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 레터 - 인류를 핵전쟁에서 구해낸 43통의 편지
제임스 G. 블라이트.재닛 M. 랭 지음, 박수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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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레터가 뭐야?


길을 걷다가 느닷 위에서 떨어진 철근 덩어리를 간신히 피했습니다. 자칫 맞기라도 했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 발휘한 반사 신경의 덕에 생명을 건진 것인데요(아니면, 그냥 당시 운이 좋았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심각한 체험을 하고서도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위기를 모면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혹시 술자리에서라도 생각이 나면, "아,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녀석이냐면..." 같은 무용담의 소재로나 쓰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그저 예사롭게 넘겨선 안 됩니다. 그런 위험이 또다시 닥쳤을 (확률적으로는 낮겠지만) 때, 한 번 더 운이 좋으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위험한 건조물이 있는 곳을 피해 다닌다든가 해서, 그런 위험이 신체에 그토록 근접할 수 있는 경로를 원천 차단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런 장치를 알고리즘적으로 마련하고 나서 나머지 일상을 영위해도 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생명이나 안전 문제도 이처럼 중요한데, 하물며 이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인류 전체의 생존 문제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것을 빨리 폐기처분하거나, 확실한 안전 관리 기제를 마련하여 위험이 현실화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인류가 핵무기를 끝장내지 않으면,

핵무기가 인류를 끝장낼 것이다."


1962년 10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벌어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던 미국, 소련 두 나라가, 전 지구의 생존을 담보로 걸고 일촉즉발의 치킨 게임을 벌이며, 서로 상대의 퇴각만을 요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자칫 오판을 하거나,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환각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한다든가, 그저 실수로 버튼을 잘못 누른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그래서 상대방의 세력권 한 구석에 용량이 작은 핵무기 한 발이라도 떨어트린다면, 상대는 바로 보복 대응에 나설 것입니다. 단 한 발이 떨어져도 수십 발의 난타가 오갈 것이며, 결국 지구 육지의 상당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파국적인 결과를 피해야 합니다. 1962년 미국, 소련, 그리고 쿠바의 최고 지도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한 발씩 양보하여 최악의 결과를 일단은 피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 세기 전의 일입니다. 이제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 안심해도 될까요? 절대 아니죠, 이 책 뒤에 나와 있는 카스트로 당시 쿠바 최고 지도자의 표현에 의하면, "(엄지와 검지를 서로 붙이듯 하며) 핵전쟁이 이만큼이나 가까이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합니다. 우리 인류는 "그때 멸종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이 주는 청량감을 만끽하는 우리들 중, 상당수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거나, 신체 기형의 끔찍한 비운을 겪거나, 지독히 춥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위기를, 그저 간신히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사건 이후 양국 정상 사이에는 핫-라인(직통전화)이 설치되고, 비정기적이나마 군축 회담이 열렸으며,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에는 핵무기의 상당 부분이 해체, 감출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두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성적이고 온건한 방향으로 얼마든지 생각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도자, 정치인의 양식에만 기댈 수는 없습니다. 이 책 서두를 보십시오. "케네디, 흐루쇼프, 카스트로 모두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111페이지를 보십시오. "이들 세 사람이 환상을 갖지만 않았더라도...." 카스트로는 소련이 끝까지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흐루쇼프는 쿠바가 결국은 엄청난 화력을 지닌 미국의 코앞에 자국이 위치했다는 현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케네디는 미국이 세게만 나가면 소련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 발 빼고 말 것이라고, 각기 다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세 사람, 아니 최소한 케네디와 흐루쇼프 두 사람은, 자국의 강경파에 비해선 상당히 온건한 편에 속하는 성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두 나라 사이의 열핵전쟁(hot nuclear war)로 인해, 인류 전체가 공멸할 상황까지 진행되었던 거죠. 지도자 개인의 양식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오작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들 개인개인이 각성을 해야 합니다. 대중이 깨어 있으면, 지도자들도 함부로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상을 사는 우리 모두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마겟돈 레터(정확하게는 "레터즈", 즉 복수형태입니다) 프로젝트가 되겠습니다. 최근에 미국 정부 문서가 극비 처리 시한을 넘겨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케네디가 흐루쇼프에 보낸 친서, 흐루쇼프가 특유의 그 격정적 어조로 케네디에 보낸 서한 등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문서 공개를 통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 때 그 시점의 위기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중대한 위기가 다시는 사람들을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지 못 하게, 어떤 행동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 한 권만으로는 그 영향력이 부족합니다. 간단한 UCC도 만들어 배포, 공유하고, 연극도 짜서 공연하고, 단편 영화도 제작하고, 이 모든 노력을 통해 이웃에게, 대중에게 끊임 없이 환기시키는 겁니다. 주최자들은 이것을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라고도 부릅니다. 미디어의 경계를 초월하여,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미디엄, 미디어)을 동원하여, 일깨우고 외치고 또 생각나게 만드는 대규모 운동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정보는 이 사이트(www.armageddonletters.com)에 가 보시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책은 뭐야?


