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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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가 "통(通)"함은 예[古]와 지금[今]이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희망 가득한 말입니까? 만약 세상이 폭력과 사술만 판치는 곳이고,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는 정상배와, 아집 가득한 폭군이 두려움 없이 전횡할 뿐이라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정의를 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고"와 "금"을 통하는 "의"인지는, 보다 나아간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덕일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취한 단문 논평 여럿을 통해, 본인과 독자 모두에게 '의"가 과연 무엇인지 귀납적 탐구의 과제를 던지는 듯합니다. 그는 힘 있는 필치의 장문 논설에 능한 저술가이지만, 모 일간지에 장기간 칼럼을 연재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촌철살인의 단문에서도 그만의 컬러와 기량을 과시할 수 있는 재사입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의(義)"인지를 구명(究明)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소견이나 퍼뜩 떠오른 영감에만 의지하지 않고, 옛 문헌을 비교 검증하는 데에서 화제의 단초를 찾습니다. 그런 작은 발단에서, 어느 새 이런 거대한 결론과 박력 있는 비전이 도출 가능한가 싶게, 마주보는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칼럼은 어느 새 대용량 저서 한 권의 무게를 우리 독자의 정신에 올려 놓습니다. 이 비결은, 옛 문헌의 뜻[義]을 정확히 풀어 주는[解] 그의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판사, 검사의 과도한 권력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는 어느 책을 읽은 바 있지만, 저자는 조선 시대 법제에서 이 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 율(律)학은 무과보다도 품계가 낮은 잡과에 속했습니다. 품계가 낮은 하급 관리가 행하는 직분이니, 자의(恣意)가 개입하지 않고, 기계적 법 적용이 가능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조의 적용이 개인적 세계관이나 취향, 경향에 영향을 받기보다, 천편일률로 행해지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그의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과연 다른 부작용은 없을지 잠시 생각하게 되었네요.

 

이념이 난무하면 국력이 쇠한다. 효종의 죽음이 뭔가 의문스러운 사연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나올 만한 결론입니다. 필자는 북벌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고 여기고 있으며, 특히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이, 조선 측에서 동병(動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특히 현 중국 당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북 공정이, 벌써 이 청대부터의 침략적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보고, 강한 민족주의적 각성으로 이에 대처해야 한다고 책의 여러 파트에서 반복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동북아 일대에 널리 뻗쳐 있었던 대제국의 흔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일정 강역에 분포하면, 동일 정치 체제의 통치 시스템 존재의 증거라고 보는 게 상식인데,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의 판도가 한정되었다고 보는 고정관념(저자의 입장대로라면, 이는 식민 강단 사학의 잔재지요) 때문에 뻔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입장이라면 대동강 일대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두고서조차 논리적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저는 후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저자의 입장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는 기록자의 왜곡과 정치적 입장이 언제나 개입한다는 씁쓸한 확인이, 송첸캄포를 다룬 <唐史>에도 나온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실제의 팩트는 토번의 승승장구와 이세민의 비굴한 회유에 불과한데, 사서의 기록은 정반대로 열심히 중화의 영예와 승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서남 공정"이라는 중국 측의 부단하고 집요한 정책으로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동북 공정"으로 동병 상련을 겪고 있는 우리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비장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진보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논객답게, 아마 남녀 평등을 주창하는 인사들과 잦은 교류가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상당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이들이 지닌 명함을 보면 다성(多姓) 표기가 많죠. 모계 쪽 성(姓)을 병기하는 이런 관행은 그러나 큰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말입니다. 왜냐 하면, 모친의 성 역시 부계 혈통의 대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운동의 본의마저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저자는 은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칼럼에서 저자는 오히려 다른 쪽의 결론으로 내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남녀 평등의 관념을 강하게 유지하여 왔으며, 모여성의 성이 결혼 후에도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남편을 따르지 않고 제 부친의 것을 유지한 본의는, 양 집안의 대등한 결합 사실을 강력하게 상징하려는 데 있었다고까지 합니다. 양반 가에서 정실 부인은, 언제나 남편에 대해 당당하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성(多姓) 표기는 이런 관점에서라면 그 타당성 여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간회 초대 책임자를 지낸 이상재 선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여럿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고 굳건한 지조를 지녔다고 해도,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월남 선생이 택한 방법은 해학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몇몇 일화는 그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는 너무도 잘 대비되는 익살이라 재미있고, 한편으로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눈물이 고이는 비애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놓고 모인 단문이니 지루할 틈이 없고, 짧은 분량 속에서 할 말은 다 해 놓고 토픽의 완결성도 잃지 않는 그의 솜씨에 경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형식적 치장에 구애 받음 없이 본연의 주제의식과 명분은 언제나 찔러 두고 가는 그이기에, 독자는 편안함과 도덕적 만족을 동시에 맛보게 됩니다. 이런 칼럼이 역사라는 큰 줄기에서 언제나 일정 거리 밖으로 논점을 이탈하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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