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뒤의 역자 후기에 보면 "1988년작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저리>는, 이제 이 소설 때문에 아이들 동화나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먼저 소개된 <그림자>를 재미있게 읽으신 독자는, 카린 지에벨의 이 작품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즐기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즐긴다"는 말에 좀 어폐가 있긴 합니다만.



리디아는 빨간 곱슬머리를 기른, 늘씬하고 아름다운 이십 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에게는 정상인으로 행동하거나 사고할 수 없게 하는 큰 상처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태어났는데, 그녀들이 열한 샬 되던 무렵 오렐리아라는 이름의 이 자매가 실종된 것입니다. 아마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고 암매장당한 걸로 추측되지만, 범인도 알 수 없고 사체의 행방도 여태 묘연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때부터 경찰에 대한 불신까지 같이 품게 됩니다. 오렐리아는 죽었지만, 죽지 않고 그녀 의식 한 구석에 자리잡은 채 리디아를 놓아 주지 않아, 남은 리디아는 일생을 두고 오렐리아의 복수를 대신 해 주어야 한다는 집착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렐리아와는 마침 사건 발생 직전, 같이 애정을 다투던 한 남자아이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싸움까지 한 터라, 그녀의 죄책감(자매를 지켜 주지 못하고 혼자 살아 남았다는)은 더욱 깊어갑니다.

리디아는 그러던 중, 누가 그 끔찍한 살인과 성폭행, 사체 은닉을 저질렀는지 암시하는 편지를 받습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가 지목한 범인은,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데다 아직 젊은 나이에 경감직에까지 오른 현직 경찰, 브누아 로랑이라는 남성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무능한 경찰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던 그녀는, "먕백한 물증(무엇인지는 소설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이 손에 들어 오자, 앞뒤 가리지 않고 브누아를 납치합니다. 그녀는 약제 지식과 초급 간호학에 밝았기 때문에, 건장하고 영리한 남자- 게다가 현직 경찰 신분- 인 브누아를 힘 안 들이고 납치하는데, 여기에는 천성적으로 여자 꼬시기를 좋아하는 브누아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브누아의 눈에는 꽤 매력적으로 비친, 그리고 웬만한 남자에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리디아의 미모도 각각 한몫 거들었습니다.

 



리디아는,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강간, 살해, 사체 유기했다고 철석같이 믿은 이 남자를 시골 한적한 곳에 위치한 지하실에다 잡아다 두고, 강도를 서서히 높여 가며 각종 고문을 가합니다. 혹시 이상 성격을 지닌 사이코패스 여성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 모방범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이 과정은 대단히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미저리>에서 묘사되는 악녀의 행적 따위는 저리가랄 만큼, 특히 남성 독자들이 읽는 도중 몸서리가 쳐지고 자신의 국부, 어깨, 허벅지, 가슴 등이 무사한지 수시로 더듬게 될 만큼, 아주 신랄하고 생생하게 이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육체적 가학 절차 뿐 아니라, 가해자 여성과 피학대자 남성이 벌이는 심리전, 그리고 특히 일방적 열세에 놓여 있는 브누아의 의지와 결의가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에 대한 실감나는 서술이 압권입니다.



브누아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봉변을 당하면서, 온갖 생각과 상상을 머리 속에 교차시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다 치르면서도, 자기 눈에 지나치게 매혹적인 외모를 소유한 이 여자에게 수시로 반하기까지 합니다(워낙 천성이 여자를 밝히는 쪽이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저키즘적 쾌락을 느끼는 데까지 가지는 않습니다(그러는 편이 차라리 그 자신에게는 나았을 텐데요). 오히려 독자는, 이 사나이가 강력한 의지와 체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타입이라는 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읽는 도중 그에게 열심히 몰입하게 됩니다. "이 순간에도 아들 제레미를 생각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드는군!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 보라구!" "어차피 그 광녀는 널  살려 줄 생각도 없고, 혼자 힘으로 빠져 나갈 가망도 없는데, 차라리 그 여자의 광기를 깨우쳐 준다는 의미에서 장렬하게 죽음을 택하는 게 어떨까?" 독자의 반응은 같은 남성이라고 해도 이처럼 천차만별이겠으나, 캐릭터 브누아는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자신의 한 의식 안에서 양 극단, 즉 포기와 오기 사이를 오가는 진자처럼 감정과 이성의 격변을 겪습니다. "내가 이 처참한 지경에서 행여 살아나간다 해도, 이미 미쳐 버려 있을 지도 모른다."



