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 우리가 몰랐던 신비한 땅이야기
민홍규 지음 / 글로세움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한 달 쯤 전에, 명장(名匠) 민홍규 선생의 억울한 사연이 담긴 책 <누가 국새를 삼켰는가>를 읽었습니다. 그 책은 저널리스트 조정진 씨의 시점에서 저술되었고, 서언과 마무리를 두 분 거물 변호사가 집필한 형식이었죠. 그 책에도 간간히 민홍규 씨의 인간적 면모가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대체로 그 책은 팩트에 치중하여 검찰의 논고에 대항하는 일종의 "답변서, 상소장" 형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지 않고서는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저 개인적으로도 신문 기사-민홍규씨 입장과는 정반대 시각에서 기술된-를 검색해 보고 나서야 책의 의도와 효용을 알게 되었죠).


이제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다시 살펴 보니, 어찌 보면 참 고지식하게 써 내려가신 책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형사사건의 당부, 유-무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피고인(혹은 그 상대방)의 "인간적 측면"에 치우치면, 객관적 시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위인이라고 해도 범법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고, 흉악한 이라고 해도 선행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안은 그 개별 사안의 진위, 당부를 놓고 판단해야 하지, 그 사안에 관련된 인물들의 품행에 먼저 시선이 가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범속한 이들은, 행위에 앞서서 사람을 먼저 판단하고, 편안한 공식에 따라 판단을 내립니다. "후광 효과"니 (반대로) "인신 공격"이니 하는 건 규칙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 규칙을 어김이 너무도 일상이 되다 보니, 잘 모르겠다 싶으면 바로 사람을 보고 판단을 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국새 ....>는 참 고지식하게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이 책 <터>에서는, 한평생을 예술, 기예의 연마에 바쳐 온, 명인 명장으로서의 민홍규 선생 그 인품과 깊이가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또 한, 전각 분야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서,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를 고이 떠받쳐 온 풍수 지리 사상, 또는 풍류도에 대한 저자의 심오한 깨달음, 그리고 이의 실천이 농도 깊게 드러나 있기도 했구요. 만약 이런 선생의 깊이 있는 인격과 정신 세계가, 일반 대중, (그리고 가상적으로 당시 그의 재판에 배심제라도 도입이 되었다면) 형사 재판을 앞둔 패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3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민홍규를 옹호, 신원하려는 책이었다면, 건조한 팩트보다는 이런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게 효과적이었을 텝니다. 다만 그 책은 팩트의 입증과 제시에 치중하느라, 대중서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적었지만) 상소장이나 소송 답변서 같은 인상을 준 게 사실이었죠.


저는 솔직히 말해, 지형과 산세, 이와 결합한 물과 바람과 기운의 배치 같은 것에 어떤 심오한 독자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큰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서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이 책을 두 번 읽고 나서도, 풍류도, 풍수 지리 사상에 대해 깊은 외경을 느끼게는 될지언정, 그에 대한 귀의(?)에의 욕구는 그리 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인간이 (그것이 아무리 전통 사상의 구전, 혹은 문헌적 전승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토록 총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체화하고, 대규모 사업의 모습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또 조상들이 이고 있었던 에의 그 푸른 하늘을 우러르는 처지에서, 헤아릴 수 없는 존경과 삼감의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 터"를 잘 다루면 자신과 후손의 사업과 진로가 평탄해지고, 운수의 트임이 유리해진다는 믿음, 이는 종래 전근대적 미신으로만 취급되어 온 게 사실이죠. 그러나 몇 주 전 민족 전체가 쇠고 난 명절에 지낸 차례, 그 상 차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동육서니 홍동백서니 하는 건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 우리가 이를 준수하는 걸까요? 사람이 어떤 일을 성사하려는 데 있어, "진인사 대천명", 혹은 성(誠)과 경(敬)의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는 게, 이런 절차적 예법에 다 녹아 있는 것입니다. 땅의 형세와 기운(추상적이긴 합니다만)에 맞게 집을 짓고 터를 고르라는 게, 어찌 과학과 반드시 상충된다고만 하겠습니까? 지극한 도(道)는 궁극에 가서 다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풍수 지리 역시 반드시 기복 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지극한 성의를 다하고 만전의 주의를 다 기울이는 한 방법으로 봄이 타당하겠습니다.


민 선생은 스스로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으니, 그 통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셨을 텝니다. 허나 그는 "이 역시 일차 책임이 있는 내가 땅을 잘 다루지 못한 탓이다"라고 스스로를 낮춥니다. 성인은 언제나 귀책을 자신에게서 찾는다고 했는데, 이 역시 그의 인격적 완숙도를 잘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위 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데, 민 선생 역시 그 질 나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수형 시설에서도 한결 같은 예우를 받았으니, 이 점에서도 의인은 빛을 발하는 거겠죠. 풍수 지리 사상, 그 현대적 표현과 발전의 가장 선명한 모습을 보려면 이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을 관심 깊게 읽으신 분은, <누가 국새를...>도 같이 읽어 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땅을 어떻게 잘못 다루었기에 정의와 명분의 질서가 이처럼 퇴색할 수 있는지 깊이 반성할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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