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랑해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유혜자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과 집착, 경계 넘어 하나됨과 범죄 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떠오르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글린타우어가 내놓은 이 신작은, 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희귀하고 이례적인데, 다만 겉으로 봐서는 흔한 남녀 사이의 사랑 다툼입니다. 두 당사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그렇게 몰아가려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은 사랑 다툼이 아니라, 당장 해소되고,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상 복구 되어야만 하는 끔찍한 사고"로 간주합니다. 이 두 사람 주위의 친구들은, 두 사람 모두를 존중하지만, 그 중 한 사람에 더 공감한 나머지, 그 사람의 관점, 즉 "사랑 싸움으로의 해석"에 동의하여, 다른 사람을 살살 달래면서 좋은 결말, 해피한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게 노련하고 애정 어린 조율을 시도합니다.

이게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럼, 내막, 속사정은 어떠할까요?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인 여성 유디트의 입장이 주로 반영된 설명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이어지고 있지만, 그건 유디트 개인의 "시선, 생각, 감정"일 뿐입니다.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사태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죠. 소설에서 어떤 인물이 주인공 위치라는 건 일종의 특권인데요. 우리 독자는 그게 누구의 것이든, 특권을 인정하는데 인색합니다. 주인공이 아주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 특권 부여가 용서가 되겠다 싶으면 모를까, 잘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누구 편을 들어 주면 안 되겠다며 신중해집니다.

유디트는 매력이 부족해서, 우리 독자가 함부로 손을 들어 주기 주저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삼십 대 중반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꽤 아름다운 편인가 봅니다. 한창 피부의 윤택과 광채가 꽃필 나이,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자연산 방향을 풍길 나이는 비록 지났지만, 그녀는 대신 성숙함과 정서적 안정이라는 면에서, 여인의 다른 매력을 뿜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나이를 먹었다고 여성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볼품 없이 시드는 이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생활력 있고 강단이 넘칩니다. 그럴다고 사람 안 가리고 되바라진 모습을 보이냐면, 절제할 줄도 압니다. 남자가 비록 도에 넘친 바람둥이인 사정이 있다고는 하나, 20대의 절정이라 할 육체적 매력을 풍기는 남성 크리스와 아무 무리 없이 뜨거운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일단 유디트 이 여성이 매력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자, 사정이 이런데, 유디트의 친구들도 그렇고, 그 남동생, 심지어 어머니(아버지는 아닙니다. 이상하게 아버지는, 이 딸의 인생에서 몇 발짝 거리를 두더군요)까지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유디트의 해석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유디트가 스토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 (이 역시 유디트의 주장일 뿐입니다) 한네스에게 더 공감하고 동조합니다. 너 왜 그러냐고, 너 아니라 어떤 여자도 반할 만한 남자고, 너 아니라 어떤 여자한테 가도 사랑받고 존경 받을 남자인데, 니가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좀 넘쳐보이기까지도 하는 남자인데, 덥석 물 생각은 안 하고 왜 이상한 내숭, 혹은 신경 과민이냐고.




우리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디트 이분 너무하는 거 아냐? 하긴 성격이 저러니 저 나이를 먹도록 혼자였지.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이건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읽고 있는 제가 남자라서, 유디트가 저러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마땅히 해야 할 이해를 베푸는 데에 주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주위의 여성 한 분에게 물어 봤습니다만, 저하고 별로 생각이 다르지도 않더군요. 유디트, 흠, 이분을 이제 좀 편한 마음으로 비난해도 될 것 같네요.

그래도, 그래도... 한네스- 이분 나이도 지극히 먹은 사람입니다. 사십대 초반이니, 처신이 똑바르지 않으면 좋은 소리 못 듣을 처지입니다- 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여자가 저러는 거겠지. 여튼 여자가 마음 안 주고, 싫다는 의사 표시 분명히 했는데도 남자가 계속 그러면 그건 남자 잘못이지. 남자라면 더군다나 스토킹으로 오해 안 받도록 더 분명한 주의가 필요한데 말야. 뭐 이렇게 생각?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음, 한네스 씨가 일방적으로 유디트를 쫓아다닌 건 아닙니다, 선수답게 멋진 구애를 처음에 시도한 건 맞지만, 이후에는 쌍방 동의 하에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친지들에게 소개하는 과정도 있었고(이상한 건, 한네스 씨가 뚜렷한 사회적 지위, 재력이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유디트를 자신의 주변에 소개시키는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유디트는 반대로, 자신의 주변 모든 이들, 진짜 한 사람도 삐놓지 않고 이 한네스를 소개 시켜 줬습니다), 한네스 씨가 유디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바도 없습니다. 유디트도, (독자를 향해) 말이 많은 주인공이 아니라서(어떤 소설을 보면 내면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여성이 자기 자아를 해부하듯 독자에게 간청해 가며 들려주는 것도 있죠. 그러나 유디트는 이런 케이스에 비하면 차라리 과묵하다 하겠습니다), 정확히 유디트가 어떤 계기로 한네스에게 마음을 끊었는지 알기가 힘듭니다. 겉으로 봐서는 둘이 베니스 여행(이것도 한네스 씨가 경비와 계획 모두를 마련한, 여자친구 유디트에의 선물이었죠)을 갔다 온 후, 무슨 변덕인지 유디트가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게 전부입니다.

