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으로 삽시다 - 30주년 기념 개정판 이시형 뒤집어 생각하기 1
이시형 지음 / 풀잎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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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인상 깊은 두 구절의 카피가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읽고, 아들딸에게 권해 주는 책"

"출판사상 최초논픽션 밀리언셀러"


30년이라면 정말 긴 시간이죠. 아마도 30년 전이면, 이 책의 독자는 주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독자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그 아들 뿐 아니라 딸에게도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 주는 모습... 우리는 여기서 여성 역시 당당한 사회 경제 활동의 주역으로 부쩍 성장한 현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쓰여질 무렵이라면, 여성이 계산원, 비서직, 공장 노동 외에 딱히 진출할 곳이 없던 시절이기도 하겠기 때문이죠.


사실 이 책에 적혀 있는 모든 진단과 조언은 현재에 있어서도 유효합니다. 다만, 그 전제가 되었던 사항들은 아직도, 이 책이 쓰여졌던 시절의 사정과 견주어, 불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외국계 회사(처음부터 외국에 소재한 회사 포함)에 근무하는 한국인은 언제나 뚜렷한 공통 패턴을 보인다. 평소에 아무 말 없이 참다가, 갑자기 사표를 내던지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어 보면, 딱히 하는 말도 없다. 마치,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주느냐는 식이다. 반면, 정상적인 반응 양식의 직원들은 그헣게 행동하지 않는다. 불만이나 이견이 있으면 그때그때 이의를 제기하고, 만약 직장을 그만둘 일이 있으면 마음을 확실히 정한 후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고 퇴사할 뿐이다."


어 느 분이 시기적으로 먼저 이 점을 지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그의 어느 책에서 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위원의 책은 좀더 구체적인 배경까지 거론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중동 건설 현장에서, 외국 업체에 고용된 한국인들이 이런 모습을 공통으로 보였다는 회고입니다. 그 시점은 따라서 1970년대 정도로 짐작됩니다. 두 저자가 모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외국인들이 지켜 보고 잘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지적 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인의 사고 방식이 그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이었던 것 아니었나, 대략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평소에 참고 참다가, 어느 시점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때 확 폭발시키는 것. 확실히 조직에나 해당 개인에게나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술자리에서 느닷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정부장도 그런 유형에 해당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30년 전에는 분명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셨을 겁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실속도 없는 체면을 중시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생각에 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못마땅한 게 있어도 억누르고 참고,... 하지만 지금 세대, 한창 경제활동에 자 신의 정력과 에너지를 쏟아 붇고 있는 층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직장에서도 선배, 상사에게 제 할 말을 하는 편이고, 기획과 아이디어를 위한 회의에서도 이른바 "튀는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편입니다. 이런 직원을, 직장 내부 분위기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키우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담에서 말하듯 "벙어리 냉가슴 앓는 유형"도 여전히 주위에서 많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이제 평균적인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분 저런 스타일로 사회 생활 하기 참 힘들겠다." 같은 동정을 얻는 처지라는 게 30년 전과는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달라진 건, 이시형 박사님의 이 책을 30년 전에 읽고, 당대인들이 각성했고, 그들이 낳아 키운 자녀들이 그런 구태의연한 모습을 어려서부터 습득할 기회 없이 일찌감치 마인드에서 지워 버렸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공헌이랄까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시형 박사는 이런 사례로부터,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결론을 내립니다.

" 그만둔다는 액션을 거창하게 벌이는 사람은, 알고 보면 정반대로, 그 속마음이 '난 전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제발 나 좀 잡아 줘 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주변과의 공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심리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든가, 아니면 모든 관계를 종료하자는 자폭적 선택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나, 이 말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모름지기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인체생리학적 기술 지식에 밝은 것만으로는 부 족하다는 게 이 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사람의 심리를 알고, 성격적 특징을 알아야, 특히 정신적 병리에 대한 진단을 정확히 내릴 수 있겠습니다. 병이란 따지고 보면 마음에서 유래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도 의지의 강인함, 정신의 명철함으로 기사회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소한 질병으로도 크나큰 상심 끝에 생존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의는 인간의 속마음을 알고, 그를 꿰뚷어 보아야 합니다. 30년 전에 이미 이 박사는, 한국인이 가장 보편적으로 "앓고 있는" 심리적 병통을 이처럼 속시원하게,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었던 거죠.



이 책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화도 전합니다.

" 어떤 사람이 친구네 집에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한 나루에서 그 친구의 아들을 만났는데, 분명 그 친구의 아들이 탄 배가, 강 한복판에서 가라앉는 걸 보고 만 것이다. 친구네 집에 당도해서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친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친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

- 이 친구야, 내가 봤는데 그 배에서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했어!

- 알겠네. 그런데 그런 배라면 아들놈은 아마 타질 않았을 걸세.

그 사람은 흉사(凶事)의 결과를 우길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과연 얼마 후, 친구의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그 사람이 곡절을 물으니,

-처음에 탔었습니다만, 사공이 자꾸 승객을 태우는 걸 보고 도중에 내렸습니다.

틀림없이 화가 일어나지 싶어서요.

태연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일화를 처음 읽었습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구나, 같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시형 박사님은 전혀 뜻밖의(저로서는) 결론을 내리고 있더군요.


" 보통 어려운 상황에서 무작정 버티는 사람을 강하다고 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아 버리는 나약한 사람이라서,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단호하게,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으로 적합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지극히 타당한 결론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불리한 상황을 개선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뭉개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는 거지반 실패로 귀결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시형 박사님의 강의를 들어 본 분은 아시겠지만, 경삳도 억양이 아주 강한 어조죠. 저 도 가끔 경험하는 일이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사투리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른바 보상의 기전으로, 스스로 "촌놈 콤플렉스"가 강한 탓에 이런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TS 엘리엇의 예를 들며, 전성기에 그토록 세련된 귀공자의 분위기를 풍겼던 그이지만 대학 입학 초년 시절에는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신세였다는 겁니다. 이를 감추려고 일부러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메뉴를 주문했는데, 도저히 그 맛을 감당할 수 없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거죠. 이 박사님 자신이 지방 출신이었고, 그런 모종의 "촌놈 컴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분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에는 기세 좋게 발전하는 신흥 개발도상국의 수도 서울에, 청운의 꿈을 안고 갓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들이라, 아마 이런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의 독자의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30년이 지났습니다. 행동이나 말하는 투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열등 컴플렉스에 짓눌려 있고, 제 의사를 정직하게 표현 못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 런 책은 여전히 좋은 가르침을 전달해 줄 것입니다. 몇몇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이 오랜 농경사회의 관행, 못 살고 못 입었던 데다 외국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치욕까지 과거에 겪었던 상황에서, 30년 전의 한국이라면 이 책은 거의 국민 교과서의 노릇을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지금은 최소한, 배짱이 부족해서 사회 생활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많이 드물어졌습니다. 배짱이 부족하기는커녕, 제 분수와 능력도 모르고 무모하게 아무데나 함부로 나서다, 종전보다 훨씬 못한 신세로 떨어지고, 가뜩이나 문제 많던 멘탈에 다른 문제까지 더하는 사람도 보곤 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명제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대로 실천에 옮길 가치가 충분합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이라야 하고, 현실 인식에 왜곡이 없어야 하며, 유 아적 망상에서 벗어난 건전한 상식을 가진 마인드, 이것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구비되어야 할 전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골방에서 이 책만 읽다가, "아 배짱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며 세상으로 뛰쳐 나왔을 때의 그 결과란, 자신이나 사회에 더 나쁜 해독만 끼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의 영향 중 하나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짱만으로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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