이 책은 저 사이트에 실려 있는, 다양한 미디어로 표현된 작품과 문헌, 자료 중에서도, ⓐ그래픽 노블의 일부, ⓑ기밀해제된 문서(1차 사료), ⓒ3인의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희곡 등을 담은 포맷입니다. 따라서 책만 놓고 보자면, "트랜스 장르"의 컨셉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1) 완성도 높은 그래픽 노블의 몇 컷을 통해, 반 세기 전 우리 인류가 어느 정도 심각한 위기까지 갔는지를 직관적으로 일깨워 주고, 2) 이 모든 외침과 결론이 공연한 호들갑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차 사료를 원문 그대로 제시하며 확고한 근거 기능을 하게 하며, 3) 3인이 한 자리에 모였을 상황을 가정하여,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의지와 개성의 대립이 이런 위기를 초래했는지를 환기하기 위한  문학적, 예능적 상황 재구성을 시도했다 하겠습니다.



서막: 몽유병 환자의 걸음

제 1막 : 충돌

시발은 1959년, 독재자 바티스타가 미국의 검은 돈을 끌여들여 형성한 매판 자본이 지배하던 쿠바에서, 30대에 불과했던 무장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정확히 1월 1일에 공산 혁명에 성공했던 사건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미국의 핵심이익이 침해될 바가 없었으나, 전 재산을 날리고 결좌적으로 미국 본토 투자자에게까지 피해를 입힌 쿠바 망명자들이, 2년 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본토 재진입, 정권 탈환을 시도한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 차원의 개입과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당시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가 최종 결정권자였는데, 그 계획의 구체적 실현이 1961년 4월 17일이었고, 대통령에 취임한 지 3개월이 될까말까한 케네디가 작전 집행 싸인을 (내키지 않게) 했던 데서 비롯됐습니다.


책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 케네디가 "이 어리석은 작전"을 결국 승인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케네디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흐루쇼프 소련 최고지도자는 크게 안도하는데, 강경 매파인 닉슨이 미국의 정권을 잡는 것보다는 자국 소련에 크게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례적으로 케네디애게 축하 서신을 보내며, 이에 대한 케네디의 답신은 매우 짧고 사무적입니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1961년 4월의 침공(소위 피그 만 사건)을 격퇴하고 일단 한숨을 돌리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무함을 알게 됩니다. 당연히 자구책을 마련할 생각이 들었으며. 그 결과가 소련에 대한 군사 원조 요청입니다. 흐루쇼프는 카스트로의 이 요구(그 유명한 체 게바라가 특사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습니다)가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으나, 케네디의 성향으로 보아 자국의 이익을 걸고 한번 해 볼 만한 도박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케네디는 1962년, 쿠바에 정체 불명의 군사 시설이 세워지고 있고, 소련의 전문가 수천 명이 상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흐루쇼프는 1년 전 케네디에 보낸 편지에서 이에 대해 강한 부인성 언질을 준 바 있는데, 그것이 거의 거짓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한편, 카스트로는 연일 강경한 어조로 미국을 비난하고 나섭니다. 이를 바라보는 소련 측의 태도는, 강경파는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흐루쇼프만은 걱정스러운 기색입니다. 머뭇거리는 흐루쇼프를 향해 카스트로는 "우리 쿠바인은 수동적인 동독, 체코인과 절대 다르다.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들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라며 그 미온적 태도를 맹비난합니다.



