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형제 동화전집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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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습니다.

이 책,

무려 210편을 담고 있습니다, 무려. 

200편의 기묘하고 개성적인 이야기에, 부록격으로 열 편이 더 붙어 있는, 실로 거대한 책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죠. 재질이 좋고 잘 빚어진 구슬이라면 단품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익히 봐 왔던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푼젤>, <빨간 두건> 등의 동화가, 다 이런 "혼자 놓여도 아름답게 빛나는 구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명편들 역시, 전(全) 체계(體系)가 오롯이 갖춰진 본 모습 속에서 더 아름답게, 제 가치를 발산하고 증명하는 법인지, 이 완결본 완역판을 다 읽고서야, 시대의 퇴행과 반동을 뼈속으로부터 경멸하고, 진흙 속에 파묻힌 채 스스로를 부정, 망각하고 살던 민중의 의기를 깨우치는 작업에 재능과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어느 형제의 정신, 소양, 사상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림 형제는 그저 동화 작가로서 활약한 이들이 아니라, 출중한 언어학적 자질과 투철한 계몽 사상으로 무장했던, 일세(一世)를 대표할 만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기층의 민속으로부터 다양한 민담과 설화를 채록, 정리한 건 그래서 단지 수집가적 습벽과 기호의 산물, 발로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이어오던 무가공의 풀뿌리 인문 정신의 재발견, 그리고 집대성을 위한 위대한 시도였고 그 찬연한 성과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백설 공주> 등도, 이 210편의 컬렉션 속에서야, 존재와 태생의 아름다움을 제 가치대로 비로소 증명하고 뽐냅니다. 동화는 이제 아이들이나 즐기고 구연하는 하품의 텍스트가 아니라, 성인들이 진지한 감성과 오성을 작동하여 음미하여야 할 인문으로 승급(昇級)합니다. 어쩌면 새삼스러운 엘리베이션이라기보다, 늦게 뜬 눈의 망막에 비로소 영사된,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던 사물의 진상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다른 출판사의 <..전집>울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만, 사실 책이 두꺼워서 소장 자체를 목적으로 사 두었을 뿐, "유치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읽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현대지성판 전집이 새로 번역, 출판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조 분석도 해 볼 겸 두 권을 같이 읽게 되었고, 종전에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분석이나 서평 쓰기를 목적으로 읽은 게 아니라, 읽다 보니 재미가 읽어서, 두 번, 세 번을 통독했습니다. 그만큼 재미가 있었기에, 여러 번 완독해서 텍스트를 (거의)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었습니다. "소화"라는 말을 굳이 쓰고 싶을 만큼, 이 동화 전집은 정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상 특징은, 1) 원저의 스타일에 따라 번호를 일일이 붙이고 있다는 점, 2) 그림 형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시대의 유명 삽화가인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 거의 전편(몇 편에는 해당 아티스트의 일러스트가 처음부터 시도되지 않았습니다)을 천연색도로 싣고 있다는 점, 3) 김열규 교수님 같은 거물이 번역 명의로 등재되어 있다는 점 등입니다. 이상은 출판사 편집측에서 내세우고 있는 장점인 듯하며, 제가 독자 입장에서 캐치하기로는 4) (속지의) 거의 매 에피소드마다 단색도의 일러스트를 실어 주고 있는 점(개인적으로 아서 래컴의 작품보다, 다양한 출처를 지닌 이 삽화들이 더 좋았다는 느낌입니다) 5) 역자 주가 상대적으로 많이 달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현대지성판

타 출판사판

1)

KHM 넘버링 표기

없음(목차에서 바로 찾아가기가 조금 불편)

2)

아서 래컴의 작품 상당수가 수록

이 책이 소속된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컬러 일러스트를 보통은 앞에 싣곤 하나, 유독 이 책은 그렇지 않음

3)

김열규 교수님(권위 있고 가독성 좋음)

김유경 선생님 (정확함)

4)

양질의 본문 부대 삽화

왼쪽 책과 다른 출처의 삽화(역시 무난함)

5)

역자 주 많음

역주는 없고 본문 안에서 해결

기타

1061쪽(종이질이 얇아서-사전용지- 더 볼륨이 작아 보임). 반양장

1008쪽. 종이질은 보통이며 양쟝판. 판형은 왼쪽 책과 같은 크라운판.


