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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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의 작품에 붙은 제목 <운수 좋은 날>이 지독한 반어(反語)이듯, 이 소설의 제목 <행복만을 보았다>도, 내용이 담고 있는 그 갑갑하고 암울하며 대단히 충격적으로 치닫는 일련의 심리 흐름, 행동, 사건, 파국을 고려하면 예사롭지 않은 명명상의 부조리입니다. 제목이 주는 착시 땜에 무슨 달달한 이야기나 기대하고 이 책을 펴신 독자-이를테면 저-라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삐질삐질 땀깨나 흘리셨을 것 같습니다.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연 내러티브는 "척 봐서 안 그럴 것 같은 외모인데, 알고 보니 지독한 찌질이"의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적인 반어는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이 제목은 진짜 반어법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작품 속에 흐르는 진짜 스토리를 못 읽었거나, 주인공 안토니오에 대해 지나치게 냉혹한 정서적 거리를 두었거나(이 혐의는 솔직히, 소설 완독이 끝난 지금도 제가 벗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와의 공감을 위해, 혹은 진정을 전달하기 위해 무지하게 애쓴) 작가의 본의 -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대체로) 취하면서도, 정말 독자에게 정확한 소통을 이루기 위해 작가는 애를 씁니다- 를 고의로 왜곡하는 셈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내내 진정 갑갑한 사연과 넋두리가 이어질망정) "행복을 보았고, 혹은 행복만을 보려 애 쓴" "수난 3대"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역사성과는 그닥 큰 관련이 없긴 해도 말입니다.

 

어렸을 때 무난하게 행복한 가정에서 적절한 사랑을 못 받고 컸다는 게, 다 자란 성인에게 이처럼 큰 상처를 남기는 걸까요. 후....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일의 사달은 일단 "자기 감정에 충실하려고만 했던" 화학자인 아버지 -즉 레옹과 조세핀의 할아버지- 에게 있습니다. 그의 처였던 주인공의 친어머니도, 그저 자기 생각만 했다는 점에서 큰 잘못이 있습니다. 이 세대에서 그나마 긍정할 수 있는 인간형은, 주인공의 의붓어머니이자, 친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간호하며 그 최후를 보살핀 콜레트입니다.  나름 의붓자식들에게 잘하려고 했던 그녀를 상당 기간 동안 미숙하게(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부한 주인공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격으로, 잘하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었다는 점에서 이때부터 벌써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아버지의 매력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았는지, 주인공은 (평균적인) 여성들에게는 꽤나 눈길을 끄는 타입이었나 봅니다. 멕시코의 해변에서 그저그런 이들에게, 이미 심신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게다가 나이는 40을 훌쩍 넘긴 주제에) 호감을 그토록 끈 걸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을 줍니다. 다만 주인공은 매력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루저입니다. 그가 루저가 된 까닭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기만 했지, 그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정적 시점에서 그 아버지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처럼 살기가 너무나 싫었던" 그는, "아버지가 살아 온 행보와는 정반대의 선택"만 좇습니다. 그런데 이는 그의 철저한 착각입니다. 아버지가 선택한 정반대만 골라 걷는다는 건, 방향만 반대일 뿐 결국 그 아버지란 사람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 아닙니까? 삐딱선은 극복이 아니라, 되레 집착이고 추종입니다. 나이 삼십을 넘기고도 그 간단한 이치를 못 깨달았으니, 나이 사십에 청소년도 안 치는 대형 사고를 친 게 아닙니까. 누구 탓을 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 친어머니라는 사람도 잘못입니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그 사랑의 산물로 낳은 아들에게, 왜 아버지를 깔보고 미워하게 가르친단 말입니까. 제 인생에서 지다 남은 짐을, 아이에게 지우는 몹쓸 부모나 할 짓입니다. 그렇게 못난 엄마 밑에, 아들이라고 못난 성정과 인격이 옮고 닮고 냄새가 배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기 마련이죠. 이래서 어떤 못난 늙은이의 말처럼(이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담던데, 참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식도 엄마 따라 그 모양이죠), 덜 떨어진 내력이 3대를 가는 겁니다. 당장 자신부터 각성한 후 그 못난 내력, 못난 입버릇에다 꼴에 겉멋만 좇고 허위의식으로 헛말만 일삼고 정작 머리에 든 거 배운 거 없고, 이런 유전적 악형질을 가뜩이나 방황하는 지 자식한테 안 물려 줄 궁리를 해야죠. 입방정 떠는 것 보니 벌써 글러먹은 일이구요.

