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예술가의 부활절 살인 - 20세기를 뒤흔든 모델 살인사건과 언론의 히스테리
해럴드 셰터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술가란 그 정신의 일면에 반드시 광기를 잠복시키는, 서글픈 운명의 소유자여야만 할까요? 그저그런 성취와 재능의, 대중영합적 예술가 부류를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분은 예술보다는 비즈니스나 정치를 했어야 옳았다." 싶은,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고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어낼 수 있는 처세의 달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류의 예술혼과 불멸의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라면, "아니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만큼, 자신의 주변과 잦은 충돌을 빚습니다. 피카소만 해도 싸움질하다 무의미하게 흘려 보낸 청춘의 시간이 많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체 자해까지 서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성질 좀 죽이고, 그렇게 생긴 여유로 작품 창작에나 더 열의를 쏟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절로 일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또 그렇게 되기가 힌힘든 모양입니다. "난 네가 너무 싫어! 이건 보기 흉해! 저건 미적으로 무가치하다고!" 그때그때 정직한 영혼의 표백을 직설적으로 해 주지 않으면 영혼에 곰팡이가 슬어서, 신이 자기에게 부여한 그 모든 영감과 재능이 손상되기라도 하듯 여기나 봅니다. 안 그렇고서야 그리 과격한 모습을 보일 리 없죠.

이 논픽션의 주인공은 로버트 어윈이라는 젊은이입니다. 대공황 시기에 살았고, 직접 저지른 사건 때문에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던 실존 인물입니다. 그를 당시에 보았고 부대꼈으며 직접 사귀기도 했고(유난히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 증언합니다. 그만큼 일단 개인적 매력이 넘쳤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 그에게 큰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상처를 입은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재능이 분명 넘쳐났는데, 그 재능을 하나도 꽃피우지 못하고, 역사에 남을 범죄자로만 이름을 높인, 진정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조우한 누구라도, 일단 그 불 같은 정열과 조각처럼 빚어진 단아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리 보기 드문 예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진짜 천분은 조각하는 재능에 있었습니다. 이는 당대 일류 조각가들이나 평론가들이, 그의 손놀림과 작품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인정한 바라, 그가 예술사에 이름을 올려 놓지 못했다고 해서 쉽게 무시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이 책 서두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 장소적 배경은 "빅맨플레이스"입니다. (철자는 Beekman place입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하신 독자를 위해 적어 놓습니다) 서두에도 자세히 나와 있고, 역자 후기에도 그런 취지로 되풀이되는 서술이 있습니다만, 한때 빈민가로 위상이 굳었다가 이후 몰아닥친 호황의 붐에 힘입어 고급 주택가로 거듭난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상계동이나 용산 일부가 이에 해당하겠구요. 저자는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던 이 범죄 사건을 두고 그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하려는 듯한 의도를 책 곳곳에서 노출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순화, 혹은 일반화가 쉽사리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너무도 충실히, 연대기적으로 수집하고 복원한 이 책의 전 체계로부터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사건은 단지 한 지역의 시대적, 경제사적 특징이 빚어낸 비극은 아닙니다. 일차로는 한 개인의 유전적 질환이 큰 동인으로 작용한 비극이요, 다음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오래 전에 도랑 밑으로 떨구어 버린 비정한 미국 자본주의가 주조한 괴물, 바로 젊은 로버트 어윈이 주연을 맡은 참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아메리카의 비극"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그 넓은 미국 땅 중 안 나오는 데가 없을 만큼 대서양에서 태평양, 중서부에서 딥 사우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지명이 구석구석 언급됩니다. 배경으로 단지 그치는 게 아니라, 로버트 어윈이 그 배경을 자기 행동과 생각의 자양으로, 장애물로, 화려한 무대로, 그리고 범죄의 기반으로 충실히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숨길 수 없는 끼와 재능, 그리고 격정으로 뭉친 사내아이로, 주위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는지 가는 곳마다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고, 동성애자와 질 나쁜 남성 불량배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접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의외로 겁이 많았는지 성 경험은 미국 표준으로 대단히 늦은 21세때가 처음이었고, 그것도 매춘부하고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자기애가 강한 타입은 보통 (아무리 급해도) 매춘부를 상종하지 않는데, 이런 걸 보면 자기 존중감이 약한 구석도 있었나 봅니다. 처신 반듯한 여성을 꼬시려면 품고 있는 화제가 많아야 하고, 그 세계관이 보편 지향이라야 하는데, 아마 어윈은 그런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어윈은 아주 골빈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층민 출신으로 고르게 지성이 발달하지 못한 유형이 흔히 그렇듯(다른 예로는 히틀러가 있죠), 편향된 지식을 머리에 집중적으로 몰아 넣고, 제 3의 가능성 없이 선과 악, 흑괴 백으로 세상을 이원화하여, 충분한 근거 없이 폭주하는 성향이 뚜렷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악으로 쉽게 단정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재능까지 부족하거나 외적인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상황에 따라 유력자에게 떳떳지 못한 방법으로 영합하는 모습(매춘이라든가)을 보이기도 합니다(참으로 표리부동한 성격이죠). 로버트 어윈은 정반대로, 도무지 타협이라는 걸 모르는 외골수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진정,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타고난 완력도 센 편이었는지, 그는 싸울 때마다 상대를 다 때려 눕혔고, 그래서 피해자로 둔갑하여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일도 전무했습니다. 그는 검사나 의학 전문가들로부터 "충동 조절 장애"라는 거의 일치된 진단을 받고, 정신 병원이나 교화학교에 수용되는 일로 청춘을 다 보내다시피했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근 80년 전의 미국이 이처럼 사회 방위 시스템(이런 시설은 우선 환자-죄인을 배려함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를 그 비정상 행위자로부터 지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이 잘 갖춰져 있구나 하는 감탄이 들기도 했어요. 여기에 나오는 갖가지 시설, 학교, 정신병원(진짜 이 책은 정신병원 교도소 교화시설 백과사전 같습니다. 안 나오는 이름이 없어요^^) 중에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위디어 학교(책에는 "위티어"라고 적혀 있습니다)가 있는데요. 그 근방에 같은 이름의 위디어라는 로스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곳에 출장차 가봤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로스쿨은 사실 미국에 있는 동종학교 중 삼류에 속하는 곳인데, 여기가 왜 유명하냐면, 바로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이 이곳을 졸업하고 변호사, 상원의원,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까지 당선된 신회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닉슨은 탄핵의 흑역사가 있고, 여긴 여전히 삼류 로스쿨의 멍에를 못 벗고 있죠.

