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뉴엘 2 - 순결에 반하다 에디션 D(desire) 8
엠마뉴엘 아산 지음, 문영훈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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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엠마뉴엘도 물론 2편이 나왔고, 심지어 나오지 말았어야 할 3, 4, 5, ... n편도 줄을 이어 등장했습니다만, 이 원작 소설과의 연계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부제가 같아 착각하기 쉽지만, 이 2권과 영화의 2편은 거의 아무 연결지점이 없다 해도 되겠습니다. 굳이  찾자면 지리적 배경으로 반환 전 홍콩이 잠시 등장한다 정도? 여기서 이제 단단한 실체로서 레귤러 서클을 형성한 엠마뉴엘, 마리오 들은 성(性)을 그 응결 매체로 삼아, 이론과 실천 양 면에서 항구적 소통과 열락을 꾀하는 연대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예전에 영화 버전을 봤을 때, 행위와 이론의 대가, 그랜드마스터라고 평판이 자자한 이 마리오님이 등장하실 때, 충격과 실망이란 게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극한의 혐오가 치밀어오를 만큼 늙고 사악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거대한 덩치를 지닌 호색한에 변태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배우의 등장이었는데요. 허연 백발을 머리에 이고 아래위 수트도 역겨운 익스트림 화이트로 코디를 한 그 늙은이가, 뼈밖에 안 남은 듯 가냘픈 엠마뉴엘을 덮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끔찍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에 제가 미리 상상한 그런 장면은 안 나타나더군요.

 

영화에서도, 이 원작 소설에 묘사된 대로, 타이 원주민 남성들(어리거나 혹은 나이 들었거나)에게 엠마뉴엘을 "단련"시키는 길을 선택한다든가, 혹은 금지된 향 정신성 물질을 흡입시킨다거나 하는 스토리라인이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소설과 원작이 거의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 면을 보자면, 마치 선승이 제자를 훈련시키듯, 막연하고 추상적인 명제를 툭툭 던지듯이 일방통행으로 이뤄지는 게 영화 버전이고, 이 소설에서의 장면은 그렇지는 않아서 상당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학생"인 엠마뉴엘이, 그 완성된 결론에 함께 기여하겠다는 듯 비중 있는 참여 행태를 보입니다.

 

소설에서의 마리오는 중년 남성이기는 하나, 짐작건대 남편 장보다 좀 더 나이가 든 중년, 아주 나이 든 태가 풍기지는 않는 관리가 잘된 중년으로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영화에서의 남편 장은 중년, 마리오는 노년, 소설에서의 장은 장년 남성, 마리오는 중년 정도로 설정된 것 같아요. 영화에서 마리오 역을 맡은 배우는 사실 당대 유럽 영화계에서 거물급 비중이었고,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작 <사티리콘>에서도 아주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마리오와 엠마뉴엘, 그리고 이제 이 둘을 구심점으로 형성된 여러 인사들의 "동아리"는, 소통의 와중 담론과 행위를 유기적으로 교차시켜 가며 마치 인도 굽타 시대의 바즈라야나 교단이 도를 찾아 수행이나 하듯 서로의 지적, 육적 갈증을 채우려 합니다. 우주의 진리는 수학적 언어로밖에 탐구할 수 없는 한계를 확인하듯, 성애의 큰 목표가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생명 탄생과 존재의 비의"에 대해, 이들은 치열한 논쟁을 펼칩니다. "우주의 생명체가 먼 광년의 거리에서 우리를 지켜 볼 때, 아무 깊은 근원과 내력을 지니지 못한, 긴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 박제된 미물이나 보듯 그렇게 우릴 관찰할 것이다."는 대목에서, 이들이 말초적 쾌감에 존재를 매몰하지 않고 의식 있는 고등생명체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대부분은 따분한 형이상학 담론이 아닌, 각종 성희(性戲)의 전위적 경연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독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이 2권까지를 펼쳐 들었든 간에 실망할 일은 그닥 없겠네요. 지금 세상에도 조신한 숙녀라면 그 생긴 모습만 봑도 소스라칠 것 같은 "도구"가, 근 한 세기 전에 쓰여진 이 소설 중 아리안느와 엠마뉴엘이 심도 있게 즐기는 행위에서 큰 도움을 주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안 나온 건 당연하구요. 영화와 소설이 이런 점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데, 스토리라인에서 한두 번 정도 등장하다 후반에 자취를 감추는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낭비된 캐릭터 없이, 엠마뉴엘의 각기 다른 욕구를 특화하여 채워 주는 역할로 고루, 그리고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활용되고 있습니다.

 

미술가 안나마리아는 영화에서는 전혀 안 나오는 인물인데, 이 소설에서는 특히 2권에서 큰 비중으로 등장하여, 예컨대 누구의 pubic hair가 븍극 스라소니의 그것처럼 눈부시다니 뭐니를 평가하고 있습니다(세상에,.... 북극 스라소니는커녕 코카서스 인종의 그것도 어디 맨눈으로 구경읗 해 봤어야... ). 사자갈기 같은 머리를 한(갈기는 숫사자에게만 있습니다만...) 소녀 메르베와의 대화에선, 소설이 주된 장소적 배경으로 삼는 타이의  분위기와 밀착한, 불교 승려들의 모습이 잠시 포착됩니다. "저들이 관심을 두는 건 주로 숫처녀 쪽이에요." 이 말은 아주 역설적인데, 대화는 누가 봐도 아직 처녀성을 간직했을 여인들을 두고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못 하는 엠마뉴엘에게 메르베는 제2의 펀치를 날립니다. "즉, 저들은 당신 같은 타입을 좋아하죠."

 

여기서 이 2부의 부제 "안티버진"의 의미가 어느 정도 해명되기 시작합니다. 순결이니 처녀니 하는 것의 이데아적 의미는, 어떤 육체적 조건이나 상태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어떤 영혼이 충분한 경험을 하고서도 그 체험의 의의, 영향, 혹은 "맛"이  무엇인지 넉넉한 이해를 하지 못할 때, 그 영혼은 아직 위험한 "처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혹은 반대로, 아직 신체의 꽃잎이 채 떨어지지 않은 단계라 해도, 육체의 쾌감이 무엇인지 감도 못 잡고 있거나. 영혼의 타락이 일정 수위를 넘어버렸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처녀를 잂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엠마누엘의 경우, 타고난 순수, 무구함의 정도가 워낙 깊다 보니, 어지간한 체험으로도 그 처녀의 보호막을 아직 잃지 못했고, 이는 순결의 보존으로 긍정적인 의미라기보다 오히려 육적 갈증으로 인한 타락으로 치달을 위험마저 내포하기에, 마리오나 기타 "성숙한 친구들"은 정신적 트레이닝을 통해 그녀가 빨리 "이 끈덕지고 위험한 처녀 딱지"를 떼게 도와 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2권의 "안티버진, 순결에 반하다"의 참된 함의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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