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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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적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눈길을 돌려 과거를 바라본다."


이것은 이 책 뒤표지에 나와 있는데요, 출처는 니체라고 합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줄은 미처 몰랐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과거"로부터 눈길을 돌려서, ⒝ 과거를 바라보는 게, ⒞ 꼭 낭만주의적 예술가라야 가능한 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낭만주의적 예술가가 언제나 그렇게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니체의 위대한 사상적 편린은 둘째 치고라도, 한 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면, 들어서 마음이 엄청 설레는 말도 아닙니다. 현세적 성공을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가는 우리들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밀로시 우르반의 이 작품은 보통 "고딕 미스테리"의 범주에 넣습니다. 사실 제가 읽기로는, 몇몇 소름끼치는 장면 묘사라든가, 등장 인물이 약간 상궤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든가, 작가가 그렇게나 의식하는 것처럼 배경을 체코 고(古)건물로 삼고 있다거나 하는 점 외에, 딱히 저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소속을 무엇으로 잡든 간에, 단단하고 치밀하고 에피소드가 풍성하며 재미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고딕 미스테리"의 핵심은 여튼 낭만주의입니다. 회고적 분위기 속에 현실의 제약을 무시한다는 게 낭만주의의 핵심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퍼스트네임을 "크베토슬라프"라고 씁니다. 이름이 저렇게 무신경(왜 그런지는 책에서 찾아 보세요)하기 지어진 이유는, 그의 부모가 이 사람의 양육에 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어서입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현실이 괴로웠던 부적응자였고, 커서도 루저로서 일생을 연명해 갑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영웅적으로 멋지게 죽는 순간을 잡기 위해(진짜 죽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경찰직을 택하지만, 광신도들이나 진짜 영웅처럼 "무엇을 위해" 죽을지에 대해선 전혀 개념이 업습니다. 어쩌면, "잘못 태어난" 인생에 대한 회의, 리셋 본능으로 내세를 지향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의 관심사는 온통 과거 역사를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분위기도 그렇고, 주인공의 컬러도 그렇고, 우리가 낭만주의 하면 퍼뜩 떠오르는 바이런 경 식의 비비드한 낭만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습니다. 하긴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 세계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그 모든 비관적 묘사를 위상기하학적으로 비틀면 완전한 이상향이 나온다는 짖궂은 낙관주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죠.


애초에 경찰직을 특별한 소명 의식으로 시작하질 않았으니, 그 업무인들 제대로 행할 리 없습니다. 펜델마노바라는 이름의(물론 펜델만이라는 남자의 배우자겠죠) 어느 부인에게 "무슨 경찰이 사격 연습 같은 건 하지 않고 역사 공부에만 몰두한담?"하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얼빠진 주인공은 그저 맞다고 웃어 줄 뿐입니다. 근데 우연인지 필연인지(결말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런 크베토슬라프, 혹은 K가 직무 중인 그날 하필, 이 부인은 경위가 대단히 미심쩍은 살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작품의 사건은 일단이 변사를 시발로 전개되고, 넉 달 뒤 벌어진 더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맞물려 더 파장이 커지는 식입니다.


살인이든 뭐든 이렇게 매사에 미적지근한 낙오자 유형이, 가장 활기 있고 명철하며 신체적으로도 강인해야 할 탐정 노릇을 제대로 할 리가 없죠, 그에게는 따라서 "의외의 의뢰인"의 출현이 필요합니다. 다소 신원이 의심스럽기는 하나, 엄청난 재산과 거대한 신체적 골격을 가진 "백작" 그뮈드, 그리고 진실로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종(광대?) 난쟁이 프록슬린이, 생의 의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몽상가 크베토슬라프의 동기유발자입니다. 어려서부터 크베토슬라프, K의 장점을 분명히 봐 준 사람은  단 둘 뿐이었는데, 고등학교 역사선생(딸보다 어린 학생과 결혼하여 퇴직한),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백작 뿐입니다.


