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차라리 바보인 게 낫다 - 귀를 닫고 사는 리더들을 위한 작심 발언
스즈키 다카시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클라우드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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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 초기 불량품에 대한 보고를 받고서, 아주 작심하고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불량품 화형식을 갖겠다. 모든 불량픔, 나아가 동일 라인에서 생산된 미검사 제품도 모두 끄집어내어서 쌓아두고, 임직원 막론하고 전원 현장에 도열하게 하라."

무 더기에 불이 붙으니 그 냄새가 이루말할 수 없었지만, 총수의 서슬에 감히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일류 브랜드하고는 천지차이가 있던 제품만 만드는 게 고작이었던 삼성맨들은, 뭔가 큰 충격이 자기 영혼을 관통하는 걸 느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순간을 회고하면서, 이 충격적인 이벤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삼성이 세계 가전을 제패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 말합니다.


특 히, 실속과 치밀함, 반듯한 회계 정리를 통한 잡손실 극소화를 미덕으로 추구하는 일본에서, 경영자가 만약 이런 행태를 보인다면 아마 조롱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 <사장은 차라리 바보가 되는 편이 낫다>의 저자인 스즈키 다카시 에스테 회장은, 바로 저 위의 이건희 회장의 일화에 나온 바와 매우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업의 재고 중에는 곧 소매상에서 고객을 맞아 제 임자에 넘어갈 것이 있고, 창고에서 먼지만 쌓인 채 회사의 주름만 더하는 이른바 "악성 재고"가 있죠. 스 즈키 회장이 갓 취임했을 때, 서서히 전망이 상실되고 형편이 기울어가는 이 회사의 창고에는 이런 악성 재고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회사의 명색은 화려해서 도합 860종의 아이템이 유통된다고 카랄로그에는 과시했지만, 정작 유통이 되는 물품은 그 중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회계 원칙을 아시는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기업에서 재고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됩니다. 더군다나 악성 재고는, 그 재고가 남아 있는 동안은 재고자산으로 카운팅되어 대차대조표의 차변에 엄연한 자산으로 기록됩니다. 그 실질은 기업을 좀먹는 악성 종양이나 마찬가지인데(앞으로 판매의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도요), 숫자로는 회사의 재무 상태를 실질보다 나아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까지 유발했으니, 스즈키 사장(당시 갓 취임)의 눈에는 미워도 이보다 미운 게 없었을 텝니다. "당장 다 갖다 버려!"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이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습니다. 사장이 고용사장이라 일선에 일일이 영이 먹히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고, 어쨌든 회사의 라인에서 아깝게 생산된 물품인데 버리긴 왜 버리느냐는 반발심도 있었습니다.


"그거 버리는 비용이 더 듭니다."

"고물상에 팔아도 몇 푼은 건지겠습니다."

"유통 라인 중에는 그 아이템이 없으면 아예 거래가 끊기는 곳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스즈키 사장이 발끈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직접 그 소매점에 전화를 해 보지!"

결과는 역시, 직원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상품은 직원들의 정성과 땀이 밴 것들이라, 누가 쉽게 버리려고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미 버렸습니다."

스즈키 사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거짓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 그래? 나중에 어디서 한 개라도 발견되면 자넨 내 손에 죽어!

그렇게 아까운 물건이면 물건은 살리고 사람을 좀 버리는 쪽으로 나가 봐? " 이렇게 협박성 엄포도 삼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직원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버리는 비용만 5억 엔 가까이 듭니다."

"내가 지금은 사장이야. 버리라면 버려! 이유가 뭐냐고? 내 취향이다, 왜!"


회 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당시는 거품이 꺼지고 일본 경제가 본격 퇴조기로 접어드는 때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기업회계는 보수주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시가주의"가 아닌 "취득원가주의"로 해야 기업의 정확한 실상이 잡힙니다. 이렇게 하면 예컨대 보유 유가증권의 가격이 급등해도 그 가액은 취득시의 그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기업의 실질 가치를 일시적으로 부풀릴 우려가 적습니다. 또, 손익계산서상 당기 순이익에 "평가이익의 거품"이 지나친 비중을 차지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이것은 경기가 활황을 띨 때의 이야기입니다. 스즈키 사장이 취임할 무렵에는, 경기의 극적인 퇴조가 전 일본을 지배할 무렵이라(우리도 마찬가지였죠. 마찬가지가 아니라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듯 더했습니다. 바로 외환 위기 시절이니까요), 취득원가주의를 고집하면 바로 그게 과거의 거품을 반영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스즈키 사장이 제일 먼저 노린 것은(책에는 이런 말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감상에만 젖어 있던 직원들과 회사 분위기의 환상을 깨버리는 작업이었습니다.


