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5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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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참 이름만으로도 괴기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먼 동양 땅에 살고 있는 독자라고 해도, 드라큘라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까지도 이 이름은 익숙합니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뱀파이어"처럼 보통명사로 받아들여지곤 하죠. 창백한 얼굴, 날카로운 송곳니, 커다란 망토에 붉은 칼라 따위의 이미지는, 루마니아나 (브램 스토커의 고향인) 영국, (장르 영화와 고전물의 본산인) 미국 외에서도, 맥도널드 햄버거나 코카 콜라 이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통용되는 "언어, 기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전이 보통 겪는 운명처럼, 잘 알고 있고 벌써 여러 차례 읽어 내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진상을 알고 보면 거의 바른 지식이 없고, 책을 들춰 보면 처음 대하는텍스트나 마찬가지란 거죠. 이 작품처럼 확고한 고전의 위치를 점함과 동시에, 그 모든 장르 소설의 부모격이자 타 장르 예술의 영감 원천이 된 경우라면, 그 뜻밖의 생경함이 더합니다. "이게 이런 소설이었어?"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 많은 상징과 상상력의 원천이 이미 그 오랜 텍스트 안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놀라움을, 이후에 나온 그 무수한 아류작의 모태가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경이감을, 독자에게 아낌 없이 선사한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류작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 오리지널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카피캣이었음을 깨닫는 충격도, 오로지 고전만이 선사할 수 있는 근사한 각성입니다.

 

고전이 고전인 또하나의 이유는, 그 창조해낸 세계의 완벽하다 할 자체 완결성입니다.  이 1권을 보십시오. 흡혈귀 드라큘라라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사건만 재미있게 전달하면 될 것을(현대의 2류 장르물은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굳이 번잡한 디테일을 빈틈없이 마련해서 자격 없는 독자를 다소 피곤하게 만듭니다. 영국의 특정 지방(영지)이 "카트르 파스(처음에 저는 赦免 같은 걸 떠올렸는데, 불어 단어 원형이 뭘까 곰곰 생각하니 四面이더군요. Quatre Face)"인지 뭔지, 그저 장르물에 길들여진 독자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브램 스토커는 꼼꼼하고 자상하며, 때로는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필치로, 텍스트 안에서 빠져 나갈 구멍 없는 완벽한 별세계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장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대개 평면적인 성격입니다. 하지만 이 고전(그리고 그 모든 판타지, 괴기물의 원조)에 등장하는 이들의 성격상 평면성은 그리 역겹거나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플롯과 분위기, 스타일,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드라큘라의 개성(과 매력)이 워낙에 강렬하기에, 반 헬싱, 조나선 하커, 미나 등의 전사(戰士)들도, 다른 데 눈을 주지 않는 성실성과 일관됨으로 무장해야만 할 필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고아한 인격과, 어디 한 구석 빠질 데 없는 건전한 시민성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런 비현실적 도덕성이야말로 모든 악의 화신인 백작과 맞서 싸울 유일한 무기요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납득할 만한 이유 때문에 공권력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이런 대목 역시 이후 무수히 쏟아져 나온 후배 장르물이 모조리 따르다시피 하는 공식이죠. "지구는 그들 소수의 선량한 시민이 지켜 내었다!"

 

타인과, 심지어 자신으로부터 그 남성성의 순도를 끊임 없이 의심 받았던 브램 스토커는, 과연 그런 시선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 소설의 아름답게 짜여진, 역대 최고라 부를 만한 서두에서 조나선 하커의 (기념비적) 감금 씬(!)을 펼쳐 냅니다. 조나선 하커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흠 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입니다. 감금을 당해도 이런 사람이 감금을 당해야, 독자나 관객이 짜릿짜릿한 흥분을 느끼죠. 늙은 백작은 어이 없는 노골성으로 그를 위협하며, 그 주변에는 치명적이고 불길한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또다른 정체 모를 여인들(...)이 배회합니다. 이 공포와 절망으로 지레 삶을 포기할 만한 상황에서, 젊은 변호사는 차라리 자기 자신(지레 포기하려는)과의 혈투에 진을 다 빼다, 모종의 결단을 암시만 한 채로 일기를 일단 마무리합니다. 과연 귀추가 어찌 번져 갔는지는 몇십 장을 한참 넘겨야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건이 모두 등장인물 자신의 1인칭 시점으로 설명되고 있기에, 이 작품은 요즘 말하는 "모큐멘터리" 기법을 선구적으로 채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긴, 빅토리아 시대 책임 있는 작가가, 어찌 그윽하고 불순한 판타지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무슨 의도였건 간에, 이 작품은 내용이나 형식 모두 현대의 관점에서조차 gorgeous합니다.

 

가장 착하고 상처에 취약할 것 같은 성격의 루시가, 이 가공할 에일리언에게 희생된 최초의 제물임이 밝혀지고, 정의롭고 선량한 주인공들이 당장 취해야 할 결단이 무엇인지도 곧바로 드러나자, 캐릭터들 못지 않게 독자 역시 경악하게 됩니다. 때묻지 않고 정직한 심성을 고스란히 가진 선남선녀, 그리고 이들을 리드하는 박식한 현자로 이뤄진 "팀 구성" 역시, 이 <드라큘라>가 거의 원조라 할 만큼 그 프로토타입을 제대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아주 적절한 대목에서 1부가 끊어지는 열린책들 편집진과 역자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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