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 파편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7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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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은 본래 뤼팽이 등장하지 않은 장편입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독자라도 이 작품을 읽어 가다 보면, 뤼팽이 괜히 끼어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올 것입니다. 처음 발표시에는 없었다가, 5, 6년 후 개작하면서 처남에게 지난 일을 폴이 이야기하는 장면에 "뤼팽의 도움"을 끼워 넣었다고 합니다. 흔히 이를 두고 뤼팽과 르블랑을 폄하하는 근거로 쓰기도 하는데, 이야기가 재미있고 (통속적으로) 감동적이므로 독자들이 그런 외부 사정에 구애받을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랬든 말았든 간에, 이 장편은 우수합니다. 오히려, 용감하고 두뇌 회전도 빠른 편이긴 하나 사태의 입체적 재구성을 위한 상상력은 부족한 듯 보이는 주인공 폴이, 그런 내력을 자기 힘으로 다 알아내었다면  그게 더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뤼팽은 우리가 공인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므로, 마구 끼어든다 해도 그게 다 용서가 됩니다.

 

이 작품은 충격적인 게,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그 양반"이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자리에 떡하니 (미복 차림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뤼팽이 보고 싶어서 국경을 (또) 넘기라도 한 걸까요? 여튼 상식으론 "그분"이 나타났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사건이라, 어린 폴은 그 끔찍한 일을 겪고도 주위에서 믿음을 얻지 못한 채 방치됩니다. 인성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는 비극을 체험하고도, 용케 건전한 판단력과 인성을 유지하며 자라난 폴은, 어느 여인-지체도 높고 용모 또한 아름다운-과 운명적인 사랑에 (르블랑의 다른 모든 작품에서처럼)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어머니(즉, 죽었다고 알려진 자신의 장모)가 바로 자신의 부친을 죽이고, 같은 현장 같은 시각에 자신에게까지 위해를 가한 그 여인과 똑같은 용모를 하고 있음이 어느 초상화에서 확인되었으니... 여기까지는 통속소설의 전형적인 갈등 확대 패턴을 밟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이 터집니다. 대전 초기에는 프랑스가 수세에 몰렸으나, 양면 전선의 부담을 독일이 감당하지 못한 채 서서히 위기에 몰리기 시작하고, 이 소설은 그 변곡점적 전황에서 주인공 폴을 중심으로 벌어진 개인적, 국가적, 역사적 미스테리와 모험담이 르블랑 특유의 솜씨로 실제 역사와 교묘한 교차를 이루면서 펼쳐집니다. 이 소설이 집필될 때만 해도 아직 전쟁의 승패 향방이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물량 면에서 우위에 있던 연합국 측의 승기가 그나마 더 뚜렷했다고들 합니다. 르블랑 역시 다분히 낙관적 전망 위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로 나오는 콘라트 왕자는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후사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미인을 낳는 문화권이 더 우위에 선다는 오랜 통속적 믿음을 르블랑은 이 소설 안에서도 여러 번 확인하고 있는데요. 제국의 귀한 신분인 콘라트가 일개 귀족 부인에게 반해서 첩으로 데리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는 모습, 결국 부황과 국가에 엄청난 폐를 끼치는 결과 등이, 적국을 제대로 비하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잘 드러냅니다. 이 소설 종반에는 "...독일인들이란 우리가 전쟁으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문명을 가졌군!'이란 폴의 대사가 나와, 웬일로 바른말(...)을 하나 싶었는데 더 뒤로 가 보면 술에 취한 독일 병사들을 가리키면서 "역시 독일 문명이란...!"하고 비꼬는 게 나오죠. 그냥 반어적 조롱이 그 의도였습니다.

 

실제로 1차 대전 중 파리가 함락된 적은 없습니다. 소설에서 두 번 이 언급이 나오는데,  픽션화의 일부이거나 르블랑의 착각인 것 같습니다. 폴은 전쟁의 그 급박한 와중에서 유효한 작전을 세우고 이를 과단성 있게 실행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대단한 정신적 자질을 보유한 청년인데, 어째서 그런, 근거도 부족한 최악의 시나리오(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한)에 집착하여,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고(덕분에 조국 프랑스는 그의 활약으로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만), 장인과 그 결정적 순간에 싸움까지 벌이는 건지.... 콘라트 왕자를 납치한 건 물론 개인 자격으로 벌인 행동이지만, 개인적 협상을 통해 전황 전체를 좌우할 적국 요인을 풀어 준 건 이적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20인의 포로 명단을 만들어 줄 것을 장군에게 요청한 거죠. 만약의 경우 사면을 받기 위한 카드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몇 수 앞을 내다 보고 플롯을 짠 르블랑의 능력을 칭찬해 줘야 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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