" 버리는 비용만 5억 엔입니다." 그러면 버리면 안 되죠. 회사 운영이 장난인가요? 회사가 아니라 가계의 운영 원칙도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지출 행태를 방치하는 건, 제 몸에서 건강한 피가 빠져 나가는 걸 방관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부친은 아주 예전에 어느 이사님이 현장을 돌며 "니네들, 한전하고 짰냐? 쓸데없는 불을 왜 이렇게 켜고 다녀?"라고 하던 말을 즐겨 회상합니다. 전기요금 아니라 그 흔한 수도요금 하나도, 쓸데없는 지출은 줄이고 또 줄이는 게 운영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스즈키 사장은 "뭐가 됐든 상관 없으니 갖다 버려!"라고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바보짓"을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 책의 제목에 "바보짓"이 들어갔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주세요) 일시적으로 잡손실, 사무 비용이 발생하는 건 차라리 감수하고라도, 소속 직원들의 썩은 정신 상태를 바로잡고 그를 통해 다른 방향에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혁신을 가로막는 것은 무능, 무경험의 비중보다, 과거 한때 잘 나갔던 경험과 쾌감에만 집착하여, 이미 크게 변화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그 타성이 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스즈키 사장은 이 점을 간파하고, 직원들에게 "이대로는 죽는다!'라는 점을 호되게 깨우쳤던 것입니다. 비록 저자 자신의 입으로는 그 표현을 삼가고 있으나, 실상 하고 싶었던 말은, "악성 재고만큼이나 썩어빠진 니네들 정신부터 갖다 버려!"를 외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맨 위에 적은 이건희 회장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스즈키 사장 역시 과단성 있는 성격과 스타일로는, 이 회장에 뒤지는 바 없는 인물이었을 텝니다. 그런데 왜 "화형식" 같은 세레모니를 벌여, 더 확실한 효과를 보려 하지 않았을까요? 에스테가 다루는 작고 소략한 품목이 "화형식"에는 더 적합한 것들이었을 텐데도요. 우선, 스즈키 사장은 오너가 아닙니다. 고용된 사장이고, 더군다나 (책에 나오듯이) 이 회사로 부임한 지(상무부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터줏대감들을 상대로 저 정도면, 그건 대단했다고 봐 줄 만합니다. 다 음으로, 역시 모든 수단에는 비례성 원칙이 통용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충격을 주고 끝내야지, 지나친 것은 안 하느니만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저 과격한 일화는 기업 뿐 아니라 해당 업계에 전설로 남아 있는데, 이 시점은 해당 기업(삼성) 이 위기를 맞이했을 무렵이 아니라, 바로 적당히 잘나가고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시점이면 기업의 소유주와 직원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무렵입니다. 직원은 적당히만 해도 현상 유지가 됩니다. 월급만 잘 나오면 그만인데 괜한 모험으로 해직의 리스크를 감내할 필요가 없죠. 반면 오너는 몇 십 년, 백 년을 내다보고 살 길을 도모하는 입장이라, 현재의 무사안일이 미래의 파국으로 돌아옵니다(그 좋은 예가 지금의 SONY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 적당히 잘 나가는 바로 지금"이, 관료주의에 직원들을 매몰시켜 기업의 경직성을 체질로 굳게 할 위기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극적으로 개선된 체질이, 현재까지도 기업 고유의 생리, 개성으로 남아서 삼성을 글로벌 탑으로 굳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즈키 회장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장에게 필요한 건, 운과 감과 배짱이다."

기술적인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업의 큰 전략적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운 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실력의 일종입니다.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던 사소한 경험도, 소중한 실무적 지식으로 잘 다듬고 체화하여, 한참 지난 후 결정적일 때 의사 결정의 기준으로 척 꺼내서 쓰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별 상관 관계가 없어 보여 "운"으로만 인식되지만, 내막을 캐고 보면 결국 다 실력의 확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전 경험을 무수히 쌓은 후, 아 이럴 땐 대충 이래야 하더라, 이럴 땐 참아야 하겠더라, 같은 "촉"이 발휘되는 거겠죠. 결국은 성실한 사람(성실하기만 한 사람이 아닌)한테 감도 발달하는 것이겠구요.

사장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미덕은 또한 결국 배짱입니다. 안전 위주로 가서는 아무 일도 안 됩니다. 승부를 걸 때 과감히 걸 수 있는 게 리더의 자질이요 책임감입니다.


이 모든 자질은 결국 실전 경험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 스즈키 회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겉으로 내세우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소학교 시절에 일제 패망을 맞이했는데, 학교에 가 보니 그간 배우던 교과서를 모두 먹물로 물들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제가 지금 읽는 다른 책인 이시형 박사의 <배짱으로 삽시다>에도 나옵니다). "지금까지 배우던 건 다 거짓이었다." 그 잘난 지식으로 거들먹거리던 어른들이, 하루 아침에 비겁한 변절자가 되어 강자에 꼬리를 흔드는 아첨배가 되어 있더라는 거죠. 그 이후로 그가 마음에 새긴 것은, "말을 믿지 말고, 실상을 눈으로 직접 체크하라."였습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저자는 "자신은 절대 제국주의의 환상에 향수를 둔 군국소년이 아니었다."고 덧붙입니다(군국소년이 무엇인지는, 영화 <더 울버린 (2013)>에서 老 야시다 회장 케릭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실용주의.실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실전만큼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고 생산적으로 바꿔 주는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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