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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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도 그렇지만, 이 1권도 단편집의 형식이긴 하나 각 단편이 서로 약한 연계를 가진 피카레스크식 구성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어쨌든 등장 인물이 악한이기도 하니 이중의 타당성을 지니네요). 첫째 단편 <뤼팽, 체포되다>에서 그에게 알쏭달쏭한 방법으로 연정, 동정, 애모 등이 뒤섞인 감정을 표시한 미스 넬리 언더다운이, 마지막 작품 <헐록 숌즈 한 발 늦다>에도 다시 등장하여, 수미쌍관의 구성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이 1편 수록 작품들에서 공유되는, (갓 데뷔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이미지나 개성을 마련함에 있어, 이 1권이 거의 부족할 것 없는 역할을, 여러 방향에서 고루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르블랑 자신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뷔시킨 이 작품집을 내놓을 무렵, 이 시리즈와 캐릭터가 그토록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줄은 몰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첫째 권에 벌써 뤼팽의 어린 시절, 도둑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라 할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이 마련되어 실려 있습니다. 시리즈가 확실한 대박을 치고, 작품집의 넘버링이 3, 4 정도에 이르렀을 때 마지못한 척 하며 내어 놓는 게 보통인데, 르블랑은 캐릭터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어지간했는지 "프리퀄"을 이렇게 이른 시점부터 (누가 궁금해할 거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선사하고 있네요. 저도 어렸을 때, 물론 르블랑이 엄청 예전에 죽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한참 후대에 다른 작가에 의해 스핀오프 정도로 나왔음직한, 이 유년 시절의 rising story가, 벌써 작가 본인의 솜씨로 "서둘러"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일 경이, 끝까지 홈즈의 어린 시절은 물론, 2,30대의 청장년기에 대해서도, 독립된 작품은커녕 지나가는 회고담 한 자락의 형식으로도 한 마디 언급조차 없는 것과 크게 대조됩니다. 아이를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게, 경우에 따라 익애, 과잉보호보다 낫다는 하나의 증명례일까요.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에 나오는 목걸이는, 마리 앙트와네트와 루이 16세 부처(이 책에서 루이 16세는 다른 두 작품에서 각각 언급되는데, 두 번 모두 독자에게 적절한 역사 지식을 마침 환기하고 있어서 바람직합니다)를 결국 파국으로 몰아넣은 스캔들의 핵심 동인이 된 바로 그 목걸이인 걸로 설정됩니다(지배층의 병적 허영과 왕실의 어리석음을 동시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의 도화선 쯤으로 아직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뤼팽이란 법의 보호 밖에 내동댕이쳐진, outlaw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불쌍한 신세의 범죄자입니다. 작가의 설정대로라면 이 목걸이야말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은 요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모친이 비참하게 운명을 마감한 것도, 결국 목걸이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받아서가 아닙니까. 뤼팽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 같지만, 오랜 세월 동안 양식 있는 이들로부터 확신과 정당성을 얻은 법을 배척하고 질서를 교란한다는 점에서, 그 출발이 잘못된 "슬픈" 주인공입니다. 드뢰 수비즈 백작부인(나이를 꽤 먹었겠죠?)이 지적하는 바대로, "어려서부터 나쁜 천성이 있어서" 그 길로 빠져든 거지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다 봐야 하고, 이 대목에서 말에 뼈가 있음을 느낀 뤼팽도, 보기 드물게 자격지심을 노출하는 게 눈에 띕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 1권은 뤼팽의 한심한 모습이 꽤 많이 드러나는데요. 제가 유치원도 다니기 전 맨 처음으로 (그것도, 성인판으로) 읽을 때에는 저 어린 라울의 이야기 <왕비의...>에서도 꽤 근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어려서부터 한을 품고 자라 커서 복수극을 펼치는 주인공!), 10년 전 성귀수 선생님 번역본을 읽을 때도 그저 아이돌을 바라보듯 조심스레 옛 전철을 짚을 뿐이었는데, 지금 냉정하게 다시 살피니 하나도 멋지지가 않습니다. 그저 기분 탓일까요? 이어지는 <엥배르 부인의 금고> 역시, 좀 더 뒤에 나왔으면 확실히 팬 서비스가 되었을 작품인데, 이처럼 이른 시기, 아직 뤼팽의 카리스마가 독자의 머리 안에 단단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나왔다는 점 역시 의외로 받아들여집니다(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일종의 내용 누설이 되므로 여기서 말할 수 없습니다). 엥베르 부부가 큰 부자도 아니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닌데(최소한 뤼팽은 그런 줄도 몰랐을 텐데), 자신에게 신뢰룰 준 사람들에게 그런 야비한 술수를 쓴다는 게 과연 뤼팽 자신의 도덕률에 비추어서도 용납될 수 있는 일일까요? 물론 뤼팽은 대가를 치릅니다. 아주 신랄하고 우스꽝스럽게. 하지만 문제는, 뤼팽이 자신의리즈 시절(!)을 회상하는 그 순간조차, 젊었을 적 자신(아직 무력하고 미숙한)을 회상하는 어투에서마저, 도덕적 회오가 안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멍청했던 자신을 조소는 하고 있을망정 말입니다.

