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혜나 작가의 삼부작 중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 작품을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지만, "짧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전작 두 권이 하드커버로 나왔을 때도, "이렇게 짧은 분량을 양장본으로 낼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죠(양장/페이퍼백 선택이 책의 분량과 직접 관계는 없습니다만).

 

출판사에서 그녀의 작품을 평가(하고 홍보)할 때, "한국문학의 탈출구, 새 지평을 제시"했다는 문구가 보통 따라붙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나갈 때, 어려운 말도 없고, 심오한 사상을 표면적으로 표출하지도 않는 그녀의 스타일(오히려 정반대라면 모를까) 때문에, 그런 미덕과 가치를 발견하게 되지는 보통 않았습니다. 다만 출판사에서 그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기에, "아 우리 무지한 독자들도 그래야 하나 보다"며 머리를 싸매고 읽어 나가기는 했죠.

 

전 2작을 읽으셨을 분들은 어떤 느낌이시던가요? 솔직히 말해, 어떤 이지적인 작용을 그 독해 과정에서 내 뇌에 기대하고 명령하기보다는, 말초적인 흥미에 먼저 민감해지던 모습이 보다 정직한 기억 아닌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충격이다. 어른으로서 부끄럽다" 같은 반성과 소감을 누구나 이야기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분들도 서평에 "짜릿짜릿 재미있었다" 같은 말을 쉽게 적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부조리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듯 암울하게 막을 내리는 결말에서 뭔가 살짝 숙연함이 들기는 했습니다만, 그 역시 은밀한 죄책감을 적당히 덮으라는 작가의 독자에 대한 영리한 배려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우리의 금붕어 기억력은, 결말의 인상에만 지배되고, 이는 우리의 자발적 선택이기도 합니다, 골치 아픈 것 싫지 않습니까.

 

전작 <제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답이 없는 인생이고, 혐오스럽고 타락한 삶입니다. 겉으로는 일단 태깔이 나나, 속은 다 썩어 있고, 과연 늙어서 뭘 할지 혀를 끌끌 차게 되는, urban tragedy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여튼 주인공은, 얼마 있지 않아 도래할 처참한 시듦을 겪게 될지언정 아직은 빛나는 청춘입니다. 우리 독자는 그래서 불편할지언정, 그 성적(性的) 행태에 대해 혐오스러워할망정, 전적인 불쾌감과 분노만큼은 독후(獨後)에 면(免)하는 결과였습니다. 여튼 청춘을, 실수도 하고 비위도 저지를망정 아름다운 존재 아닙니까. 무슨 성(性)을 어떻게 향유하건, 젊은 시절에 벌이는 모습은 그리 추하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젊으니 나중에 무슨 돌파구가 생길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이 <그랑 주떼>는 그렇지도 않더군요.

 

주인공은 이중의 불행을 겪는데, 그것이 일생을 두고 치르는 고통입니다. 하나는 어린 시절의 성폭행이 가져다 준 트라우마요, (이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힘든) 다른 하나는 또래들로부터의 왕따입니다.

 

작품에서의 서사 순서를 따르자면, 일단 주인공은 학창 시절 내내 극심한 왕따를 겪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키도 또래에 비해 큰 편입니다. 학습 능력이 아주 떨어진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왕따입니다.

 

본인이 알고 다른 또래들이 느끼는, 왕따의 분명한 이유는 바로,


"저년은 그저 재수 없음, 드럽게 재수없는 년임."

 

입니다.


공부도 못하고, 센스도 없고, 평균치만 했으면 될 키까지 딱 재수없을 만큼만 크니, 저런 애는 왠지 싫다는 게 또래들의 "판결"입니다. 아이들은 반드시 어떤 상대가 열등해서만 왕따를 시키는 게 아닙니다. 우월한 존재도, "부러움"과 범벅이 된 묘한 "적대감"은 보통 아이들에게 왕따에의 충동을 유발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그녀의 친구(유일한 친구인데, 같이 왕따를 당하다 보니 당연하죠) 역시, 귀여운 외모에, 부유한 가정 환경에, 아무한테나 반말(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어쩔 수 없죠)을 하는 행동 따위가 처음엔 선망의 대상이다가, 나중에는 왕따의 좋은 표적이 됩니다.

 

왕따를 당하는 애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근원적 우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애들과 잘 못 어울립니다. 못 어울릴 만한 심성을 떨치지 못하니 정말로 못 어울리게 되고, 원인과 결과는 서로 위치를 바꿔 가며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 주인공 역시 마찬가집니다. 못난 구석이 많다고는 하나, 하나하나만 따지면 남들한테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게 모이고 모이니까, "천하에 재수 없는 년"이 되는 겁니다. 한 성깔 하는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반대로 구석(전면에서는 아니고)에서 나름 애들에게 겁깨나 주는 깡패가 되었을 수도 있을텐데(키가 크다고 하니), 그것도 아닙니다. 천상 왕따로 살아야 할 처집니다.

