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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산업 - 상 - 소설 대부업 ㅣ 기업소설 시리즈 1
다카스기 료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확실히 저력 있는 거장은, 번잡한 묘사 없이 필요한 말만 하면서도 천 가지 재미를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80년대 초반에 발표되었으며, 소설의 배경도 그 무렵이고, 저 역시 10여년 전에 이 소설을 원서로 잠시 읽다가 만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학생 시절이라 몰랐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직장 생활의 갖가지 단면이 너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이런 재미를 왜 과거에는 잘 몰랐을까 싶더군요. 일본에서 특히 장르로 발전된 이런 기업 소설은, 역시 직장 생활을 해 봐야 실감 공감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표지만 보면 무시무시한 대부 업체에서 아주 그냥 서민의 고혈을 짜내기 위해 갖은 무자비한 방법을 다 쓰는 고발소설 아닌가 착각하기 쉽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니 무슨 에로틱한 묘사나 잔뜩 나오지 않을지 엉큼한 기대를 가진 저 같은 독자도 있을 거구요. 그런데 최소한 1권까지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법 잘나가는 (설정상 전일본 동종업계 1위인) 어느 대부업체의 경영 실태와 흑막을, 흥미 만점으로 파헤친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주인공은 50대를 넘긴, 일본 유수의 제도("帝都"라고 쓰더군요. 간사이를 자꾸 의식하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봐서, 그곳과 대치되는 도쿄를 말하는 의미로 보입니다) 은행에서 전무이사직까지 올랐다가, 부행장직까지 미처 승진하지 못하고 카드부문 자회사로 좌천됩니다. 당시 일본 은행에서 카드사업은, 그리 대접 받는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 도대체 크레딧 카드라는 매체부터가 일본에서는 낯선 결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카드 남발로 인한 가계 부채 문제, 신용 불량자 양산은 아직 먼 미래일 뿐이구요. 제 생각에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이라면, 일본에서도 이 크레딧 카드를 두고 "그게 뭐지?"라며 낯설어할 시절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시절 일본의 극도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아직 플라자 합의도 없었을, 초 저(低) 엔화가치 호시절의 이익을 마음껏 누릴 시절입니다.
사실상 좌천이지만 이대로 물러설 주인공 오미야씨가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공격적인 사업 전략을 전개하여, 별 존재도 없던 카드부문을 업계 1위로 올려 놓습니다. 그런데 오미야 씨가 몰랐던 사정이 있었으니, 이미 그는 제도 은행 내부의 "정치'에서 패배한 처지라, 마치 와신상담이나 하듯 앙앙불락하는 그의 태도를 경영 수뇌부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실적만 부풀리려 치솟는 대손율에는 눈을 감았다는 등 온갖 비판이 난무하자, 그는 아예 더 못한 한직으로 좌천되기 직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 관찰자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운명을, 정작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주인공의 눈만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안타깝죠. 이미 그는 동료와 선배 눈 밖에 났습니다. 그저 한직에서 급여만 챙기다가, 모양 좋게 은퇴하면 그게 절대우위 전략입니다, 성과도 실적도 다 필요 없다는 게 이미 결정난 분위기인데, 그만 현실을 인정 않고 역습을 꾀하다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갖자기 꼼수, 전략, 판을 다 짜 놓고 원망은 남한테 돌리는 방법, 교묘하게 상대를 매장시키는 책략, 겉만 번지르르한 말솜씨 등 직장 다니며 겪을 수 있는 천태만상을 다 구경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제가 본 대로라면, 그는 실추된 명예와 자존을 찾기 위한 동기로, 제도은행에 대한 멋진 복수를 꿈꾸며, 남들 다 말리는 대부업체에 바지사장으로 입사합니다. 헌데,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상장을 앞두고 있다고는 하나, 1인 오너가 지배하는 기업에 어떤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초기 창투 시절 뒷배를 봐준 인연을 들어 주식 양도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거물의 요구를 교묘하게(진짜 교묘하더군요) 무마한 공으로, 오너에 대해 더욱 큰 발언권을 갖게 됩니다. 이 와중에, 직급에 무관하게 사실상 사내 2인자였던 오너의 측근은, 이 주인공을 다각도로 견제하고 무력화하려는 술수를 부리는데, 딱 궁금한 대목에서 상편이 끝나더군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직장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 그에 대한 사실적이고 치밀한 묘사가 좋았습니다. 하권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