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읽는, 머리가 뻐근해지는 인문, 사회, 그리고 정치 분야를 속속 파헤치고 진단해 주는 담론서(에 가까운 저널)을 읽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말을 두고 "거짓"이라고 규정하는 행동이 아주 큰 모욕이고, 공격이 된다고 합니다. 사회에서 오가는 수많은 말들 중에, 상당수가 (어떤 이유에서건, 또 누구로부터건 간에)"거짓"이라고 불린다면, 그런 딱지붙임이 거짓이든 참이든 간에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진짜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거짓말이야!"를 외친 이는 간절히 거짓이라 믿고 싶었다는 뜻이고, 진짜 거짓에 불과했다면, 그렇게 태연히 거짓이 통용되는 사회는 어딘가 병이 단단히 들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자 남재일 교수님은, 거짓말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눠서 보고 계신 듯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거짓말"이요, 둘째는 "말의 거짓말"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사람의 거짓말이란 말 그대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습니다. 부당한 잇속을 차리기 위해 하는 거짓말,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당장 면전에서 듣기 좋은 언사를 꾸며 댈 때 동원되는 거짓말,... 여기에는 물론, 정치인들, 자본가들이, 무지한 대중,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해 교묘한 선동, 상징 조작을 할 때 쓰는 수단도 포함되겠습니다. 이런 거짓말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종 현상이나 사건을 볼 때 표피적 관찰에 머물지 않고, (여러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꾸려 낸 담론의 도움을 얻어) 그 구조의 허구성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을,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우리 독자에게 일러 주고 계십니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시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 다가 온 건, "말의 거짓말"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우선 저는, 표의자의 진정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리고 논리적 치밀함도 겸비하고 있는 "말"이긴 하나, 당장 그 말이 표의된 시점에서의 현실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탓에, 현상적 거짓으로 판명되거나, 모순 심화의 하부 도구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담론을 그리 부르시는 것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그 말을 이해하는 입장에서의,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곡해, 오해를 통해, 결과적으로 거짓이 되고 만 말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지, 급한 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이 주제어들을 두고 과연 어떤 식의 개념정리가 가능할지, 또 정(定)해진 정(正)답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아름답고 우아하게 빚어진 문장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아한 문장이 흔히 놓치기 쉬운 미덕이, 명료함과 (많은 경우 진정성까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직설성입니다만, 남재일 교수님의 이 책은 그런 목표들까지도 전혀 놓치지 않고 계십니다. 우아한 문장은 각 문단의 적절한 길이와 내용적 안배가 이뤄져야 돋보이고, 다양한 개념어들이 각기 정확한 의미로서 인용, 원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인용은 인용대로, 저자분 고유의 주장은 또 그것대로, 참 아름답고도 명쾌하게 구사된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느낌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교수님은 분명한 자신의 정치적 주장(그는 누가 뭐래도 이 책에서 정치적입니다)을 전달하는 데에,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모호해지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규정하기에 타락한 정치인(여기에는 보수정당은 물론, 현 야당 측의 김광진 의원 같은 이도 포함됩니다)이다 싶은 이들에게, 쓰디쓴 고언을 넘어 준열한 단죄를 서슴지 않습니다(여기에서 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그 유명한 "애정의 결핍"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특정 세대에게는 사실 너무도 인기 있던 철학자라서, 모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 큰 논란을 빚고 있는 모 사이트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도, 잉여인간의 원한과 좌절을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정치적 액션을 취하는 그들에게, 정치적 위상을 부여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경멸과 무시"를 처방합니다(여기에는, 이미 나치 발호 시점부터 그들의 허상과 정체를 꿰뚫어 보았던 라이히 같은 철학자의 담론이 적절히도 원용됩니다).
문장에는 빈틈이 없고(형식, 내용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 신랄하면서도 때로 유머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정말 글이란 (혹시 쓰게 된다면)이런 방법으로 써야겠다는 각성과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직정적 표현으로 시원하게 대중을 대변해 주는 이들도 많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답답한 현상을 타개하려 애 쓰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강력한 논리와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적수를 시원히 논파해 주는 논객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돈되고 정확한 어휘, 문장, 글월로, 복잡다단한 현상을 그 심연까지 파고 들어가서 이처럼 명쾌하게 규정, 해명, 분석해 주는 글은 근래 참 오랜만에 읽어 보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각 글들이, 어떤 일관된 계획 하에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 위해서 저술된 게 아니라, 매체에 기회 있을 때마다 기고된 글들을 모은 것이라 더욱 감탄을 자아냅니다. 남재일 교수님께서, 이 가망 없고 출구가 닫힌 듯 암울한 세태를, "한 큐에" 꿰고 정리할 수 있는 종합적 담론을 담은 체계서(體系書)도 가까운 시일에 출판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