 

현재 주인공은 발레 강사(비슷한 것)입니다. 발레라고 하니 모르는 이들에게는 뭔가 있어 보이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라도 한다니 허울이야 좋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은 관련 학과를 졸업하기까지 헸습니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내면에 깊은 문제가 곪아 있는 모습이 여기서도 반복 재생산되는데요, 그녀는 발레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절망적인 몸치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에게도 엄청 타박만 받다 교육과정을 겨우겨우 마쳤습니다. 그럼 뭘 가르치느냐? 고용주인 원장이 다른 스케줄로 레슨을 못할 때, 기초 몸동작을 원생들에게 반복시키는 일입니다. 어차피 동네 영세 학원이라, 발레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이들이 적습니다. 말이 좋아 발레지, 관리를 안 해서 뒤룩뒤룩 찐 살을 빼러 오는 "다이어트반"의 관리입니다. 아무나 다 하는 비숙련 노동 비정규직에 가깝습니다.

 

왜 이렇게 암울한 인생이 되었을까요? 약간 스포일러성이지만, 리뷰에서 이 이야기를 안 하면 그건 직무유기에 가까울 만큼 중요요소라 어쩔 수 없네요. 모르긴 해도, 주인공이 아주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의 끔찍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이 내러티브의 의도 아닌가 합니다. 자기 책임으로(그 나이에 무슨 "자기 책임"이란 게 있겠습니까!) 조금도 돌릴 수 없는, 악한, 범죄자로 인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젊은 한 인생을 망쳐 놓은 거죠. 아마도 아이들이 그녀에게서 보았을 "재수없음"은, 그녀의 "주저함"이었겠고, 그 "주저함"이란 그 악몽에서 기인했을 텝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사람, 타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유아 시절의 그녀를 아파트 옥상에서 성폭행한 자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비열한 품성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자라면, 자기 인생이 자기 뜻대로 통제될 부분이 없는 정신 장애자이니, 차라리 동정을 느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는, 범행 한참 후 우리의 주인공과 다시 만납니다. 자전거를 타다 만난 그녀에게, 그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폭행을 가합니다. "너 이 나쁜 X, 다시 내 눈에 뜨이면 죽을 줄 알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놀라운 광경입니다.

 

사실 요즘 논란이 되는 화학적 거세니, 전자 발찌니 하는 것도 다 호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만큼은, 저기 북한이나 중화인민공화국 표준을 따라 법시행을 했으면 합니다. 얼굴 공개하고 대중들 사이에 시끄럽게 떠들어 봐야 소용 없습니다. 지금 누가 "고종석"에서 나주 여야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는 이가 있습니까(다들 글쓰기 선생님만 생각할 텐데)? 대중은 그저 냄비일 뿐입니다. 입으로 떠들 게 아니라, 법으로 그냥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주인공은 "왕따 유발성의" 우울함을 내면 특성으로 가지게 되었다....라면 그건 우리의 상식? 통념? 이런 것에 과히 어긋나는 바 없으므로, 차라리 편한 이해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번 더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덧입힙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격 자체가, 무언가 가해를 유발할 요인을, 그 성폭행 이전부터 안고 있었다는 은근한 암시입니다. 오해는 마시구요.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일부 있다"는 황당하고 사악한 논리가 아닙니다. 범죄자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취약함"에 끌립니다. 그 취약함이 이 범죄자의 공격에 의해 더 큰 상처로 자라면, 이번에는 "범죄자까지는 아니나 사악한 일반인들"이, 그 틈을 겨냥하여 공격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그토록 지탄해 마지 않는 범죄자들은, 알고 보니 똑같은 공격성과 가해적 성향을 지닌 일반인들의 선발대, 특수요원이었던 셈입니다.

 

주인공은 왜 발레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여자치고 남달리 큰 발, 그리고 그 발등에 돋아난 두툼한 뼈를 갖고 태어난 모습입니다. 이게 발레에는 천혜의 조건입니다. 발레 선생은 그녀의 그 발, 일반인들부터는 혐오의 대상이었을 그 발을 보고 반한 것입니다. 저런 발을 나도 가질 수만 있다면 영혼의 일부라도 팔겠어! 그러나 그런 발만 가지면 뭐하겠습니까. 몸 돌아가는 게, 균형 잡는 감각이 일반인보다도 못한데 말이죠. 그녀는 다시, 선망의 대상(거의 로또와도 같은 확률로 하나 걸렸던)에서, 다시 공인 왕따로 추락합니다.

 

인간은 본디 그렇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발이 발레에 최적화한 모습을 지닌 것이, 그녀가 전생에 남다른 공덕이라도 쌓아서였겠습니까? 뭔가 우물쭈물하고, 또래에 어울리지 못하고, 근거 없는 자만감으로 허황한 짓거리를 하다 표적이 되는 인생이 있다 해도,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과의 화해도 도모하기 힘듭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태어난 그녀들과 우리들"에 대한, 정직한 시선을 촉구, 각성하려는 작가의 마음이 짙게 배어나 있습니다.

 

극심한 경기 불황에 시달리는 요즘 세태가 배경으로, 사실적 설명을 통해 제시된 것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주변부만 떠도는 주인공의 처지와 인생에 대한 적절한 환기 혹은 메타포어 같기도 했습니다. 다만, 성폭행(두 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친척 오빠로부터의 성폭행이었습니다)과 왕따, 비정규직의 문제가 좀 작위적으로 결합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고, 전작과는 달리 도무지 밝은 면, 긍정적 분위기가 전무한 것도 갑갑함을 더하더군요. 희망적 색채를 띤 요소는 오로지 제목 "그랑 주떼" 하나뿐이었다고나 할까요. 내가 좀 조증이다 싶을 때 진정제로 처방하면 그냥 왓다일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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