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그마 세계 2차 대전 3부작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생각과 감정을 타인에게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언어, 그 중에서도 문자 언어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마음이 맞지 않는 타인에게는 숨기고, 나의 친구, 동료에게만 알아 보게 하려는 보다 세련된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암호입니다. 나의 정확한 의도를 숨기고 상대를 착각 속에 빠뜨리려면, 머리를 열심히 짜내어 도구를 고안해야 하는데, 이에는 상당히 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렇게 들인 노력의 보람이 있으려면, 상대를 속이고 얻는 물질적, 혹은 정신적 대가가 상당히 큰 것이라야 했겠습니다. 암호 통신이 전쟁에 있어 필수 수단으로 발전한 건 이 때문입니다. 전쟁 자체도 무엇인가 큰 것(돈이든, 땅이든, 자존심이든, 대의 명분이든)을 얻기 위해 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입니다. 한번 벌인 싸움을 이기려면, 갖은 꾀를 다 짜내어 적을 속여야 하고, 그런 책략에 말려들어 적이 제 풀에 넘어지면, 나의 피를 흘리는 수고 없이 효율적인 승리를 거두는 셈입니다. 아군의 통신을 우수한 암호 속에 잘 숨기고, 적의 소통 수단을 그 주고받는 암호 해석을 통해 교란시키는 일은, 탱크 수 천 대, 전투기 수백 대,  보급 선박 수백 척, 무엇보다 소중한 인명 수십 만을 아끼고 살릴 수 있는 첩경입니다.

 

2차 대전 당시 그 승패가, 연합국 측에 그 속내와 전략을 속속들이 간파 당한 추축국 측의 안이한 통신 정책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는 이가 많습니다. 한번 무적의 암호 체계를 개발한 후, 우수한 게르만 인이 구축한 방벽을 타 민족의 두뇌 따위가 뚫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과신한 독일군, 아예 그런 대비책조차 개발하지 않은 채 원시적 복호화 작업만으로 열심히 기밀과 작전 사항을 송수신하여 속내를 미국 측에 훤히 읽힌 일본군, 이들의 잘못된 방침과 판단이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합니다. 고작 암호 전술 운용 따위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소설을 읽어 보시면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이 적시에 간파되면, 아군 수천 수만의 기동을 안전하게 하고, 그 효과는 고스란히 적군측의 피해로 전가됩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내 생각이 상대에게 속속들이 읽히고 있다는 자각은 결정적인 사기 저하를 불러 옵니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갸 적에게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가상의 주인공 토머스 제리코는 아직 서른도 안 된 신출내기 수학자입니다. 돌아가신 부친이 수학자였고(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1차 대전 격전지였던 이프르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의붓아버지와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가 끼친 악영향 때문에, 약간 냉소적이면서도 소심한 성격을 지니게 된 그는, 조국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에 돌입하자 바로 차출되어 암호 해독반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영국 최고 명문 학부에서 일찍이 교수들에게 인정 받은 바 있고, 부친의 유지도 유지였거니와 무엇보다 제리코 본인이 수학에 살고 수학에 죽는 몰입형 인간입니다. 현대 수학은 워낙 복잡다기하게 발전하여, 적성을 빨리 찾아 전공을 특정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듭니다만, 이 시절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수학 전반을 사랑하고 능숙히 내용을 다루는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그가 강점을 드러내는 분야는 패턴 분석과 퍼즐입니다.

 

제리코는 원주율 파이가 테일러 급수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이런 패턴의 미를 추상적인 수식 속에서 찾을 줄 아는 그의 직분을 두고 시인이나 화가, 작곡가의 소명이나 마찬가지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직관이 가능하면서, 수학을 놓고서만은 맹인이 되어 버리는 주변 사람들의 무지를 오랜 동안 지켜 봐 왔기에, 그로서는 더욱 평균적 인간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굳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대상을 놓고 그 가치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저열한 지성과 감성만 지녔을 뿐인 이들이, 오히려 우월한 이의 기준과 능력을 두고 "이상하다"는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법도 한 제리코입니다.

 

이런 제리코이지만, 국가에 대한 원칙적 충성심은 순결할 만큼 간직하는 명예로운 인간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내면서도, 고위 당국자들의 한심하고 무능하며 경멸스러운 작태를 봐 오면서 그런 초심이 사멸해 버리는 게 보통인데, 제리코는 군사 기밀의 먼 범주에 속하는 사항까지도 어머니에게 숨길 정도로 고지식한 애국자입니다. 이런 제리코이건만, 괴퍅하고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동료나 상관에게 언제나 오해를 사고, 혹시 적과 내통하지는 않는지, 사명감이 미적지근한 위인은 아닌지 의심받기가 일쑤입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핳 수 있는 결정적 임무를 수행하는 중인데도(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국왕과 수상에게 격려 전화까지 받은 요인인데도) 일개 대학 짐꾼에게까지 미덥지 못한 시선을 받고 구설수에 오르는 꼴이니,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뿐입니다.

