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음으로부터 배운 것
데이비드 R. 도우 지음, 이아람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자신이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같이 관찰하고, 돌봐 주기까지 해야 한다면, 그건 참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분들, 장의사들, (사형을 실제 집행하는 나라, 지역의) 교도관들 등.... 특별히 그쪽으로 적성이 맞다면 모를까, 단지 돈 때문에 하는 일이라면, 육체적 직무 강도에 감정노동의 문제까지 겹쳐,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암걸릴" 만큼 스트레스가 클 것 같습니다.

 

대단히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직무에 통달해 있으며, 대학에서 교수직까지 맡고 있는 분이, "돈되는" 분야를 다 마다고, 하필 사형수 구제에 관련한 소송만 전담하듯이 맡고 있다면, 우리 상식으로는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변호사라고 해도 그 능력, 열의, IQ 등은 천차만별입니다. 일 못 하는 변호사가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는, 겪어 본 의뢰인만 압니다. 일 잘하는 변호사는 "돈되는 사건"만 수임하는 게 보통이고, 일 못 하는 변호사들만 그 자리(교통사고, 자질구레한 사기 등등)에 뒤처져서 물정 모르는 서민들의 푼돈을 뜯어낼 생각만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판에, 승소 확률도 적지, 수임료로 지불할 돈도 별로 없기까지 하지,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애초에 소속 커뮤니티로부터의 평판도 나쁘지, 대체 이런 "낙인 찍힌 인생들"을 뭐하러, 자신의 정력과 귀한 시간까지 써 가며 돕는 것일까요? 그렇게나 커리어 좋고 능력도 우수한 분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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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David R Dow (출처: 휴스턴大 로센터 홈페이지 )

 

 


이 책은 텍사스 주에서 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 가며 법률적 절차를 통해 구명 활동을 펼치는, 대학교수 겸 변호사인 데이비드 도우 씨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가 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강도 사건(한국인이 경영하는 주유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으로 피소되어 유죄가 확정된 Eddie Waterman이란 죄수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은 사연들입니다.

 

