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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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도 그렇지만 이 2권 역시, 소설을 읽어나가는 재미란 게 있습니다. 3권 <기암성>에서 "철가면"의 설화가 잠시 언급되는데, 이 철가면을 모티브로 한 문예 중 가장 유명한 건 알렉산드르 뒤마의 작품일 것입니다. 르블랑의 소설은 어느 것이나, 이 뒤마적 전통, 스타일을 충실히 계승한, 독자를 정신없이 몰아가며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본격 문학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교양 수준이 높지 않은 당대 대중들에게 특별한 끌림을 제공하는 강점이지만, 동시에 통속 문학이 결국 맞이하게 되는 "짧은 유효기간"이라는 숙명을 피해갈 수 없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1권도 그렇지만 이 2권도, 내레이터의 수다스러움이 플롯과 분위기, 나아가 캐릭터까지 압도하는 모습입니다. 뤼팽도 말이 참 많은 편인데, 다만 그는 자신이 내뱉은 거의 모든말을 실천으로 일일이 (극악의 난도임에도 불구하고) 옮길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에, 그가 수다쟁이라는 인상은 우리 독자의 뇌리에 남지 않고 비껴갈 뿐입니다. 주인공인 뤼팽도 말이 많은데, 때로는 작중의 허구인 "나", 때로는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전지의 화자까지 끼어들어 인물의 내면과 사건 전개에 대한 설명을 쉬지 않고 (주관적 감상까지 보태어) 늘어 놓으니, 현대의 세련된 스타일에 익숙한(그리고 뤼팽에 애착을 가질 특별한 이유가 없는) 독자들이라면 그 일부는 짜증스러워할 만도 합니다. 우리가 한 세기 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신파극이나 변사 해설 포맷의 드라마를 도저히 참고 보지 못하는 그 기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요즘은 워낙 이런 낡은 스타일이 드물고(시대에 뒤떨어졌으니 당연), 유행은 돌고돈다고 좀처럼 못보던 게 "고전의 아우라"를 쓰고 (재)등장한데다, 여튼 독자란 스스로를 어떤 허위의식으로 기만하든 속은 그저 원초적 흥미만에 목마른 질 낮은 취향의 소유자인 까닭에, 이런 "구닥다리"도 재미있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우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범속한 독자들이니까요.

 

여튼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전이다!"라는 외경감을 갖고 보면 더 좋습니다. 기왕 속을 작정이라면 즐겁게 속는 게 그나마 더 현명한 선택이겠죠. 해협을 건너와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몰던, 얄미운 섬나라에서 개발된 신 장르물에 침식되어가는 독자들을 보고, 신성한 민족 감정에 의해 바른 길로 그 오염된 정서를 돌려 놓기 위해서라도 이런 "맞불"이 필요하다는 자못 캠페인적 동기에 르블랑이 크게 기울었다는 주장도 물론 유력합니다만, 저는 이 2권의 창작이 그보다는 "팬심"에 의해 더 많은 동력이 주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증거? 바로 이 2권입니다. 르블랑은 이 2권에서 셜록 홈즈(헐록 숌즈)를 참으로 공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숌즈의 추리는 도일 경의 "정전"에서 묘사되는 그 개성 그 엄정함 그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도일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지명 받은 작가들의 스핀오프보다, (소위 안티 홈즈였다는) 르블랑의 재현이 훨씬 더 오리지널에 근사한 모습입니다. 돋보기를 들고 사다리를 놓은 가짜 흔적의 간격을 재는 모습, 불한당과 맞닥뜨릴 때 지체 없이 주먹이 나가는 아마츄어 복서로서의 면모, 친구(왓슨. 혹은 윌슨)의 어리석음, 때로 자신의 조사를 (고의 아니게)훼방하고 오도하기까지하는 아둔함을 보고 죽여버리기라도 할 듯 화를 내는 천재 특유의 자기중심성을 보이다가도, "내 친구의 목숨에 위해가 가해졌다면 너도 바로 죽은 목숨이다!"를 외치며 돌진하는 절대 우정의 표현까지, 도일 경의 정전을 어지간히 철저히 연구한 이가 아니면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홈즈의 캐릭터는 이 2권에서 그저 뤼팽의 장식물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2권에서는 뤼팽이 찌질하게 나옵니다. 홈즈는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뿐인 친구 하나만 동행한 채, 범상치 않은 체력, 의지력과 더 범상치 않은 지성으로, 거의 혈혈단신으로 적수에 맞서고 의뢰받은 사건의 진상까지 풀어내어야 합니다. 반면 뤼팽은? 뤼팽 혹은 홈즈 그 누구의 편에 선 독자라도, 바로 동의하거나 동의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뤼팽은 "조직 폭력단의 두목"이라는 겁니다.  두 천재가 맞붙는데 한쪽은 그냥 맨몸의 개인이고, 한쪽은 중무장한 갱단이라면 이게 게임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뤼팽은 그저 문제를 출제할 뿐이고, 홈즈는 그 문제를 풀면서 동시에 신체에 가해지는 위해까지 일일이 방어해 내어야 합니다. 이런 원초적 불공정 게임은 홈즈가 져도 무승부요, 뤼팽이 이긴다 한들 그건 이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무대는 뤼팽의 홈그라운드인 프랑스가 아닙니까. "이 작자가 도전을 해 왔으니, 세계의 수도(파리를 가리킵니다)로 우리는 해협을 건너 가는 수밖에!"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렇게 영웅적인 면모로 소위 "홈즈, 나아가 영국적인 그 모든 것의 안티"라는 르블랑은, 남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가능한 최상의 예우를 가하며 이 2권에서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이 2권의 주인공은 홈즈라고 봐야 하며, 사건의 전개도 철저히 홈즈의 시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최후의 승자라는 영예까지 그의 몫으로 돌려 주는 건 아닙니다. 철저히 유치한 자기애에 빠진 전형적 프랑스인인 르블랑이 그럴 리가 없죠. 이 2권의 1부에서, 홈즈는 남의 나라에서 교란되고 훼손된 정의를 회복시키는 데 그럭저럭 성공적인 결과를 보입니다. 문제는 2부입니다. 수수께끼를 거의 다 풀고, 진범을 (다소의 삐걱거림 끝에) 밝혀 내나, 결국 그 지적이고 기계적이며 이성적인 노력은, 처음부터 안 기울이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융통성 없는, 일체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기계적 접근보다, 사태의 본질을 더 정확히 아우를 수 있는 변칙적 접근이 (한 가정의 평화 유지, 한 피용인의 생계 보전 등) 여러 목적을 위해 더 유용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프랑스적 가치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르블랑의 본의였을 텝니다. 처음부터 법질서의 반대편에 선, 불리한 스탠스에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뤼팽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근원적 정의"를 회복하는 데에 더 실용적인 해결사로 명탐정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애교어린 공존의 제스처일 뿐, 극복이나 능욕 같은 의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는 이 순간만까지만 해도 존경하는 선배를 향해 일종의 재롱을 부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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