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독일의 바바리아(바이에른)는 히틀러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이후 나치의 발호를 가능하게 한 온상 구실을 (불명예스럽게도) 맡은 적도 있고, 대체로 대단히 보수적이며 시대의 계몽적 조류에 적응이 늦은 고장이었습니다(지금은 꼭 그렇진 않겠지만요). 지금으로부터 근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30년 전쟁이 독일 전역을 피폐하게 만들며 통일과 근대화를 몇 걸음 더 늦춰 놓는 재앙을 끼치고 끝났을 때도, 유독 이 지역은 분쟁의 참화를 더욱 아프고 파괴적으로 겪어, 이후의 발전을 독일 타 영방보다 늦게, 그리고 느리게 치런 낸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미지출처: www.ndr.de, stakedamsels.com)

 

현대 문명국에서는 직업의 자유라는 걸 당연히 여기고 이를 누리지만, 중근세에만 해도 직업의 선택, 수행, 심지어 종료의 모든 과정은 상위 신분자의 면허가 있어야 했고, 직업 조합(길드)의 통제를 따로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곧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가업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유럽의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사정만 해도, 자유민인 농민 계층은 대대로 부쳐 먹던 토지에 계박되어 있는 형편이었고, 가축 도살, 예인, 무속 등의 직분은 혈통과 함께 철저히 세습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들을 천민으로 고착하여 사회적 계층 이동을 철저히 막은 것은 아주 뿌리가 깊은 mores에 해당했죠. 개인의 힘으로는 이에 저항할 수 없었고, 타율적 근대화 조치인 갑오경장 이후에나 형식적으로 법적 제약이 해제되었습니다.

 

제가 조금 실망한 것은,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사형집행인"을 직업, 가업으로 가진 주인공이, 그 인적 자질만은 비범하고 탁월하게 설정된 종래의 관습을 작가 올리버 푀치(Oliver Pötzsch)가 미처 떨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 인간적 품격과 능력까지 남의 멸시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에서, 제 운명을 자력으로 개척하며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내러티브란, 언제나 읽는 이에게 감정의 고양과 정서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특별한 업적을 세우는 일이야 따지고 보면 딱히 칭찬할 것도 아니지 않을까요? 오히려, 남들보다 그 처한 신분적,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공히 열악했음에도, 그 모든 불운을 딛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정점에 오르는 인생이, 오늘날의 독자에겐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대대로 사형집행인의 직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들의 천대만 받아 오던 한 사나이가, 자신보다 더 비참하고 억울한 지경에 빠진 자를 연대의식,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구명하고, 불의하고 비겁한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구성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남주건 여주건 여전히 잘생기거나 아름다워야 하고, 혹 그게 안된다면 강인한 신체에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세팅이라야지, 신분이나 조건까지 나쁜 판에 이런 일체의 매력조차도 결여한 설정이라면 도저히 몰입이 안 된다는 분이 있다면, 그런 독자는 이 책을 안심하고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주인공 야콥 퀴슬은 직분이 천역이라는 것 외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듬직한 신체 조건에 완력도 상당하고, 그에 어울리게 용기와 배짱도 대단하며,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게(?) 지식욕까지 왕성하여 타 분야의 전문가들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체계적인 지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억울한 처지의 희생양이 권력의 냉혹한 책략, 대중의 어리석은 광기에 의해 처단되고 목숨을 잃는 부조리를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정의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이도저도 아무것도 못 갖춘 사람이, 선의지와 끈기, 성실성만 가지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혹은 그 일보 직전에 좌절하는) 이야기를 더 기대했습니다. 야콥 퀴슬은 이미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많기에, 설사 이런저런 장애가 그를 가로막아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은 감동이라기보다는 당연해 보였던 게 제 입장이었습니다.

 

소년이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가혹한 폭행을 당하고,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채 강물에 버려져, 이웃 주민들에 의해 발견됩니다. 그의 부친이 라이벌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의 운송 조합과 갈등 관계에 놓였기에, 처음에는 다들 그쪽으로 사태의 귀인을 잡아 갑니다. 헌데, 사체에는 흑마술의 징표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단서 하나만으로 easy victim 하나를 상정한 채, 마을의 산파를 살인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광기를 발산, 린치를 가하기 직전입니다. 산파를 사형(私刑)의 곤경에서구해낸 사람은 사형집행인 쾨슬이고, 선거후(선제후. elector) 공작 쪽에서 파견한 진용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의 7일 간에 진범을 잡아내지 않으면, 그는 애꿎은 이웃,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는 무고한 인명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할 판입니다.