에디 워터맨은 강도단의 일원이었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아닌 공범의 행위로 인해 살인행위의 유죄가 인정되어,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입니다. 한국의 법제로도 이런 취급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법치국가는 엄연히 "자기 책임의 원칙"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나 아닌 다른 공범자의  행위책임을 연대하는 건 소위 "Felony Murder Act"가, 텍사스 주에서 효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공범자 법"이라고도 불립니다(책에는 "당사자 법"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는 the law of parties 입니다. 여기서 party는, "당사자"가 아니라  공범자 집단이라는 뜻입니다. 오역이므로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식으로는, 소위 "공모공동정범" 개념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런 학설은 한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실정법과 실무에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텍사스 주의 법현실과 의식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도우 교수는, 사형수 워터맨을 살리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쓰고, 우수한 보좌진과 함께 머리를 짜 냅니다. 하지만 1심 재판의 변호사가 일처리를 부실하게 하는 바람에, 사실상 써 볼 방책이 별로 없습니다(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만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열의와 능력을, "돈되는" 기업 사건이나 부호의 변호에 쏟았다면, 그는 벌써 돈방석에 앉아 카리브해에 호화 별장 몇 채를 간수하고 있었을 겁니다. 헌데도 그는 마치 돌을 굴리며 경사를 오르는 시쉬포스처럼, "헛된 수고"를 거듭할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뿐이죠. 올바르지 못한 일을 멍청한 이들이 권좌에서 반복하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과 원칙은 별개의 존재다. 그러나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법관 자리에 있다면, 그 둘은 일체가 되어 버린다." 도우 교수는 인종적 편견, 명예욕, 비뚤어진 세계관 때문에 유색 인종에게는 성의 있는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기계처럼 유죄 선고를 내리는 판사, 그런 판사 위에 사실상 군림하는 악덕 검사와 맞서 싸우는 게 거의 하루 일과입니다. 텍사스에서는 기일을 초과하여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 그 변호사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도우 교수는 부실한 자료를 기한에 맞게 제출하느냐, 아니면 충실한 자료를 기한 넘겨 제출하느냐를 두고 갈등에 빠집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워터맨은 그냥 죽어야 합니다. 후자를 선택해도 워터맨이 살 수 있을 가능성은 그저 미미하게 상승할 뿐이지만, 자신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집니다. "모험을 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의뢰인인 사형수의 이익을 위한 결단을 내립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명심에서 괜한 과시적 업무 수행을 한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일단 이 책에 나오는 그의 사연, 고백, 진술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질 것입니다. 교도소에는 아주 지능이 높은 죄수도 있습니다. 건축, 공학 등 평범한 두뇌가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의 서적, 문헌을 한 주에 천 페이지씩 읽는 괴물도 있습니다. 이 자가 어느 날 도우 교수에게 읽어 보라며 자료를 줍니다. 도우 교수가 자신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알고리즘입니다. "일만 처리하려면 이렇게 자주 교도소에 들르실 필요가 없을 텐대요?"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맡을 필요도 없었겠죠?" 그는 소송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이기면 좋겠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사형수와 같은 눈높이를 맞추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이 비인간적인 제도가 궁극적으로 폐지를 맞게 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습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그 아내의 부친, 그러니까 장인 어른 되시는 분도 보통이 아닙니다. 사위와 세계관은 사뭇 다르고, 유태인인 사위와 서로 껄끄로울 만하게, 독일 혈통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나 실로 교양 있고 깊이 있는 지성인이기에,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젊은이를 딸의 배필로 인정했고,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사위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가며 더 친해졌습니다. 사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는 환경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죠." 장인은 어느 순간 암 선고를 받았는데, 자기 확신이 지나친 분이라 너무 늦게 종양을 발견한 탓에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그는 사위를 다시 부릅니다. "이 사람아, 환경 운동이 취향 문제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자네 같은 리버럴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지 않나? 내가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속으로 얼마나 화났는지 알기나 하나?" "......." "헌데, 내가 자네를 알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나를 향해 논쟁의 떡밥을 던진 거였어." 참으로 만만치 않은 사위와 장인입니다. 서로가 얼마나 다른 영혼인 줄 잘 알면서도, 거의 필사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전쟁을 벌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누가 더 높은 인격과 고매한 정신으로 상대를 잘 이해하는지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나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어. 나의 아내, 내 딸(즉 도우 교수의 부인), 이들도 물론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발언권이 있지. 그러나 나의 생명 처분에 있어서 나와 같은 투표권을 가진다는 건 좀 아니라고 봐. 항암치료고 뭐고 다 그만 두고, 내가 예측 가능한 날짜에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나? 자네 부인(자신의 딸)을 좀 잘 설득해 보게." "장인 어른, 그 말씀도 맞습니다. 제가 그런데 이야기 하나 해 드리면 안 될까요? 아이가 없던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임신 진단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뱃속엔 태아 다섯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네요? 안전한 출산을 담보할 수 없어 둘을 유산시켰답니다. 셋은 지금 잘 자라나 있습니다." "그 얘길 나한테 지금 왜 하는 건가?" "이 아이 엄마는, 느닷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새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아이 셋과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지금 어떤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커밍아웃이건 새로운 결합이건 그 엄마의 자유입니다. 장인 어른은 그러나 그 여성을 비난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장인은 사위의 이 말에 한 마디도 반박을 못합니다. 아내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당신 덕분에 내 아버지가 일단 삶을 선택한 거죠."

 

생명을 존중하고 그 신조에 충실한 도우 교수는, 결국 일 때문으로 만난 사람이건 자기 아내의 아버지이건,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에서 선물로 받은 생명을, 자의건 타의건 결코 포기하지 않게 그의 모든 노력을 바칩니다. 위대한 지성인이고, 자신의 지식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분입니다. 강도 워터맨과 그의 장인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간의 대화,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의 그것처럼 심오하고 철학적입니다. 그러나 전달하려는 진실은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 혹은 타인의 생명을 앗을 권리가 있는가?" 대답은 책을 읽은 독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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