K의 장점이 무엇인가. 저 위의 니체의 말을 다시 보십시오, 과거를 바라보긴 바라보되, 마치 영화를 보듯, 혹은 다차원의 존재 패턴을 갖고 있어 타임리핑이나 하듯 지나간 과거의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장점입니다. 이게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 같은 건 아니구요, 그만의 병적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능력, 과거 역사에 대해 "문서의 출전 제시" 같은 기계적 수월성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과 시대를 사는 참여자의 느낌으로 두 세계를 이어 주는 능력이, "괴백작과 그의 미친 광대"에게 매우 요긴한 수완이라는 사실입니다. 끔짝한 살인 사건도 해결해야 하고, 동시에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저 백작의 계획도 만족되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을 꿍꿍이에 품고 있으며, 잔혹한 범죄의 진상은 무엇일까요?


대담하게도 간단한 조작으로 경찰서장의 전화를 도청하는가 하면, 제 고용주의 표현 중 시제를 정정(현재르 과거로)해 주기도 하는 섬세한 언어 감각(이 정정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누구로 보고 있는지, 혹은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입니다)을 지닌 난쟁이는, 거대한 체격과 위압적인 용모를 한 제 주인인 백작과 여러 모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괴기스러움은, 현대인들로부터 대숙청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고딕 양식의 그 오랜 건축물들의 묘사와 함께, 소설의 분위기에 형식적 "고딕스러움"을 더합니다. 분위기만 그럴 뿐 아니라. 실제로 이 3인은 고딕 예찬론자입니다. "바로크 같은 썩은 야만 풍습이, 순수하고 장엄하며 자기 주장이 뚜렷했던(그러나 제 주제를 넘지도 않았던) 고딕을 말살하려 들다니!" 하며 붅개하는 모습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K는 사회적 낙오자라서 현재를 부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지만, 이 당당한 체구의 "지배자" 그뮈드는 대체 무엇 때문에 환각적 과거를 낙오자와 장애인과 공유하려 드는 것일까?


소설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체코 현대사를 좀 알아야 합니다. 체코는 종교 개혁의 불길이 본격 번지기도 전에, 후스라는 선구자를 맞이해서 가톨릭의 억압 기제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려 했던 대단한 자유주의의 선구였습니다(이 소설에서 재밌는 부분은,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후스를 어리석은 광신도로 폄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경과 속에서도(한참 뒤 벌어진 30년 전쟁도 그 시발은 보헤미아였죠) 정작 체코만은 종교의 자유를 찾지 못하고, 국민의 절대 다수는 무려 1차 대전 종전까지 합스부르크적 카톨릭의 믿음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자취가 바로 이 작품의 소재인 Sedmikostel, 일곱 성당입니다. 주인공 K와 출세주의자 경사 유젝, 죽은 펜델마노바, 그리고 그뮈드 등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 격변과 파란 많은 역사의 희생자들인데, 사회의 지배층이 하루 아침에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몰락하는 일을 반 세기만에 두 번 겪은 것도 체코 외에는 드뭅니다. 그리고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관된 영지이자 핵심 봉토였지만, 그 거주자들(평민)은 언제나 식민지 노예의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는데, 체코 출신 귀족이라는(나중에 덴마크 귀족 가문과도 연을 맺었다는) 그뮈드 가의 내력이 이 복잡한 역사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유럽 배낭 여행을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마기스트랄레는 EU 국가들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며 브라티슬라바에서 끝나는 하이웨이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체코 프라하를 지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마기스트랄레는 그와는 무관한, 소설 속에 자주 나오듯 무자비하고 신중치 못한 체코 도시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프라하 시내의 대로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리고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 관광객을 유혹하는 오랜 보헤미아의 건물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유산이되, 다만 그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줄 능력이 (언제나) 미비했던 거주자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억울한 소멸의 위험에 최우선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가 열려 있는 영혼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거는데, 그 응답자 중 하나가 바로 K였습니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아니라, 이 보헤미안들에게는 "성당들이야말로 살아 있(었)다"가 되는 셈입니다. 인간보다 더 진실한 의식과 "순수함"을 지닌 이 과거의 유적이야말로, 원초적 순결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 먼 옛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휴머니티의 정수 바로 그것이었다는 "피맺힌" 증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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