 하나 보다"고 넘어갈 뿐입니다(그러나 이 사소한 표백에 엄청난 복선이 깔려 있었다니!!!!). 마지막으로, 이 한국어 번역판에서만 드러나는(다시 말해, 프랑스어 원 텍스트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힌트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빈센트"란 이름의 표기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프랑스어 소설에 프랑스 국적의 인물 이름인데, 왜 "뱅상"이 아니고 "빈센트"인지요? 처음에는 그저 역자 혹은 편집진의 무성의로만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난 후에야 그게 엄청난 의미를 가진 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분의 전작 <그림자 소녀>도 진정 예측 못할 반전에다 시공간 구조를 교묘히도 비틀어 놓은 그 서술 트릭에 탄복했었는데, 이 작품은 그를 뛰어넘어 이 장르의 진화 새 단계를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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