 

<흑진주>에서 뤼팽은 진범을 밝혀 내는데, 이 역시 다소 찜찜한 구석을 남깁니다. 이 미스테리 사건은, 알고 보면 전혀 미스테리가 아닌 평범한 강도 사건인데(도일 경의 작품에서 많이 쓰이는 어구로는 "common burglary"), 뤼팽은 결국 사후 종범으로 악질 범죄에 가담한 셈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살인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이, 이 사건에서는 아주 위선적으로 왜곡되는 것 아닌지. 진범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와 "나"의 냉소 역시, 잘못된 법률 지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데, 이유는 "기존의 기소, 심리 단계에서 전혀 취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의 발견"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다름 아닌 뤼팽의 손에 의해). 

 

저작권법이 미비하여, 남의 캐릭터를 함부로 끌어다 쓰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법이 현실을 따라가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캐릭터라는 게 독립된 영역을 차지하지도 못한 시절이고, 이의 상업적 이용은 더군다나 생각 못 하던 때(뤼팽은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 따위보다 20년 정도 앞서 출현했고, 홈즈는 당연히 그보다 더 이전이죠)였으므로, 르블랑의 이런 행동은 타인의 경제적 권리의 침해라기보다, 신사도의 위반 정도로 평가될 뿐입니다. 물론 신사들 사이에선 이 역시 심각한 태도로 다뤄질 수 있습니다만, 이는 공공 질서의 교란이라기보다 사적 당사자 간의 다툼이죠. 실존 인물인 도일 경의 명예를 직접 훼손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1권에서까지만 해도, 홈즈(숌즈)는 제법 공정하고 무게 있게 다뤄집니다(이어지는 2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후의 작품인 <기암성>에서 홈즈가 완전 무능 찌질 악한으로 나오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르블랑이 저 해협 건너의 선배 격인 도일 경에게 (자기 딴엔) 예의를 차리면서 일종의 경의의 표시로 캐릭터를 차용(사실상 도용)했는데, 도일 경은 후배의 이런 행동을 전혀 애교어린 시선으로 봐 주지 않고 엄정대응한 데에서, 실망감 비슷한 게 악감정으로 전화한 소치 아닐까 셍각합니다. 자기 장난을 안 받아준다고 해서 그게 무례는 아니죠.

 

뤼팽은 변장의 명수입니다. 이 장기는 <탈옥하다>에서 무슨 파라핀 주사를 자기 얼굴에 놓았다느니 하는 대목이 아주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려서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완전히 넋이 나가서, 여기서 언급되는 화학 약품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런 변장의 명수가, 홈즈 같은 위인에게 걸리면 통하지 않는다는 뤼팽 자신의 고백, <헐록 숌즈 한 발 늦다>에서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죠. "그는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순간 나라는 인간 자체를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멋진 표현 아닙니까? 홈즈의 개성과 능력을 표현하는 데에, 이보다 멋진 요약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걸 보면 르블랑은 누구 못지 않은 정도로 도일 경의 예찬자 아니었을지. 무시당하고 나서 배신감이 극에 치달았을 만도 합니다.

 

2권에서도 어느 책상 하나를 고물상에서 산 후 딸에게 주려는 수학 교사에게, 유리한 가격을 제시하고도 차갑게 거절당하자 원망 어린 시선을 가득 보내는 청년이 나오죠. "그 적대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에는, 이처럼 강렬한 개성을 지닌 영혼이, 외모의 다른 부분이 아닌 "눈빛"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 드는 묘사가 자주 나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도대체 눈빛이 뭘 말한다는 건가?"가 몹시 궁금했는데, 그건 나이 들고 사람을 겪어 봐야 감이 오는 말이더군요. 뤼팽 같은 영혼이 현실애서 흔할 리 없으니, 어차피 적용 범위가 넓지 않은 교훈이기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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