 

1부는 이처럼 정신이 불안정한 중년 남자가 끝내 대형 사고를 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야기가 그렇게 치달을 줄이야 몰랐습니다. 억지가 가득 섞이고 유아적 불평이 이어지긴 했어도, 배울 만큼 배우고 겉모습도 멀쩡한 사람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1부는 그래서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부(저는 그저 독립된 별개의 단편인데, 내적 연관이 있으므로 형식상 2부라고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2부로 이어지더군요)에서, 이 사람이 정말 자기가 꿈꾸던 바로 그곳에 와 있더군요. 이건 이 양반의 환상인가, 아니면 탈옥이라도 한 것인가(그럴리야 물론 없습니다만- 탈옥을 할 주제가 못 되죠). 하지만 독자는 곧바로, 사태가 어떻게 그간 발전한(혹은 꼬인) 것인지 감을 잡습니다. 또, (더 중요한 건데) 수긍하고 동의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제 죄의 대가를 지독하게 치르고 반 송장이 된 인간을 더 이상 가두어 봐야 뭐하겠습니까. 그게 선진국의 교정 시스템이죠.

 

이 소설이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계속 풀고 있는 형식에 대해, 약간 짜증이 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나"와 "너"가 하도 자주 주객을 교차하니까, 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부에서만 그런 처리가 되어 있고, 대체로 텍스트를 차분히만 따라가도 해결은 되는 문제이며, 더 중요한 건 작가가 일부러 그런 형식을 취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주인공의 주관 안에, 객관적 현실이 "인지 혹은 왜곡"된다는 게 어느 정도 암시되는 거죠. 2부에서 여기자하고 인터뷰할 때는 직접 인용 표시가 분명히 살아납니다. 이때 주인공의 "찌질스러움"이, 여기자의 시선을 통해 아주 잠시 드러납니다. 아주 잠시일 뿐입니다.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는, 철저히 "내재적 접근법"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극악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내부의 타자, 외부의 독자로부터 예상가능한 저주와 비난에 대해서 소설은 철저히 "실드"를 쳐 주고 있습니다. 주제부터가 "극한의 찌질이에게도 한번쯤은 그 자신의 시선에서 전후를 살펴 봐 주자"이니,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게 당연합니다.

 

3부는..... 조세핀의 시선에서 쓰여진 기록입니다. 이게 작가가 칭찬받아 마땅한, 구성상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제 친딸에게 못난 아빠는 온갖 욕과 저주를 다 들어먹습니다. 어떤 부분은 -조세핀 입장에서야 그러고도 남겠다고 우리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어쨌든 자기를 낳아 준 부모한테 그런 막말을 한다는 점에서, 많이 불편합니다.  "암퇘지"라고 극한의 표현을 하는 대목에서는, 이 책을 펴 읽은 걸 잠시 후회했습니다. 누구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그냥 불편하고 더럽다 싶어, 외면하고만 싶은 남들의 사정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정말 불편하게 읽는 분은(이 소설은 애초에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입니다), 기왕 읽은 거 끝까지 읽으십시오. 아마 감정상의 반전을 결말에 가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1부 끝에 알튀세르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데, 제 손으로 제 아내를 살해해서 법정에 선 사람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는 흔적이죠. 알튀세르 이야기까지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사도 지난 1월,  서초동 사는 모 중년 남성-나이까지 비슷하죠?- 이, 이 책의 사건과 똑같은 패턴이라 할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이 주인공보다야 더 엘리트코스를 밟아왔고 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하는 말이나 행적, 범행 동기가 너무도 닮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거의 남은 인생 전부를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겁니다. 여긴 한국이고, 죄인에 대해 그리 너그러운 사법 시스템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사실 판단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왜 어떤 이들은, 좀 진즉에 만나서 서로 불필요한 상처 안 겪고 미리미리 좋은 사랑 하면서 유한한 시간을 채울 수 없는 운명일까요. 이 소설에 나오는 이들도, 인연이 좋아 나쁜 이들은 미리미리 거르거나 한참 후에 원나잇 인연 정도로만 스치고, 좋은 사람들은 일찍일찍 마주쳐 가연을 맺었다면, 인명 희생은커녕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순간으로 제 주변까지 뿌듯하게 만들었을 텝니다. 행복만을 보는 게 그토록 어려운 겁니다. 제발 내 옆지기 소중한 줄 알고, 자신 위해 줄 줄 아는 무난한 부모님 둔 걸 그저 감사하고, 당연한 게 결코 당연하지만은 줄 알고, 모든 일에 고마워하면서 살아갑시다. 그게 "행복만을 보는 길"이지 딴 게 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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