제 2막 : 소용돌이

제 3막 : 탈출

제 4막 : 쥐어짜기



카리브해를 경유하여 쿠바에 들어가려는 소련 선박을, 케네디는 저지하려고 합니다. "검역"을 하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범죄 혐의가 외관상 명백한 것도 아니고, 미국의 영해도 아닌 곳에서, 다른 나라의 배를 강제 수색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흐루쇼프는 이를 "해적행위"라 비난하면서도 다시 친서를 통해 케네디를 달래고, 설득하려 애씁니다. #18로 넘버링된 이 흐루쇼프의 편지를 두고, 편집진(그리고 흐루쇼프 본인으로 설정된 캐릭터)의 평가는 "두서없다"였는데, 제가 보기엔 케네디의 심중까지 미리 헤아리면서도 가능한 한 최대의 동의를 이끌어 내려는 대단한 능변, 명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케네디의 답신 역시, 외교적 표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 주는, 정치(精緻)하고 함축적인 공문서 문장, 구성의 표본과도 같았네요.


흐루쇼프는 UN 총회장에서 불만을 표현할 때 구두 한 짝을 벗어들고 마구 내리쳤다는 충격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위 그림 아래 왼쪽의 모습과, 다음 사진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는 조작된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 시절에도 소위 "합성"이 있었다니 좀 놀랍습니다




책 중 케네디의 모습. 선천적 자부심과 상황적 불만감이 동시에 잘 표현된 컷입니다.




이 사태에서 결국 상황을 리드해 나간 건 흐루쇼프였습니다. 책에서는 "카스트로의 양아버지"로 묘사되는 대목도 있는데, 사실 그는 케네디에게도 거의 아버지뻘 나이였죠.



묘한 것은 둘 다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고,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둘을 끌어내린(한 사람은 흉탄에 의해 저승으로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연금되어 어쨌든 물질적으로는 불편 없이 여생을 마쳤다는 게 다르지만) 건 강경파였습니다. 세계는 파국을 면했지만, 그들은 각기 자기 조국에서 정치적 패배자가 되었고, 반면 이 무대에서 가장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보인 카스트로는 지금까지도 사실상 자국에서 최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케네디는 핵전쟁 발발의 위기가 목전에 닥치자. 아직 5살이 채 안 된 딸 캐롤라인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내일 이 아이가 맑은 공기와 다사로운 햇살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여튼 전쟁광, 도살자의 마인드가 아닌, 그나마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이들이 권좌에 있었기에, 그 캐롤라인은 내일, 모레, 그리고 반 세기 넘게 이어진 지구의 공전 주기를 다 겪으며 현재 주일 대사직에 부임해 있습니다.


캐롤라인 케네디 현 주일대사, 미코얀 당시 소련 제 1 부수상


위에서 느닷 낙하하는 물체의 위험은, 공사 현장 노동자나 감독자의 잘못일 수도 있고, 감독 관청의 직무 태만 소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핵전쟁의 위험은, 최소한의 양식과 인내만 있으면, 거창한 기술적 혁신이나 전면적 리빌딩 없이도 그 방지가 가능한 성격입니다. 상대의 양보를 받아낼 때까지 무모한 돌진을 하겠다는 미련한 호승심만 버려도, 자신 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공존 공영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책은 정말 생생한 묘사와 자극을 통해, 우리에게 다름 아닌 행동을 촉구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공군에 오래 몸담았던 경력의 박수민 선생 번역입니다. 해당 계통에 종사한 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정확한 용어 번역이 돋보였고(예: counter-threat를 "위협 대응"으로 옮김), 의미가 분명히 와 닿는 정돈된 문장이 일품이었습니다. 다만 예컨대 p180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서, "미국이" 앞에 전체 주어 "우리 소련은" 정도가 들어갔으면, 오해의 여지가 줄어들 것입니다(잘못 읽으면 흐루쇼프가 미국을 맹비난하는 걸로 들립니다. 여기서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필사적으로 달래고 있으므로 그런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오타 몇 군데를 지적하자면,

p135: 1   흐루쇼프도 → 흐루쇼프도

p203: 밑에서 세번째 제국주의를 → 제국주의를

p273 : 6  나데즈 → 나데즈다  (러시아식 이름에는 "나데즈나"라는 게 없습니다. 또, 이 검은 눈동자와 흑발을 한 유능한 여성 속기사- 집시를 연상시킨다는- 의 바른 이름은 책 여러 군데에서 나옵니다)

p237 밑에서 다섯번째 터 →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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