 

이런 설정은 참 역설적이면서 묘한 기시감까지 자아냅니다. 사형집행인이, 원사(寃死) 직전에 몰린 결백한 영혼을 구해낸다는 테마, 게다가 그 사형집행인은 가외로 익힌 약학, 의학 지식까지 전문가 수준으로 구비하고 있어, 주업은 사람을 죽이는 일, 부업은 사람을 낫우는, 때로는 살리는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생과 사의 양 벡터가, 양심과 순수를 언제나 지향하는 이 쾨슬의 영혼을 파멸에의 죄의식으로부터 균형을 잡으며 지탱해 주고 있던 셈이죠. 또한, <환상의 여인>이나 <영구차로 돌진하라(조나선 라티머 작)>에서 보던 테마, 억울한 죄인이 감옥 안에서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명탐정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러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신분을 초월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적절하게 끼어듭니다. 도시의 중산층, 신사 계급으로 편입되기 직전의 의사 가문의 젊은이는, 얄궂게도 공동체의 천민이자 제도외적 의약 처방으로 마뜩치 않은 경업(競業)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 사형집행인의 아름다운 딸(바로 이 책의 제목, 독일어로는 Henkerstochter입니다)을 좋아합니다. 막달레나라는 여성의 미모와 순결함 못지 않게, 그 부친이 지닌 방대한 의학서,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집요하고 진지한 지식욕을 존경하는 청년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안락과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 준 그의 부친이지만, 정작 자신이 끌려하는 이런 요소들은 결여하고 있다는 게 그들 부자가 처한 비극이겠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그가 처한 사회적, 정치적 입장, 또 그가 속한 출신 계급에 무관하게,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날카로운 타파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과업을 도와 앞에서 낡은 인습과 폐단을, 마치 단호하고 강력한 terminator의 뚝심으로 정지(整地)하는 소명을 지닌 듯한 장년의 쾨슬이 있습니다.

 

전근대적이고 인간의 계몽, 자유를 방해하는 신분 계급, 제도의 작폐도 문제이지만, 선의의 주인공들을 곤경에 몰아 넣는 데에는 다름 아닌 무지몽매한 대중의 광기, 집단 히스테리도 큰 몫을 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일부에서 신드롬이라 할 만큼 대지를 황폐하게 했던 "마녀사냥"이라는 게, 대체 왜 발생하고 만연했는지에 대해 역사서는 많은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 속시원한 논증에 성공한 시각이 별로 없더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집단 광기가 왜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는지 비로소 해명이 되는 느낌이었는데요. 전쟁으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겪고, 그 책임을 지배 계층에 따질 방법은 없고, 그 모든 불의와 상흔을 이성적으로 정리할 능력은 되지 않고, 어리석은 대중은 혁명이 아닌, 자기 부정, 자기 파괴의 방식으로 가장 약한 희생자를 골라 집중 한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카타리 파의 학살", "주기적인 유태인 사냥" 등 주로 권력층의 조장, 유도에 의해 이런 비극이 저질러진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민중 자신이 어리석고 우매하며 타락했던 탓에 더 크게 기인한 것 아닌가, 이 책에 등장하는 그런 집단 히스테리는, 인간 본성의 선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희생되어야 한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고아나 취약 계층에 대해 적극적인 단죄와 공격에 가담합니다. 나치 체제 하에서, 가장 가혹한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이 불구자, 정신병자, 유태인(부유한 자들은 일찌감치 빠져 나왔습니다. 중산층과 서민만이 수탈과 살상의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들이었는데, 체제의 모순과 실패의 죄과를 결국 이들이 다 걸머지고 절멸된 셈이죠. 만약 또한번의 재앙이 닥친다면, 그 다음번의 희생양은 앞 단계에서 열심히 돌팔매질을 했던 대열 중 가장 약한 자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지배층의 악의 못지 않게, 무지와 타락이 빚은 민중의 악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이 작품의 몇몇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천민 쾨슬의 존재의의를 가장 두드러지게 하는 건, 이런 암흑과도 같은 총체적 모순을, 보편적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타개하려는 그 바른 의지에 있습니다. 살인범을 잡는다고 이 근본적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가 명탐정이기만 했다면, 공동체의 폭동 하나를 사전 예방한 공적에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구원자, 치유자, atoner의 소명까지 가슴에 품었기에, 길고 긴 암흑의 한 기간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종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무지와 타락에 최종의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억센 두 팔로 집행한 진정한 영웅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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