여성 입장에선 어떻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나고 자라보지 않은 입장에서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만약 리디아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자신의 분신이, 그것도 어린 나이에, 악마나 짐승 같은 어느 사내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치욕을 겪고, 어느 컴컴하고 차가운 지하에서 백골만 남아 썩어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증오에 타오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 독자라면 경우에 따라 리디아에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 브느아라는 남자는, 쉽게 여자를 만나고 쉽게도 버리는 질 나쁜 바람둥이인데, 정작 미인은 자기 아내(가엘)은 따로 감춰 두고 순도 높은 사랑을 바친다니, 좀 당해도 싸다는 느낌 마음 한 구석에서 비밀스럽게 키울 만도 하겠습니다. 게다가 소설을 끝까지 읽기 전엔, 기가 막힌 반전으로 "그래! 사실은 내가 진짜 유아 강간 살해범이었다!"라고 자백하는 브누아의 모습이 나올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내용 누설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디 하자면, 다 읽은 독자로서 브누아는 결백하다는 점 미리 확실히해 두겠습니다)

조금만 더 내용 누설을 하자면, 사실 브누아도 죄가 없지는 않습니다. 오렐리아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느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죽음 근처까지 몰아간 적이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그가 받은 지독한 고초는, 어쩌면 그가 저지른 악행의 대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묘한 건, 죄를 저지른 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악행에 대한 응보를 치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최종 보스" 한 분만 빼고 말입니다. 오렐리아를 25년 전에 죽인, 이 소설에서 최악 극악의 등장 인물이라 할 조아킴(이름 밝혀도 별로 내용 누설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도 결국 죽습니다(더 지독한 방법으로 죽어야 했을 수야 있겠지만). 사실, "그분"도 소설 끝날 때까지만 죽지 않았다뿐, 반드시 가까운 시일 안에 제 죄과를 치를 것 같은 느낌을, 소설은 강하게 풍기기도 합니다,. 따라서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 거잖아!" 같은 의분을 느끼게 되진 않습니다.  사실 반전이 나름 절묘하기 때문에 독자가 그럴 정신적 여유도 못 가집니다만.

이 소설에서 다른 등장인물도 흥미롭습니다. 타지에서 급파된 파브르 경감은, 늙고 추한 외모의 소유자지만, 침착하고 이성적이며 직감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결국 브누아의 행방은 그가 찾게 되고, 아마 사건도 그가 해결해 주리라 독자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소설 초반에 "이런 실종 사건은 초동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말은 25년 전의 미제 사건 희생자인 오렐리아에게도 (읽다 보니)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라, 독자는 특히 아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뭔가 특별한 시스템적 조치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과 불안을 짙게 가지게 됩니다. 조아킴 한 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희생되었습니까.

피해자이긴 하나 리디아의 정신 상태와 인격 역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물증이라고 그녀는 확신했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걸 조금은 생각을 했어야죠. 브느아가 진짜 범인이라고 해도 법치국가에서 사력(私力) 구제는 안 될 말입니다만, 한번 생각을 정한 바를 귀를 막고 안 바꾸려하는, 말이 안 통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특히 남성이라면) 분명 피해자인 그녀에게 동정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물론 일부 비뚤어진 사이비 여권론자라면 이 경우에도 "남자가 무조건 잘못!"이라며 폭주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건전한 상식을 갖지 못한 자에게 어떤 경우라도 온당한 반응을 기대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남자분들은 제발 이 소설 좀 읽고, 밤 늦게 행여 만취 상태로 다니다 정신이상녀에게 몹쓸 봉변이나 안 당하도록, 간통죄도 폐지된 이 마당에 특히나 조심들 좀 하십시다.

파브르 경감(이름이 오귀스트라서 더 밉살맞다는)이 가엘 부인을 잡아들였을 때, "생긴 것도 멍청한 위인이 과연 생긴 값을 하는구만!"하고 짜증을 낸 독자도 많았을 겁니다. 브누아 로랑 경감 실종 건과는 무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직감이 뭔가 하나 건지기는 한 셈입니다. 카린 지에벨은 이처럼, 엑세서리 플로팅을 꾸려 독자의 긴장감이 도중에 낭비되지 않게 하는 데에도 아주 능합니다. 제가 이분이 쓴 스릴러를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대목이죠.

저는 처음에, "브누아를 선배라고 부르는" 토레즈 경사가 범인인 줄 알았습니다. 동기는 뭐냐, 남자로서 잘난 그에 대한 시기심과 적대의식, 그리고 브누아의 아름다운 부인 가엘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연정, 이 정도면 뭐 적절하죠. 그래서 처음 파브르가 그녀에게 혐의를 두었을 때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던 거고, 가엘이 자신에게 "삼천 유로의 진짜 용도"에 대해 털어 놓았을 때 "아니 매춘을 하다뇨!"라며 길길이 (필요 이상으로) 날뛰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범인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용의자 하나 정도 배제하는 게 큰 스포일러는 아닐 것 같습니다. 범인을 찾는 데에 가장 큰 힌트는, 지하에 갇힌 브느아가 입으로 계속 반복하는 그 한 마디에 있습니다. "그 말"은,. 비록 브누아가 그 진위를 판명할 전문지식은 없었으나, 결국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브누아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 거짓말을 한 사람이, "최종 보스", 범인입니다. 트릭이 치밀하면서도 독자가 너끈히 풀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카린 지에벨은 애거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보다 최소한 "공정성" 면에서 더 나은 작가라고도 하겠습니다. 이 소설의 진상, 당신의 머리로 풀 수 있으므로, 제레미의 말처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풀어 보십시오. 당신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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