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 비정상의 시각으로 본 정상의 다른 얼굴
조던 스몰러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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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경계선 근방에 놓인 여러 표본은 인류 역사 오랜 초기 단계부터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니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이런 걸 두고 누가 시비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계(이것부터가 모호한 개념이지만)에서 멀리 떨어진 개체, 범주를 두고는, 우리는 그것(들)이 특히 현실에서 힘을 못 쓰는 열위의 권력속성을 지닐 때, "비정상"의 낙인을 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권의식의 향상과 휴머니티, 계몽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우리는 소위 "장애"라는 것에 대해서도 종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했고, "다양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점차 긴 스펙트럼의 바깥쪽에 위치한 "연장의 특수 지점" 정도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 "야만"으로 여겨지는 거나 마찬가지로, "신체 특정 부위의 이상 발현"에 대해서도, "우리와 이어져 있으며, 고립된 섬은 아님"에 동의를 보내는 이들이 점차 늘어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불순한 이익을 위해 과도한 합리화, 무리한 논리 비약을 일삼는 이들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최소한 "진화는 심지어 생존적합성의 목적도 갖지 않는, 그저 맹목의 변태"라는 관점도 힘을 얻음에 따라, (다소 맥빠지는 일이긴 하나) 신체나 정신의 이상행태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용이  부여되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맥빠진다"고 제가 표현한 건, 결국 이 책의 관점(과 비슷한 견해)에 따르면서 계속 (멀리) 나가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상(이 역시도 의미 없는 목표가 됩니다. 누구의 기준에 의한 향상이며, 그 이전에 "향해야 할 위[上]"가 있기나 하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죠)시키고 발전을 도모한다는, 뿌듯한 노력이 결국 무의미한 도로(徒勞)가 될테니 말입니다.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도, 사회적 승인이 철회된 채 "그저 비정상태의 일종"이라고 미지근한 규정만 이뤄진다면, 아마 보다 나은 생산성을 이루고자 하는 어떤 발버둥도 그 발판과 동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건 당사자뿐 아니라, 수월성을 지닌 분자들에 의해 어떤 혜택이라도 입을 수 있는 나머지 모두를 위해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정상/비정상의 사회학적 기준의 설정과 담론적 의의보다는(그런 것도 없지는 않지만), 과학적, 실험적, 혹은 연구의 기반이 마련된 범위 안에서, 대체로 우리 동시대인들의 합의가 가능할 어떤 인식틀을 마련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멘델이 "유전자"라는 개념을 창안해서 처음 세상에 알렸을 때만 해도, 무엇이 그 부모로부터 자식 개체에게 전달이 되긴 하는 줄로만 알았지, 어떤 구체적인 기제에 의해 이것이 이뤄지는지는 전적인 무지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러던 것이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왓슨, 크릭의 연구에 의해 나선형 구조를 지닌 어떤 DNA, 핵산의 본체를 띤 물리, 화학적 실체의 구명이 있었고, 밀레니엄의 전환에 즈음해서야 미흡하나마 지도 비슷한 걸 손에 넣게 되었죠. 책의 2장(본격 논의의 시작)은 특히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다양한 행태에 대해 지시의 직접 책임이 있는 "뇌"와, DNA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얽혀 있는지 자세한 해명을 시도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건, "성격"이란 게 과연 후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어느 정도나 그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유전적 형질, 즉 "운명"에 속박되어 있는지, 흉금을 터 놓은 여러 논의를 펼칩니다.

 

여기서 제가 "흉금을 터 놓았다"고 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저자 역시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선 확정적 결론을 유보하는 솔직한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입니다. 갈레노스 등의 고대 현인(오늘날의 관점에서 "의학자"라고 엄격히 정하기 힘든) 등이, 담즘 등의 분비에 따라 넷으로 가른 "성격론"에 대해, 계몽주의 이래 많은 이들은 "몽매한 과거의 유물"이라며 평가절하해 왔습니다(문학 작품에는 의외로 인기 있게 취급되는데, 그 비슷한 걸 A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볼 수 있죠). 그러나 이 책은 겸허한 마음으로, "어떻게 고대인들이 그만큼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가?" 같은 경이를 원용하는 쪽입니다. "성격, 기질"이라는 모호하고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현대 의학이 저 고대인들의 성과에다 의미 있게 추가시킨 증분은 거의 없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는 셈입니다. 이 "성격론"이야말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가르는 실익이 가장 날카롭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일 텐데도 말입니다. 당장 우리가 사회에서 정치적 다툼을 벌일 때, 누구 하나를 두고 "저건 성격이 비정상"이라는 규정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 쟁투는 이런 주장 중 어느 편이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농담과 위트가 매우 자주 발휘됩니다. 대중서(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서입니다)에서 영미권 저자들이 다 이런 식으로 캐주얼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건 아닙니다. 권위라든가, 어떤 확증적 진단을 (자신이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척척 내세우고 내어놓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대단히 친근히 다가섭니다. 벌써 "비정상/정상을 가르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지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주제부터가 그런 권위의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은 그런 주제를 전달하고 구체화하는 그 태도에서까지도 자신의 주제를 배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좀 희한한 (제2의) 쓸모를 지니고 있는데요, 저는 이 책이 육아서로 쓰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완독하면서 아주 자주 했습니다. 특히 3장, 5장, 7장, 8장이 그렇습니다. 2장에도 후생유전학에 대한 논의가 잠시 나오고, 어떤 인간 개체가 정규분포의 몇 시그마를 초과하는 구간에 존재하느냐 하는 게,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전제를 깔고 벌이는 주장이 많이 등장하며, (이 책의 주제와는 무관하게도) 우리 아이가 지능이나 매력만은 저 멀리 식스 시그마의 오른편에 존재하되, 체형의 결함이나 충동의 조절 능력에 있어서만은 한가운데의 폴(pole)에 꽁꽁 묶여 있었으면 하는, 모든 어머니들의 바람(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척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으로 돌변할 모든 젊은 여성들에게 다 해당될 희망사항!)을 (의도하지 않게?) 잘 대변하는 대목입니다. 잘 읽어 보시면 (물론 저자는 부정하는 스탠스입니다만) 육아에 도움될 만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자는 "특별히, 매력적으로 비정상적인 우월 개체를 키우기 위한 그 모든 몸부림"에 대해, 그 과학적 근거를 부정하면서도, 그 박약한 근거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싶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는 멋진 문장력(?)으로, 우리 독자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이 책 제목은 그저 <THE OTHER SIDE OF NORMAL>입니다. NORMAL 앞에 정관사 the가 빠졌다는 것만으로도, 이 "정상" 개념에 대해 취하는 작가의 회의적 스탠스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제목에 들어 있는 "과학"에 너무 짓눌리지 마십시오, 정상/비정상의 기준은 결국 "과학"도 모르겠더라는 게 결론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기준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건 저자의 "인문 사회학적" 결론이고 말입니다. 최근 뇌신경과학, 행태론 기반 여러 학문이 일궈 낸 여러 성과를, 이처럼 독특한 프레임 안에서 일별 조망하는 일은, 저자 뿐 아니라 우리 독자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체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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