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호텔 - 영혼과 심장이 있는 병원, 라구나 혼다 이야기
빅토리아 스위트 지음, 김성훈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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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의 본분이 무엇이며, 그 범위와 효력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 동양애서 예로부터 전해지는 격언이 있었으니, "의술은 인술이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술이 아닌 것은 의숧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낫게 하고,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함이 의료인의 직분이었고, 그래서  doctor라는 말의 번역어 "의사"에는 스승이라는 의미의 師가 들어갑니다. 흔히 장래가 보장된 직업으로 "사짜"가 붙은 여럿을 거론하지만, "변호사"의 "사"나 검사, 판사의 "사"는 발음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그리고 평판과 격도 낮은 의미의 음소일 뿐입니다.


서 양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를까요? "배움과 지혜, 수련의 궁극에 도달한 이"라는 뜻의 doctor는, 통상 8년 간의 혹독한 수업 기간을 거쳐 내리는 학위입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학부 과정만 거쳤음에도 이와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분야는 오로지 의학뿐입니다. 한때 이발사가 의약 시술을 겸한 암울한 미개의 시절도 있었다지만, 서양 역시 본격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의사들에게 베푸는 대접은 여타의 직군과 비교할 바 아닐 만큼 각별했다는 사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의술이란, 따라서 동과 서를 막론하고, 그를 행하는 이에게 최고의 존경과 영예가 베뤂어졌음은 사정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료인도, 물질 대사를 위한 최소한의 자양 섭취를 이뤄야 하는,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기에,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마 련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여느 학자나 기능인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된 수련 기간을 거치고, 실무에 본격 투입된 후에도 그 노옹의 강도가 타 직업인과 감히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들이 제 기능, 제 능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그저 정신적, 무형적 존경이 바쳐지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사회에 기여아는, 개인에 끼치는 공헌과 은혜가 특별한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물리적 대가를 치르는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는 "각자에게 그의 정당한 몫을"이라는 정의의 원칙 그 요청이며, 다른 면으로 고된 수고와 고결한 재능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젊은 세대로부터의 인력 충원을 바라보기 어렵다는 현실적 요구의 결과입니다. 의사에게는, 특별히 많은 보수가 지급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의술의 대상(代償)을, 누가 치르게 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동과 서, 고와 금을 넘어, 사람이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 온 이래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문제입니다. 병 든 환자가 각기 그 수고를 값하게 하면, 당사자 사이에서 급부 교환이 완료되므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입니다. 다만 환자가 무자력일 때에는, 의사의 용역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라고 존재하는 직분인데, 만약 모든 환자, 혹은 상당수의 환자가 자력(資力)이 부족하다면, 환 자는 도움을 얻지 못하고, 의사는 의술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결국 힘들여 의사를 양성한 이유가, 최소한 사회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죽어가야 하는 환자의 비통함이나, 올바른 영혼을 지닌 의사 개인이 느끼는 자괴감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요.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구빈원, 혜민소 등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 의 료 기능은 이처럼 개인의 문제로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사회, 정부가 개입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많은 사회적 모순을 안고 지내다 결국 "혁명"이라는 극약 처방을 쓰긴 했으나, 유럽의 봉건 체제 역시 극빈자, 중환자의 구호는 사회의 몫이었습니다. 건 강과 생명의 문제를 전적으로 해당 개인에게 맡기는 체제는, 청동기 혁명 이래 존재하지 않았으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시민과 인간의 권리를 부르짖은 시민 혁명 이후 regime의 위상으로 모두를 지배하기에 이른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이 의료 서비스가 영리의 영역으로 거의 넘어가고 만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현대 의학으로 못 다룰 일이 아닌데도, 돈이 없으면 병도 못 고치고 죽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의 모순은 놀랍게도 전근대 아닌 근대의 생활상 그 일부였던 것입니다. 문명이 과연 전진을 하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이 더 못 살 모습으로 뒷걸음을 치는 걸까요?


짙푸른 북태평양과 장쾌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세련되고 활기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 구한말 우리 조상들도 신식 문물을 배우러 힘들고 먼 발걸음을 마다지 않은 대도회,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부터 대뜸 떠오른다는 게, 모순적 체제가 성원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의 왜곡입니다), 환자를 이윤 창출의 원천이 아닌, 돌봄과 공생 공존 공감의 대상으로 보는 대규모 시설이 있다고 하합니다, 이름하여 "라구나 혼다"입니다. 연혁을 알고 보니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17세기, 왕정이 아직 공식 헌정의 지위를 유지할 무렵, 오갈데 없는 어려운 이들을 돌보았던 "파리시립병원"의 후신이라는 군요. 신생 독립국 미국이 프랑스의 지원으로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을 모색할 무렵, 이곳 극서(極西)의 땅은 아직 합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지조차 않은, 히스패닉과 아메리카 토착인의 앞마당이었습니다. 역사의 곡절과 인연이 지구 반 바퀴를 돌고 돌아, 체제와 이념의 변천이 어떠하건 인간이 그 본성과 영혼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는 준열한 가르침을 전하는, 휴머니티의 영조물적 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의 호텔". 사실 여기서 "신"이란 심상이 전하는 바는, "신성한, 거룩한" (그러므로) "지극히 인간적인"의 의미로 풀어야 할 것입니다(그 반대인 "특권적, 사치스러운"의 내포가 아니구요). 호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온갖 도회적 영화의 상징처첨 되어버린 개념이지만, 본디 접객업이란 지방 토착의 부호가 넉넉한 인심을 객(客)들에게 베푸는 곳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라구나 혼다"는, 우리가 일찌감치 잊어버리고 그저 낭만이나 이상향의 한 토막으로만 치부하던 상황을, 마치 시공의 차원을 잘못 맟춰 낙오나 한 듯 부조화스러운 모습으로 이 살벌한 자본주의 한복판에 영사(影射)하는 성상(聖像)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을, 그 반대가 오히려 정상인 양 착각하고, 부조리와 불의를 정상과 원칙인 양 착각하는 우리들에게, "신의 호텔"은 화끈한 자각몽으로 작용하는 셈입니다.


이 솝 우화에도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은 돈이 없으니 올바른 치료를 받기 어렵겠군요..." 헌데 이는 의료가 영리를 추구하거나, 사익적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됨을 당연시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당위에서 한참 벗어난 세태를 풍자하려는 목적이었지요. 닥터  빅토리아 스위트가 전라는 천태만상의 목격담과 치료 사례는, 첨단 약품과 고가 장비가 아닌, 치료하는 자의 정성과 마음, 그리고 이의 영향을 받은 환자의 소생 의지, 정신적 힐링이, 질병으로부터의 회복 그 첫째 요건임을 (다소 불가사의할 정도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영리"와 "인술"은 함께 가기 어렵고, "인(仁)"이 빠진 의술은 환자를 낫게 한다는 그 기본적인 효능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돈이냐 생명이냐는 의외로 곳곳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양단적 선택이며, 이 중 참의료가 어느 편에 서는지는, 이 책에 나온 생생한 교훈과 증언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어요.


다시 한 번 적습니다.

의사에게는, 특별히 많은 보수가 지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돈은, 환자의 주머니 외에,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가 대부분을 충당해아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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