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인가 - 세계 최고의 예술대학,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의 크리에이티브 명강의
로잔느 서머슨 & 마라 L. 허마노 지음, 김준.우진하 옮김 / 브레인스토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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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왜 도덕인가, 같은 질문과는 달리, 누가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면, 그건 그리 한가(?)하지 않고 꽤나 심각한 질문으로 여겨집니다. "정의"나 "도덕"이 사소한 이슈라는 게 아니고요. 무엇이 "창의성"인지를 알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건, 앞으로, 아니, 이미 진즉부터,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기존에 정립된 지식과 기능을 열심히 익히고, 스승이나 명인 못지 않게 발휘하도록 반복 연습하는 건, "도제식 교육"이다 뭐다 해서 저 예전 봉건사회, 아니면 그의 안티체제로 등장한 산업사회 시절에나 통하던 덕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남들이 아무도 생각지 않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발상, 사물을 보는 눈을 갖춘 사람이라야 멋지고, 존경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다들 편하게 여기는 세상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것이 사회적으로 새로운 가치, 지향성인 양 자리 잡은 줄로 다들 아는 탓에, 창의력 없이 창의력스럽게 보이게 꾸미기만 하는 허위가 판치는 모습 역시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 와서 제 것처럼 꾸미는 얄팍한 사기인데, 이런 술책 역시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나서 "무엇이 정의인지"가 판명되기도 하지 싶습니다.

 

아무튼, 학교란 본디 기존의 지식 체계를 교습, 전수하는 곳임을 감안하면, "창의력을 가르치는 학교"란 그 자체로 큰 모순, 역설을 안고 있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배워서 습득될 수 있는 거라면 그게 과연 창의력일까요? 창의력은 설사, 좋은 스승을 만나 후천적으로 개량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타고난 바가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게 창의력이라 불릴 수 있지, 어떤 시스템 아래에서 훈련을 받는 일만으로는 과연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의력이 길러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더랬습니다.

 

여기, 아이들을 창의력 만땅의 인재로 키워 주는 학교가 있습니다. "아이들'이라곤 했지만 "줄리어드 스쿨"처럼 대학교 학부 과정에 상당하는 학교입니다. 한국에서 특별한 지명도를 지닌 줄리어드가 음악 분야의 세계적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이라면, 이 학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디자인 쪽의 적성을 적극 자극하여, 빼어난 미적 감각을 함양하고 실제로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에 그 교육 취지의 중점이 놓여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화가, 조각가, 의상 디자이너, 행위 예술가 정도로 진로가 정해지는가 보다." 같은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예 이 대학을 모르거나, 미대 진학을 염두에 둔 부모들 사이에서만 지명도가 있을 뿐이죠. 줄리어드 같은 곳은 음악과 전혀 연이 없는 이들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고 할까요. 이곳은, 물론 졸업한 후에 가장 좁은 의미의 전공을 잘 살려, 훌륭한 예술가로 진로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좁은 문"을 애써 통과하지 않는 이가 더 많습니다.

 

이 학교의 졸업생 중엔 로스쿨을 진학하여 변호사가 되는 이들도 있고, 영화 제작 분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으며, 정치인이나 철학자가 되는 경우도 종종 나옵니다. 특히 변호사(그것도 성공적인 커리어의)가 된 이는, "내가 학생 때 이 학교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 방안을 설계할 것인지 착상하는 능력이었다"고도 술회합니다. 어떻게, "미대를 나온 아이(한국식 개념으로라면 그 이상이 아니죠)"가 변호사로, 그것도 간신히 로스쿨 졸업장만 딴 채 변변한 개업 활동도 못하는 잉여인력이 아닌, 의뢰 사건이 폭주하는 일류 변호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해답은 창의력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깔끔하고 단정한, 정형화된 사례와는 달리, 학교 밖으로 나와서 직면하게 되는 세상은 혼란과 모순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그 속에서 질서와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예술의 정의가 본디 그것입니다. "숨어 있는, 감추어진 진 선 미를 찾아서 눈 앞에 보여 주는 것". 변호사의 일 역시, 혼동과 다툼, 갈등 속에 파묻힌 정의와 진실을 법정 앞에서 재구성하는 것 아닐지요? 이런 의미에서 심미안과 창의력은 서로 밀접히 통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다시 바꾸어 놓는 과정에, 이 능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창의력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정의하는 앞의 저 말에 다시 주목해 주십시오.

 

"창의력은, 규칙과 상상력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저 제 멋대로 늘어 놓고 난잡한 자의적 진술, 표현을 하는 게 창의력의 소산이 아니라는 걸 이 말은 여실히 가르쳐 줍니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소재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고기의 육질이 좋다 한들, 사람이라면 생으로 그 피 뚝뚝 떨어지는 살점에 입을 대고 뜯어 먹을 수 없습니다. 규칙을 염두에 두고, 그것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써서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든 후, 그에 대한 구속이 나의 프레임 일부를 형성함에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정도가 되어야, 그 머리에서 나온 상상이 진정 가치 있는 질료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의력은, 방종과 태만의 아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 질서라는 아버지의 잘 교육 받은 단정한 자제입니다. 어떤 학생은 그렇게 물었다고 하는군요. '미국 이민의 역사와, 내가 받으려는 미술 교육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아마도 이 질문에서, 이 학교의 커리가 대충 어떤 성격인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왜 이 학교에서, 정치인, 사회 운동가, 기업인, 법률가가 배출될 수 있었을까요? 답은, 미대에서 미술만 가르치지 않고, 인간 문명이 지금껏 일궈 온 그 모든 지혜와 요령, 기본 원리(이를 두고, 이 학교의 교수진은 "파운데이션"이라고 부른다 합니다)를 가르치며, 그를 바탕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성"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창의력은 자의(姿意)의 산물이 아닙니다. 가장 정직한 영혼이, 엄격한 규칙의 체스판 위에 정연히 펼치는 수(手)의 향연입니다. 저는 이 책의 교수진이 설명하는 "인재와 창의성"의 내용을 듣고(읽고), 마치 영화 <X-men>에서 (타고난) 초능력을 학생의 개성에 맞게 섬세히 전정(剪定)하는, 익재비어 교장 이래 그 빼어난, 마법의 교사, 교수의 강의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의 명문대 열 곳이 덤벼들어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이 작은 미술 학교의 저력 그 원천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는, 잘 아시다시피 미국 건국 선조들이 최초 정착한, 아주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그 이름도 "프로비던스", 신의 섭리와 통한 듯한 신성하고 경건한 느낌마저 주는 보통명사죠. 이런 곳에서, 세상의 어느 관습에도 속박되지 않을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 그 재기를 닦는다니, 참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학교의 저력은, 왜 합중국이 강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를 잘 지탱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미래는 인재의 힘에 달려 있으며, 그 인재의 힘을 구성하는 결정적 인자는 창의력입니다 어찌 미술에만 국한한 재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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