여튼 여자가, 남자를 향해 싫다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으면, 자기가 소년 청년도 아니고 중년 남성이라면 "알았다"며 분명히 발을 끊어야죠. 그런데 딱 한번(일단 드러나기로는), 한네스 씨는 유디트 주변에서 죽치고 앉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는 했습니다. 이건 안 되죠. 하지만 분명히 경고를 하자, 그는 물러납니다. 최소한, 문자를 발송하고 꽃을 선뭏하고 집 주변을 배회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타격을 받아 병원에 먼저 입원하기까지 하는 게 한네스 씨였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 애정을 줄 듯하다가 매정하게 끊어버려 남자 하나 폐인 만든 유디트라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여성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더군다나 신분도 버젓히 갖추고 매너도 좋다는 평판이 자자한데 말이죠. 게다가 한네스 씨는 능력도 있어서, 유디트의 실직 상태인 동생 알리에게 근사한 일거리를 마련해 주기까지 합니다. 이러니 예비 처남, 처남댁, 장모님까지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서 니가 이런 재주로 이런 일등 사윗감을 데려왔냐고, 유디트의 어머니는 딸을 다시 보기까지 합니다.

유디트는 그러나 주변에서 자기 편을 안 들어 주고, 환상이든 현실이든 원치 않은 남자가 자기 인셍에 끼어들어와 나가질 않는다고 생각하자, 미치기 직전까지 갑니다. 나중에는 약간의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모르는 사람에게 길에서 말을 걸고 마구 울다가 실신하는 일이 벌어져,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니 유디트 편을 드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독자도 여기에 이르러선 짜증이 슬슬 일기 시작합니다. 자기 감정에만 충실해 가지곤 주위에 민폐 끼치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여자가 신사 한 사람 범죄자 만드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여기까지는, 소설이 사태를 모호하게 몰고 갈 뿐 진상이 안 드러납니다. 독자는 자기 감정과 취향애 따라, 대채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말입니다.

불과 세 쪽 정도를 남겨 놓고, 소설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결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지어버립니다. 혹시 이러다 열린 결말 비슷하게 가지 않나 생각했던 독자에게는 천만 뜻밖으로, 열린 결말은커녕 "쾅!" 소리 내고 닫히는 철제 도어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면 불과 세 페이지를 남기고, 그간 숨겨져 왔던 진상이 밝혀지는 겁니다. 독자가 마음의 준비도 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내용 누설이 있으니. 혹시 소설을 읽을 마음이 있는 분은 주의하십시오)



유디트는 조명 인테리어 가게 사장입니다. 상당히 잘 안풀리던 외조부의 가게를 이어받아 어머니가 고전하던 사업을, 자신이 맡은 후로는 제법 좋은 태깔로 살려 놨습니다. 이 가게에는 비앙카라는 여직원을 두었는데, 스무 살도 안 된 여성답게 수다스럽고 행실이 좀 조신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의외로 생각이 깊고 세상 물정에 밝은 면이 있습니다. 유디트가 유능한 경영자이니까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잘 가려 뽑은 게죠. 이 비앙카가 큰 공을 세웁니다. 비앙카도 애가 똑똑하니까 자기하고 잘 맞는 남친 하나를 잡아 사귀고 있는데, 이 남친이 아니었으면 유디트 사장은 인생 망칠 뻔했습니다.

세상 일은 진정,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모릅니다. 유디트 주위의 가족, 친구들도 어제오늘 사회 생활을 시작한 풋내기가 아닌데, 어느 남자의 노련한 매너와 재력, 그럴듯한 분위기만 보고 모두 속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며칠 동안 밀착해서 함께  지내 보니, "왠지 이건 아니다!" 같은 여자의 육감으로, 한네스 씨의 본모습이 턱 하고 감이 왔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날 이후 유디트는 이 뭔가 모르게 꺼림칙한 존재를 자신의 인생에서 지우려 노력했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속 검은 한네스는 범죄의 경계를 애써 넘지 않으면서 또 한번의 수작을 부리려다 마침내 임자를 만난 거죠. 애정소설, 반전 스릴러라기보다, 진실이 무엇인지 인간의 진심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판단하기 힘든, 우리네 현대 사회의 실상을 풍자하는 우화 소설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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