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경영 첫걸음, 한 장 보고서
정보근 지음 / 시간여행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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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엄청난 과업을 이룰 수 있는 단위가 바로 회사입니다. 어느 회사이든 능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여, 자기 조직 안에서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 애씁니다. 사원 역시, 조직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가장 크게 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그것이 내 머리 안에 머물러 있는 이상, 혹은 동료나 상사, 그 윗선에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이상, 그것은 회사에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소통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수단, 때로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보고서입니다.

 

이 책 제목은 <스피드 경영 첫걸음, 한 장 보고서>입니다. 삼성이 한국 내 1등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바로 최고 경영진의 스피디한 의사 결정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경쟁사의 액션에 대한 대응이 느리고, 바른 전략을 세웠다 해도 그 집행이 느렸던 sony의 경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처럼 그 막강한 자금력과 무수한 원천기술, 압도적인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과거에는 "스피드"가 독자적인 가치나 미덕이 아니었습니다만, 요즘에는 "그저 빠르기만 한 것"만으로도 칭찬받거나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경영에서 속도란 그만큼 중요합니다.

 

실제로 현대와 삼성에서 오랜 동안 기획과 설계 업무에 종사한 저자 정보근 씨의 이 책은, 이미 업무에 숙련되어 많은 양의 우수 보고서를 척척 작성하는 사원에게도, 혹은 갓 입사하여 서류 작성 업무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사원에게도 많은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1) 가장 모범적이고 깔끔하게 작성된 보고서의 예를 제시하여, 아직 개념이 잡히지 않은 사원들은 그냥 보고 따라만 해도 될 만큼 친절히,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 나온 일부 보고서는, "보고서 명예의 전당"에 올라도 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도 보입니다.

 

2) 보고서의 작성 방법 뿐 아니라, 회사에서 요구하고 윗선으로부터 칭찬 받는 기획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보고서 작성 실무에 주안이 놓여 있으므로, 기획의 방법론을 다룰 여유는 없습니다. 저자는 본격적인 기획 요령에 대해 알고 싶으면 자신의 다른 책을 참고하라고 합니다.

 

3) 이런 책은 뼈대만 앙상한, 팁 위주로만 짜여진 책 아닐까 하는 선입견도 부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읽어 보니, 2차 대전 당시 미국 측에서 내려졌던 오판, 1980년대 빈센스 항모가 저지른 판단 착오(이란 민항기 격추 사고) 같은 역사적 사례, 그리고 아마 저자 자신이 재직 시절 직접 경험했던 것으로 보이는, 회사 내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지곤 하는 몇몇 에피소드 들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결국 저자는, 평소부터 전략적, 전술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는 자세를 가져야, 요령 있고 조직 전체에 도움이 되는보고서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초 체력이 부실한 채 정력만 좋은 사람이 없듯이, 회사 생활의 기본이 안 되어 있으면서 보고서만 잘 쓰는 사람도 없다는 걸 은근히 가르쳐 주는 셈입니다.

 

4) 종이 질이 좋고, 참고 자료가 천연색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동료들과 윗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보고서를 쓰라면서, 정작 그 주장을 담은 책이 보기 불편하게 되어 있다면 그것 역시 모순이겠는데요. 이 책은 솔선수범이라도 하듯 깔끔한 편집이 돋보입니다.

 

5) 흔히 경영학 학부 커리에서 배울 게 별로 없다고도 합니다. 실무에 직접 쓰이는 것도 없고, 원론이나 인사관리에서 가르치는 건 결국 말의 성찬이고 깊이도 부족하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왜 자신이 남다른 업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왜 자꾸 승진에서 밀리는지 그 바른 원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이 책을  완독하고 느낀 건, 학교 다닐 때 배운 지식과 원칙들이,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보고서에 다 적용되고 요긴히 쓰이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경영학 교과서에서 배운 그 모든 개념들은, 그에 대해 자신이 주관적으로 어떤 평가를 하건 간에, 자신이 작성하고 윗선에서 읽을 보고서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도구로서 쓰이고, 요구되고 있습니다. 공부를 안 해서 적시 적소에 용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그건 다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결과로 돌아올 뿐입니다. 보고서를 상시 쓰면서도 채 잊고 있던 사실을, 이 책은 당사자에게 환기해 주고 있었습니다.

 

보고서 작성 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쓰는 나의 만족이 아니라 읽는 타인들의 효용을 먼저 염두에 두고 쓰여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미학적 쾌감이나 주관적 감상을 위한 게 아니라, 분초를 다투는 사업적 의사 결정의 토대를 이루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작성의 원칙은 첫째도 요령이고 둘째도 요령입니다. 한눈에 척 보고, 무슨 내용인지 어떤 의사 결정을 권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 책이 말하는 "한 줄 보고서"는 바로 이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보고서가 언제나 한 장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특히 민간 섹터 대기업에서 회람과 결재를 위해 돌고 도는 보고서는 볼륨이 클 수 없습니다. 빠른 의사 결정을 한다면서 장문의 보고서가 고집스레 오간다면, 이는 이미 의사 결정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한 장 보고서가 분명히 쓰일 용도가 따로 있고, 그 경우 그 한 장은 이러이러한 원칙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요지입니다. 소규모 기업에서 CEO 혼자 만기친람형으로 관리하는 환경에서는 보고서가 한 장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천안함 사건이나 재해 보고의 경우, 한 장 보고서가 상황에 맞지 않게 강요되다 빚은 여러 무리한 사고 중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취지는 요령 있고 효율적인 보고서의 작성이지만, 중간중간 저자 자신의 경영관에 대한 피력도 나와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진정한 혁신가였는가? 부품 업체의 혁신 등 주변 환경의 덕을 적지 않게 본 사례가 아닌가 하는 평가도 나옵니다. 현장 실무에서 잔뼈가 굵은 거장의 한 마디이기에, 괜한 질시를 담은 폄하가 아니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TF(태스크 포스)의 남발, 남설이 조직을 망친다는 충고도 쉬이 넘길 고언이 아닙니다. 얇은 볼륨에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알찬 내용이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 part 5를 보면 실무자 입장에서 입이 딱 벌어질 만합니다. 위로부터 사랑 받는 직원이 되는 비결이 여기 다 있었다고 하겠네요.

 

오타가 몇 있었습니다.

p32: 밑에서 세번째
쓰야 -> 써야

p64: 2 늦으도 -> 늦어도

p94: 밑에서 여덟 번째
자괴감을 마저 든다 -> 자괴감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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