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개의 관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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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쯤 <천둥꽃>이란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 시스템에 편입된 지방인 브레타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신 이상 증세를 앓았던 끔찍한 여성 연쇄 살인마(실존 인물)를 다루고 있었죠. 그 작품 뿐 아니라, 브레타뉴는 켈트 족이 마지막까지 문화적, 종족적 독자성을지키려, 크리스트 교 세력의 동화 노력에 완강히 저항했던 지역이라, 여러 문학 작품에서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역헐로 오랜 동안 소재로 애용되어 왔습니다. 라틴 인, 게르만 인의 눈으로 봤을 때 무지몽매, 미신, 야만의 풍습이 최후까지 남아 있는 암흑의 땅 비슷한 곳으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고, 다른 작품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이 코너스톤 시리즈 제6권에도, 최후까지 까페 왕조가 내리는 귀족 작위를 받지 않고 거부한 토착 가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체로 주류 프랑스인들에게서는 비웃음거리로 여겨지지만, 지금이야 뭐 옛 흔적이 거의 안 느껴질 만큼 변화한 모습이죠.

소수 민족의 강제 동화, 차별 이슈는 예나 지금이나 "핫 포테이토"이겠으며, 정치인들이나 일반 민중들 모두에게 참 난감한 문제입니다. 미지의 대상이다, 이질감이다 하는 막연한 인식, 감정은 타자에게 괴물의 더께를 씌우는 쪽으로 귀착이 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작품에서도 브레타뉴인들은 드루이드 교를 믿니, 흑마술을 쓰니 하는 식으로 왜곡, 사갈시 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하는 대목은, 이 오지에서 각종 괴수, 마법, 초자연적 술책이 횡행하는 걸로 과장되이 묘사하는데, 연의가 판타지 색채를 가장 짙게, 노골적으로 띠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기도 하죠. 그런데 정말 특정 변경 지역이 그런 오묘한 술수를 부릴 줄 안다면, 애써 "왕화(王化)"의 혜택을 베풀 게 아니라, 그대로 양성해서 비밀 병기로 간직하는 편이 나을 텐데요. 농담이 아니라, 이 작품은 "신의 돌(la Pierre-Dieu)"에 대해서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상 사기에 불과하지만 마법 비슷한 기술로 생계를 잇는 세 여인(겉모습으로 보아 영낙없는 마녀들인데, 오랜 전통을 잇느라고 그랬는지 머릿수도 정확히 세 명을 맞추었네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네 여자(이 지방의 반 기독교 정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의 돌에 손을 대었다 화상을 입고 제 손을 도끼로 잘라버린 노인, 손자를 납치하다 손자와 함께 목숨을 잃은(혹은 그렇게 알려진) 귀족 노인,.... 제가 여러 번 지적하는 대로, 뤼팽은 어떤 이미지의 형상화에 상당히 능한 편입니다. 여느 호러물 전문 작가에 못지 않게, 이 장편에서 뤼팽은 끔찍한 이교적(heretic) 심상을 기막히게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미스테리가 좀 약하다 싶어도 다른 훌륭한 장점들에 의해 깔끔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보완이 되고, 독자는 괜히 속물 심리에서 까탈을 떠는 게 아니라면 정직하게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 중에, "뭐만 좀 막혔다 싶으면 비밀 공간, 지하 통로를 등장시켜 난관을 피해간다"는 게 있는데, 부당한 비판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점부터 세련된 문명을 이루고 살아 온 이들이 프랑스인들이라, 그들의 건축물이나 유적은 (픽션이 아닌) 진짜 비밀스럽고 비의적 구조를 지닌 게 많습니다. 르블랑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나라 작가들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으레 지하 통로를 등장시킵니다. 게다가 르블랑의 필치는, 이런 장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3, 4, 5 권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도일 경의 작품과 소략한 문장에서 결코 볼 수 없는 디테일드 묘사가 펼쳐지고, 독자에게는 그 자체로 선물이고 향연입니다. 장르물의 공식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공식만 앙상하게 머리 속에 넣고 자기 만족을 하면 되지, 개별 작품들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르블랑의 진짜 문제는, 악당의 동기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냥 편하게 "정신 이상"으로 몰고 가는 데에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보르스키는 뭐하러 이런 개고생 노가다를 하는 걸까요? 답은 그냥 "미쳐서"입니다. 