 

이런 제리코라지만, 혈기가 넘쳐 흐르는 팔팔한 20대 사내로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마음이 격동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블래츨리로 오는 기차 객실 안에서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가 신문 오락란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 오는, 다소 황당한 체험을 합니다. 마치 제리코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 이런 문제는 당연히 그에게 물어야 한다는 듯, 초면의 여성, 게다가 미모의 여성이 자신에게 접근해 온다... 그러나 제리코는 그답게, 마치 기다렸다는 빛의 속도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에게 과분한 이런 여성과 말을 틀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

 

제리코를 이처럼 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수학 외에 처음으로 아름다운 다른 존재를 만나, 밤을 새워 그 연정에 설레게 만든 이는 클레어입니다. 제리코에게는 자신 존재의 본질을 이루다시피하는 암호 풀이의 미션이, 국가 존망의 문제와 맞물려 이제 필생의 과업으로 등장한 형편인데, 여기에 여태 경험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해 준 아가씨마저, 수수께끼 같은 경로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암호도 풀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놓은 "베아트리체"의 정체도 밝혀 내야 합니다. 어느 "에니그마"가 그 풀이로 인해 이 젊은이의 정력을 더 소진시키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리코는 점차 두 문제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달아 갑니다. 클레어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동시에 구하는 것임을, 우리 독자와 함께 알아 가는 그 긴장과 재미, 서스펜스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매력입니다.

 

암호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책도 있고,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초보적 원리부터 자세히 풀어 놓은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인이 상업적 용도로 처음 발명했고, 이에 본질적 혁신을 가해서 난공불락의 체계를 구축한 전설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에 대해, 평소에 잘 모르겠다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고 소설적 재미와 함께 그 원리를 깨칠 수도 있겠습니다. 왜 에니그마가 철벽의 시스템이었는지, 그런 시스템이 결국 다른 방향의 지혜에 의해 뚫릴 수밖에 없었는지, 로버트 해리스는 이보다 더 쉬울 수 없겠다 싶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줄기는 전쟁사 해설이나 암호학 강의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개성 강한 캐릭터들 사이의 애정, 갈등, 긴장, 대립, 화합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해리스가 언제나 자기 작품에서 보이는 솜씨지만, 비열한 악한은 독자의 공분을 일으키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지닌 주인공은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부르게끔 제시되고 있습니다.

 

회전자 하나가 늘어나면 왜 암호 해독이 26배로 어려워지는가. 다름 아닌 키가 작동하여 종이에 찍어내는 알파벳의 수가 26자이기 때문이죠. 회전자의 수가 n이라면, 이를 통해 부호가 담고 있을 수 있는 메시지의 경우의 수는 26의 n제곱이 될 것입니다. 특정 키가 결코 자신을 타이핑할 수 없어, 오히려 문자열의 대조를 통해 정체를 똑바로 노출시킬 수 있다는 치명적 약점은, 가장 교묘한 위장이 가장 적나라한 폭로라는 심오한 역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은 그 이름만 간간히 거명될 뿐 무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앨런 튜링이 주인공 제리코의 스승으로 그나마 대사 약간이 주어진 채 나오는데, 얼마 안 되는 비중으로나마 독자는, 왜 이 사람이 종전 후 잔인하게 영국 지배층으로부터 폐기 처분되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 군담 소설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처럼 "주군, 이 자를 건사 못하시겠거든 차라리 죽여버리십시오." 같은 거죠. 동성애 습벽 따위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겠고.. 중반 들어서 자주 이름이 나오는 되니츠는 해군 제독이고(소설 중에서는 "장성"이리고 합니다만...), 히틀러가 죽은 뒤 독일 국가 수반 지위를 계승한 거물입니다. 상처 입고 거칠어진, 조심스러운 외양 아래 한없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속모습을 감추고 있는,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가 아마 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여성 캐릭터일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리코(그 이름도 승리의 상징이죠.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의  극적인 성취가 있었던 바로 그곳을 딴 이름)에게 크게 하나 배운 건, 앞으로 영자 신문에서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 때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요령이었습니다. "문제를 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