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한때는 "음모론"이 숨겨진 정의를 대변한다는 믿음도 꽤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이 (당연히 실존 인물인) 짐 개리슨과 협력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배후에 당대 기득권층이 총체적으로 합작,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영화 흥행의 성공은 물론 스톤이란 인물 자신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인문, 사회, 심지어 실정법상 중대한 파장을 미국 전체에 몰고 왔습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스톤 하면 그저 음모론자"라는 편한 범주화, 나아가 주장 제기 전체에 대한 피로감이 더 지배적 반응으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음모론에 대해 부정적인 전제를 깔고, 음모론이 왜 사회에서 지지를 얻는가, 음모론이 어떤 경로로 구체적 실체를 형성하는가, 음모론으로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음모론의 불건강한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가, 음모론이 쉽사리 침투하는 계층이나 유형의 의식 구조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등의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원 제목도 <Conspiracy Theories and Other Dangerous Ideas>이지만, 사실 이 책이 취급하는 논의는 "음모론"의 범주를 제법 벗어나,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 국내, 또는 국제정치학적 현상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1장은 총괄 서론입니다. 왜 이 책이 쓰여졌는가. 음모론은 왜 사회를 불길하게 감싸고 돌며, 그 무익함과 유해함이 드러난 후에도 왜 사멸하지 않고 끊임 없이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깔끔한 조망과 개설을 펼치고 있습니다. 2장부터 8장까지는 (저자의 판단으로) 소모적 논쟁이라 생각되는 몇 가지 토픽에 대한 중립적 틀 안에서의 메타적 분석(이 역시 저자의 견해일 뿐이고,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이 이뤄지거나, 미국 전체를 양분하며 치열한 논쟁(꼭 소모적이라고 할 수 없는)에 대해, 역시 저자가 마련한 프레임을 통해, 감정과 정치적 이견 다툼이 말끔히 제거된 상태에서 바라본, "사실 겉보기보다 대단히 단순한 구조를 지녔던 뜨거운 감자"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9장부터 11장까지는 일종의 "토론 규칙을 마련하기 위한 반성과 제안"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진보주의"라고 명명한 일련의 입장에 대해, "그들은 중도파가 아니"라는 출발점에서 여러 각도의 비판을 시도합니다. 다만 저자의 이런 주장이 반대 팩션으로부터의 공박이라기보다, 논의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메타적 트리밍으로 보입니다(이 역시 그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당신이야말로 중도파가 아니다!"는 반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최소주의와 중간주의에 대한 여러 설명과 정리는, 건전한 시민의식을 지닌 참여자로서 그저 논쟁에서의 승리(나아가, 어떤 숨겨진 정치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공동체에 어떤 형태로든 공동선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접근 방법과 시야에 대해 저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는 바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법학자, 그리고 행동경제학자로서의 이력을 대변하듯, 책은 깔끔하고 논리적인 태도로, 다양한 사회학적, 법학적 개념등을 동원하여 논의를 전개합니다. 저자 고유의 논리만 도구로 쓰이는 책보다는, 이처럼 이미 확립된 타인의 분석틀이나 명제가 (간명하게) 인용되어 핵심을 그때그때 정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법학자들의 저술이나 태도에서 곧잘 보이는 미덕이죠. 법학에서의 주요 방법론 중 하나가 케이스 스터디인데, 이 책 역시 2장부터 8장까지는 논의의 발전적 전개라기보다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 사례에 대입한 결과를 예시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 토픽과 직접 연관은 그리 깊지 않다고도 여겨질 수 있죠.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하자면(이 역시, 저자가 제안한 최소주의 방법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모든 음모론이 다 "음모론"이라는 범주에 묶여 도매금으로 비판받을 것은 아니러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절름발이 인식"이라는 컨셉으로, 개인이 감성적으로 선호하는 어떤 지향에 어긋나는 바가 출현할 때, 인지적 거부의 방식으로 이런 음모론이 생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회에서 음모론이 곧 힘을 잃는 건, 그 음모론이 "다른 상황적 인식의 집합"과 곧 충돌하므로, 인지적 균형을 이루려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 곧 버림을 받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데 어떤 "여타의 인식 집합"이 더 바람직하고 더 열등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랍권에서 "911자작극론"이 더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그 사실 하나만을 놓고, 그들의 인식이 영미권의 그것보다 더 결핍되고 일탈된 성격이라 바로 규정할 수는 업습니다(그럴 가능성이 설사 높긴 하다 해도). 저자의 입장에 아주 충실히 따른다 해도, 이는 역시 미제의 과제로서 겸손하게 확정 진단을 미루는 게 바람직할 뿐입니다. 또, 음모론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주장들에 대해, 역시 개별적 접근으로 그 타당성을 판단하는 게 저자의 입장에서조차 일관된 태도입니다. 최소주의로 접근해도, JFK의 죽음 경위에서는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들이, 보편 논리에 입각한 분석을 통해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책은 재미있고, 상식에 입각한 사고 과정에 의해 전개되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의 명료한 스타일 덕분이지는 모르겠으나 번역 역시 막히는 대목 없이 무난하게 읽혀져 나갑니다. 치열하게 정치적 논쟁이 달아오를 때, 그저 내 생각이 무작정 맞는 건데 상대는 왜 나의 말귀를 못 알아먹는가 하고 분통만 터뜨릴 건 아닙니다. 사실 내 주장만 관철하겠다고, 그저 패거리만 모아 파쟁을 벌이는 사람이라면 논쟁에 참여할 자격도, 애국심이나 공동선을 명분으로 내세울 자격도 없습니다. 어떤 입장이나 세계관을 떠나 이 책이 타당성을 가지는 점은, 나 자신을 메타적 시각에서 냉정히 바라볼 기회를 정중하고 지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바로 그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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