 

얼핏 보아 괴이쩍고 맥락이 없는 희화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깊은 의미를 담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34번 <영리한 엘제> 같은 걸 보십시오. 선반 이에 올려 놓은 물건이 언제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져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든 일을 중도작파하고 부엌에 주저앉아 우는 엘제, 백치의 극한을 치닫는 그녀의 지성에 조소를 보낼 분, 어느 독자가 이들 시골뜨기의 합창에 동조하여 그녀를 "영리한 엘제"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네의 운명이란, 혹은 행복이란, 예리한 지성과 강철 같은 의지로도, 개별 사건의 통제는 물론, 개략적인 향방의 지휘마저도 난감하기가 일쑤입니다. "영리한 엘제"란 호칭은 그저 반어(反語)가 아닙니다. 삶의 원초적 불안정성과 불가해성이 빚는 근원적 슬픔을, 일상에 찌들어 망각한 범인(凡人)들에게 경각하는, 본 질을 꿰뚫어 본 현자가 바로 엘제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의 나는 사실 내가 아닐지도 모르고, 내가 아는 나 자신인 엘제는 이미 저 따뜻한 집 안에 들어 와 있음"을 자각한 후, 어둠에 둘러싸인 미지의 지평선을 쫓아 달리고 달리기까지 합니다. "실존의 무상성에 대한 역겨움" 때문에 전위예술로서의 "구토"를 행하는 엘제는, 이미 장폴 사르트르의 개념적 선구였다고나 하겠습니다. 



59번 <프리더와 카터리제>를 보면, 역시 (상식의 눈으로 보아) 어리석기 짝이 없는 프리더의 아내 카터리제가 나와서, 일을 하다 항상적 자아를 잊고 해학적 기행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특히 이 에피소드에서 두 책의 태도가 많은 차이를 보여 면밀히 대조해 보았는데요. 한 책에서 빠진 내용이 다른 책에 들어간 것도 있고, 반대로 한 책에서 모호하게 옮기거나 원의의 맛이 잘 안 사는 번역에 그친 걸 다른 책에선 (그림 형제의) 의도가 두드러지게 처리한 것도 있었습니다(특히 목사의 밭에서 무를 뽑는 모습을 보고 악마라고 놀라서 달아나는 대목). 타 출판사 책에는 카터리제의 이름이 "카터리스헨"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습니다.



7번 <괜찮은 거래>는 동음(혹은 유사음)이의어를 이용한 소화(笑話)입니다. 이 책의 번역은, 개구리 우는 소리("아크")와, 8을 의미하는 독일어 acht("아흐트")가 서로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역주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타 출판사 책의 해당 대목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번역본만이 지닌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개 짖는 소리("")가 왜 "조금"이라는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선 분명한 설명이 없는데요, 원문에는 was("약간")이라고 되어 있어, 이것이 개짖는 소리의 의성어인 wau와 통하는 걸로 간주한 듯 보입니다.



43번 <트루데 부인>은 다소 소름끼치는 함축적 우화적 괴담입니다(타 출판사 책에는 <트루데 아주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무서운 건, 짧은 분량에다 그저 부조리하게만 느껴지는 "확정적 배드 엔딩"울 취한 까닭이 큰데요. 마지막 트루데 부인의 대사를 두고 이 책의 번역은 "그것 참 밝기도 하다."이며, 타 출판사 버전은 "그것 참 잘도 탄다."입니다. 둘 중 저는, 이 책의 옮김이 더 무서웠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전집에는 "소름 끼치는 법을 배우러" 넓은 세상을 향해 감연히 뛰쳐 나가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자신의 부모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이가 더 큰 무대 위에선 "최고의 대담성을 지닌 용자"로 밝혀지는, 일종의 성장 테마를 취한 그림 형제판 "미운오리새끼"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어떤 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고, 어떤 건 간단하고 창의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 이런 깊고 은근한 진실을 담았나 하는 감탄에 흐뭇한 웃음이 나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가볍게 때우고 싶을 때도 손에 잡고(하드커버가 아니라서 오히려 편합니다) 술술 페이지를 넘기기 좋은 책입니다. 아이들보다는 차라리, 머리 아플 일이 많을 어른들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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