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법 - 상 - 제6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대상 수상작
야마다 무네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애플북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정신,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본질 중 하나는 욕구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욕구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오래 살고 싶은 욕구, 불멸을 지향하는 욕구만 하겠습니까? 충족될 수 없는, 아니, 그래야 만 할, 갈망, 희구가 충족되는 그 순간, 인간은 바로 신(神)이 되거나, 아니면 바로 파멸할지 모릅니다. 인간의 정신은 불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의 불멸 뿐 아니라, 타자의 불멸, 혹은 추상으로서의 불멸도 감당할 수 없어 종교에 열광하는 게 인간입니다.  

 

단 한 명의 개체라도 불멸의 혜택을 입는 순간, 인간 사회가 애써 가꿔 왔던 윤리, 도덕, 예술적 가치, 정치 제도는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불멸을 관장하는 그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제 터전이 초토화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입니다. 모두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는 바로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 중에서 누군가는 영원히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면, 그 선택된 자의 특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모두가 같이 죽는 길을 걷자고 들 것입니다. 불멸은 바로 즉시 파멸을 부른다는 역설이 눈 앞에 뻔히 드러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혁명적인 의학 기술이 고안되기보다, 차라리 그런 감당 못할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사회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그리고 더 까다롭다는 사실)은, 이 인간 불멸의 시술(소설에서 HAVI라고 설정된)이란 게 까마아득한 공상의 세계에나 소속되어야 함을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과학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성숙 문제, 사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HAVI의 본체는 사실 불멸불사의 레시피가 아니라, 불로(不老)의 시술입니다. 물론 후자가 더 좋은 것입니다(쭈그렁바가지로 천 년을 산들 그게 뭐가 부럽겠습니까).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을 당하거나, 아니면 국가 기관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거나 해서, 인간들은 목숨을 "여전히" 잃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가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 정말로 끔찍해."라고 말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약간 일관성을 결여한 미장센이자 자리를 잘못 잡은 클리셰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그런 회오(悔悟)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스탠 리(혹은 제임스 맨골드)의 "울버린"의 입에서 나오기에나 어울리죠. 

 

그저 현생 인류가 지니고 있는 일상 수준의 주의력만 유지해도 영원한 청춘("청춘"이라는 단어도 이미 오래 전에 死語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정도 등장합니다)이 가능하다니, 그보다 훨씬 하잘것없는 가치를 놓고도 목숨을 거는 인류의 원시성에 비추어 보면, 고작 법안의 효력 발생 여부를 두고 "정상적인 수준의 여론 충돌"을 보인다거나, 지극히 국지적 수준에서 제도에 대한 개별적 도전을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이 차라리 우습게 보입니다. 그 정도면 얌전한 것입니다. ID의 소비행위, 계좌 관리, 소속 직장 배당 등의 통제 장치가 있지 않느냐고요? 그 시스템은 누가 장악하고 있나요? 고위 정치인, 행정 관료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양순한 일본인"들만 사는 사회라야 이 모든 상황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지니고 다가옵니다. 

 

영원히 늙지 않고 20대의 미모를 유지하는 건 좋은데, 정신도 성숙하지 못한다는 게 큰 함정입니다(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의학적 미스테리라고 하네요). 해서, 가족이라는 게 또 의미를 못 가집니다. 영속적인 배우자 관계를 맺는다든가, 2세를 낳는다든가 하는 게, 알고 보면 다 "나"란 존재의 사멸을 가정하고 벌이는 일종의 안전 장치였으니(정말요?), 이제 영원한 청춘(낡은 유행어입니다)을 얻은 지금, 결혼과 이혼은 밥 먹듯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패밀리 리셋"이라는 제도적 장치도 등장하네요. 아직 그래도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책임은 있는지, 스무 살 정도까지만 같이 살다가 이후 헤어져서 수십 년 동안이나 생사도 모르고 지내기 일쑤입니다. 늙지 않는 양친과 같이 살면 서로의 자유로운 생활을 서로가 방해할 뿐 아니라, 여태 인류가 채 알지 못하던 다른 종류의 온갖 불편이 끼어들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성년기 이후 부모와 떨어져 소식이 뜸해진 채 살거나, 그 부모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전혀 다른 생을 시작하거나 하는 모습은, 서구에서는 지금도 흔히 보는 일입니다. 개인주의적 삶을 보다 지향하거나, 자신의 잘 관리된 외모에 자신이 있다거나 하는 개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HAVI 따위의 도움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인간, 아니 괴물들(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엡실론 분자들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엡실론들은 늙습니다. 늙기도 하는 주제에 아무 불평 불만 없이 사회 최하층 노동 공급을 담당하며 말초적 쾌락에 탐닉한 채 소모품으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합니다)은, "유니온"이라는 시스템에 등록되어 실직에의 위험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유니온의 지침에 따라 직장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러면 자생적 노조(레이버 유니온)의 결성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고, 생산 설비로부터 노동자를 철저히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더없이 좋은 통제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런 단조로운 삶, 아무 지향성이나 성취 가치 없는 삶이 환영을 받을 리 없지만, "영원한 청춘"이라는 닽콤한 당근이 그 모든 아쉬움을 잊게 해 줍니다. 결국, 피지배계층은 영원히 그 바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치가 생기는 셈입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에서 불로의 시술보다, 이 사회제도적 장치에 대해 더 큰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물론 HAVI라는 반대급부가 없으면 유지가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말이죠.  

 

똑같이 늙지 않는 인생이라고 해도, 상류층과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기존 가족 관계가 더욱 공고화됩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정략 결혼이 확고히 자리잡고, 장래 유권자 앞에 나서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은 불로 시술을 비교적 늦게 받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관록이 잡힌 외모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네요. 위에서는 전통적 컨벤션이 완결성을 더해가며, 반대로 아래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감각적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회, 사실은 바로 지금 우리들이 수렴해 가고 있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로 봐도 되는 모습들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 소설입니다. SF라기보다 말입니다.

 

하권 리뷰에서, 이 소설의 "백년법"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적어 볼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