게다가 이런 설정 배경에는, 비이성적(전쟁 직후라 참작이 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반독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 터라, 더욱 큰 아쉬움을 줍니다. 물론 도일 경도(이분 역시 문학을 문학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중요한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 정도로 경시했다는 공통점이 있죠) 홈즈 시리즈 후기작들에서 애국심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만, 르블랑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전혀  자제하는 모습 없이 "전범국이자 조국의 원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브레타뉴가 그 과거가 어찌되었든, 르블랑의 시대 이미 훨씬 전부터 위대한 조국 프랑스의 본체적(integrative) 구성 요소입니다. 이런 브레타뉴에서, 흑마술과 범죄를 저지르는 악마 역을 토착인(이들은 자랑스러운 프랑스인입니다!)에게 맡길 수는 없죠. 그래서 전혀 엉뚱하게 끌어들인 게 "또 독일놈"인데, 이 책도 그렇고 성귀수 선생님 책도 그렇고 Superboche라는 원어(신조어입니다. boche라는 비칭에 super를 붙인 거죠)를 "슈퍼 독일놈"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만큼 반독 감정이 우려되는 대목들입니다. 이 작품은 그 출간이 1920년에 이뤄졌는데, 작품 완성 시점을 조금 이르게 잡는다 해도 전황이 완전히 연합국 측에 기울거나, 이미 독일 제국이 패망한 후(1918)일 것입니다. 전쟁도 끝나고 했으니 이제 대놓고 독일을 비방하겠다는 르블랑의 비뚤어진(?) 사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비판, 저주 중에는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도 많더군요. p333을 보시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영심과 잔혹, 냉소와 신비주의가 멋들어지게(반어법입니다) 섞여 있다니까! 네놈들은 항상 이루어야 할 임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고작 하는 짓이라곤 약탈과 살인 말고 뭐가 있냐 말이다!"라는 말이 뤼팽의 입에서 나오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맞지 않습니까? 특히 이 작품이 나오고 20년 후에,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떠올려 보십시오. 심지어 이 작품에는 칼자루에 새겨진 만(卍)자 무늬를 언급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 시절이면 히틀러가 맥주홀 폭동을 일으키기 몇 년 전이고, 나치 당이란 얼개를 갖추지도 못했을 때입니다. 진짜 예언은 드루이드 교의 미신적이고 근거도 없는 예언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르블랑이 뤼팽의 입을 빌려 하고 있는 셈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독자는 이 작품에 "핵무기"가 나온다면서 경이를 표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그 정도까진 아니고,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망명하여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퀴리 부인에 의해, 라듐이나 우라늄 등의 속성에 대해서는 르블랑의 시대에도 웬만큼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마침 보르스키가 사칭한 신분이 애꿎게도 "폴란드 귀족"이긴 합니다만). 르블랑의 놀라운 점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천연 상태에서 사람의 손을 데게 할 정도로 순도 높은 광석이 생성될 수 있느냐?"라는, 지극히 타당한 의문을 가정교사 스테판의 입에서 나오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수긍을 못할 수 있으나, "들판에 핀 꽃이야말로 알고 보면 더 놀라운 기적"이란 뤼팽(즉 르블랑)의 설명은, 문제의 호도가 아니라 오히려 근본이치에 대한 심오하고 차분한 설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프리카 가봉의 오클로라는 마을에, 실제로 "천연 핵분열"이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이 있습니다. 여기 클릭해 보십시오.

이 작품에는 8권에서 우리에게 친숙했던 벨발 대위가 잠시, 그 상이용사 친구들은 동반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뤼팽(아니, 르브랑)은 여기서 대단히 우습게 작품 외적 개입을 시도하는데, "분위기가 너무 음산해서 이야기를 좀 재미있게 만들려고, 자고 있는 보르스키를 바로 박살내서 프랑수아를 구하지 않고(켁), 드루이드 교 노사제로 둔갑해서 놈을 좀 갖고 놀았다"는 말까지 합니다. 독자의 재미를 위해(자기 입으로 이러고 있습니다), 아이가 지금 어디서 배를 쫄쫄 굶고 있는 사정은 잠시 뒤로 밀린 겁니다! 도일 경과는 달리, 르블랑은 문학에의 직접 공로로 레종 도뇌르를 수훈한 사람인데... 여튼 그는 대단히 구식이긴 해도, 현란한 말빨과 탁월한 형상력으로, 거진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한국 독자를 이처럼 매혹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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