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쟁 생중계 - 고려의 역사를 뒤흔든 10번의 전투 전쟁 생중계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 / 북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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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지형과 군세(軍勢), 당대의 병장기가 상세히 드러난 도판이 부족할 경우,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상상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유명한 전쟁, 인류 역사의 향방을 바꿔 놓은 전쟁의 경우, 길게는 한 달, 수 개월을 지속한 경우도 있지만, 오케하자마 전투나 세키가하라 결전, 파니푸트 회전처럼 불과 몇 시간 만에 결판이 난 것도 있습니다. 이 경우, 기록자의 상세한 묘사가 없다면, 대체 왜 그토록 중요한 전투가 삽시간에 그런 빠른 결말을 보게 되었는지 이해하기란 지극히 어렵죠.


보급 상황이나 병력의 정예도(精銳度), 수적 우열의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길 법하지 않은 편"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우리는 그런 마법 같은 승리를 쟁취한 야전 사령관, 혹은 병사들에게 어떤 비결이 있었는지 진심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전략전술상의 멋진 예를 찾으려면 굳이 먼 나라를 보러 시선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 리 민족이야말로, 위기에 몰렸다 하면 반드시 숨은 저력을 드러내고 기지와 슬기를 발휘하여 난국에서 벗어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도, 대륙에 약체 정권(송 제국)이 들어선 이유 때문에 언제나 큰 폭의 변동과 불안 위험에 시달려야 했던 고려 시대라면, (역설적이지만) 이런 멋진 예를 찾아 볼 여지가 더 많습니다. 거란, 여진, 몽골이라는 세 유목 민족이,"우리도 대륙의 지배자로 나서지 못할 바 없다"는 각성과 자각을, 약체 송 제국의 치세에, 그리고 그보다 앞서 당말, 5대 10국의 혼란기에 의미심장하게 이루었던 것입니다.


조선은 상대적으로 명과 청이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일대를 안정적 장악을 보인 시기 동안에 존속했기 때문에, 갑자기 열도에 통일 세력이 들어선 때와, 바로 명청 교체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대규모 전란을 치를 일이 없었습니다. 또, 이 책 저자인, 정- 신 두 분의 견해에 따르면, 자주성과 진취적 정신이 보다 투철했던 고려 시대야말로, 민중이 주체가 되어 효율적이고 대담하게 외세에 저항 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생중계"란 명칭에 전혀 부족함이 없이, 저자들은 대화체를 빌어 고려사 동안 치러진 10차례의 큰 전쟁을, 스포츠 중계의 박진성이 떠오를 만큼 생생하게 해 냅니다. 전쟁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은 다소 진중치 못하거나, 휴머니티에 반하는 분위기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만, 무수한 인명과 재산이 손실되는 전쟁을 굳이 통하지 않고, 인간의 승부욕과 호승심, 혈기를 잠재우려 고안된 게 바로 스포츠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있었던 그대로 정확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마치 스포츠 중계의 생생함과 정확한 묘사를 방불케하는 역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도 하겠습니다.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토픽은 삼수채 전투입니다. 삼수채 전투라고 하면 낯설게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던 요(遼) 성종의 친정, 제 2차 거란의 침입 당시 국경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결과는 물론 잘 알듯이 고려군의 궤멸이었습니다. 하지만 패배도 그저 앞으로의 희망을 짓밟아 버리는 패배가 있는가 하면, 전술적 차원에서는 패배이나 먼 관점에서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생산적 패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300의 테르모필라이 전투가 그것이죠. 고려군은 이 전투에서 압도적인 열세에 몰려 있었지만, 불굴의 투지와 투혼으로 적에게 의미있는 타격을 입힌 채 전원이 장렬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요 성종은 이후 개셩까지 점령하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탓에 "피로스의 승리"만을 간신히 거머쥔 꼴이 됩니다. 그 직접적 여파가 바로 퇴각길에서 당한 흥화진 패배였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아시이 일대에서 당시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던 거란 측에 대해, 불굴의 항전 기백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 것은 바로 고려의 이름 없는 일반 민중이었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혀 포기할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공세에 맞서 "대조국 전쟁"을 치러 낸 러시아 민중을 연상하게 합니다. 중국의 고사에도 "애병불패"라는 말이 있듯, 한을 품고 의로운 마음으로 싸움에 임하는 민중을 당할 군대는 어디에도 없게 마련입니다. 직접 비교할 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를 보유하고도 번번히 현지 장악에 실패하는 현대 미군의 모습을 보면 이같은 진리가 재확인됨을 알 수 있죠.


저자들의 빼어난 관점은, 당대사 분석에 매몰되지 않고, 이처럼 시대를 넘나들며 일관된 원리와 이치를 규명하려 애쓴다는 것입니다. 중원의 북부에서 세력을 규합하며 새로운 패권 확립에 골몰하던 유목 민족은, 언제나 배후 공략을 걱정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이의 가장 앞선 선례는, 모용황의 전연이 개시했던 고구려 침공이라고 합니다. 이 저자분들의 <조선전쟁 생중계>에 의하면, 이런 패턴은 후금의 조선 침공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자겸이라고 하면 우리는 마냥 부?적으로 보기 쉽지만, 새로이 국세를 떨치고 일어난 금에 대해 실용적 외교 노선을 그처럼 견지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12세기 그 빛나는 문화적 안정기를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없으니 사라센 무역상들은 중원을 건너 뛰고 예성강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지역 경제의 특수(特輸)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운 관의 여진 정벌은 분명 우리 입장에서는 위세를 떨친 대외적 업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기서 대단히 균형잡힌 관점을 유지합니다. 마치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 국력을 의미 없이 소진했던 20세기의 미국처럼, 고려는 척박하고 비전이 보이지 않는 현지인들과의 투쟁에서 점점 지쳐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현명한 "출구 전략"을 마련해서, 명분과 실리를 적당히 챙기는 선에서 고려는 이 소득 없는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이 때 무모하게 절멸전 따위를 시도했다면, 이후 아골타의 금 제국이 발흥했을 때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임진란 당시 왜 측이 들고 나온 명분은 소위 "정명가도" 외에도, 원 제국과 연합하여 쳐들어온 고려군에 대한 복수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몽 연합군은 여러 전술상의 오류와 기상 이변(소위 가미카제) 때문에,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만, 이 대대적 원?이 일봄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상당했죠. 고려는 두 차례씩이나 왜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사실은 향후 동아시아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이 대목은 특히 상세한 그림과, 그림에 최적화된 설명("중계")이 제시되어, 내용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쟁이란 물론 그에 임하는 이들의 지혜와 심적 자세에도 많이 좌우되는 바 있지만, 마치 칼레 해전과 쓰시마 해전(러일 전쟁에서의)처럼, 우연히 개입되는 기상 현상의 변수가 때로는 어이없을 만큼 큰 변수로 작용하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대자연의 위력 앞에는 언제나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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