로버트 어윈은 조각 실력도 뛰어났고, 잘생긴 외모로 가는 데마다 인기를 끈 대단한 매력이 있기는 했나 봅니다. 그가 한때 사귈 뻔했던 여성 중에는, 나중에 큰 인기를 끈 연예인이 되거나, 될 뻔한(왜 되지 못했냐면, 바로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도 있고, 알고 지냈던 동생뻘 후배 중에는, 이수르 다니엘로비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유태계 러시아 이민의 후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당대 최고의 남우로 인기를 모았고, 할리웃에서 인맥, 돈줄로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던, 커크 더글라스(이 사람은 빈센트 반 고호 역을 영화-1956년작 러스트 포 라이프. 한국어 제목으로는 "열성의 랩소디"입니다-에서 맡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원초적 본능'에 나온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아무튼 이 책은, 마치 솜씨 없는 작가가 이야기만 잔뜩 부풀리게 위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이 다양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산 어느 불쌍한 젊은 범죄자의 사연입니다.

누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이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활화산과도 같았던 열정을 품고 산 가능성의 총체를 곁에서 잘 보살펴 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전혀 터무니없는 예상은 아닌 것이, 서양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도 위인의 범주에 드나" 싶게, 충동과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빚은 이가 많았습니다(동양에는 이런 예가 잘 없죠). 그런 이들과 이 로버트 어윈은 종이 한 장 차이의 궤도를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환경이 불우하여 어떤 이는 희대의 범죄자, 광인으로 남았을 뿐이었겠죠. 책 읽는 분들이 조심하셔야 하는 게, 잔인한 묘사가 많습니다. 역자는 재미를 위해 "셀프 거세"라는 표현을 자주 적고 있는데, 남자들에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효과를 내는 게 바로 "거세"일 것입니다. 해당 대목을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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