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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강국을 다시 상상한다 - 방송통신위원회 2000일의 현장 기록
신혜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저만 해도 책을 펴기 전에는 DMB의 시스템, 인프라 지원 같은 국가적 시책, 혹은 장차 케이블 채널과 지상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에 대한 원론적 논의가 펼쳐질 줄 알았습니다. 제가 언제나 "방송통신정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박 모 국회의장이 통과시킨 DMB육성 법률이었는데요. 당시 여야가 극심한 정쟁(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요)을 벌이고 있던 와중에서도, 이 법안만은 국가 대사를 좌우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합의로 조속한 처리를 시키던 모습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그 활용성이 증대될 지는 모르겠지만, DMB는 현재 큰 성공을 전망하기 힘든 형편이고, 업체들의 수익 구조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이용자들은 앱기반 플랫폼에 더 크게 의지하는 모습이죠. 이처럼 한때 큰 주목과 기대를 모으던 정책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류와 실책이 드러나게 마련인데요. 이 책의 주제가 그런 국가 정책 고찰 쪽에 포인트를 두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이 책의 주제는 오히려,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할 이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지상파 채널과 유선재송신 업체가 의견 불일치로 인해, 상당수의 시청 가구들에 대한 방송이 느닷 끊어진 게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일입니다. 사실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인데, 소수도 아니고 국민 대다수의 일상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송출 중단이 그처럼 벌어질 수 있다는 자체가, 문명국에서 벌어지기 힘든 해프닝이기 때문입니다. 또, 얼마 전에는 KT가 삼성 스마트 TV의 컨텐츠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정은 보다 복잡합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기업으로서 KT와 삼성은, all-IP 시대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대단한 앙숙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앞의 사례가 계약 체결을 두고 협상력 이슈의 신경전 수준이라면(고작 신경전으로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사실은 용납이 안 된다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KT와 삼성 간의 분쟁은 보다 근원적인 이해 충돌이 그 이면에 깔려 있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어떤 컨텐츠를 생산자와 중계권자 사이에 주고 받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두 당사자 사이의 계약 문제이며, 제3자가 원칙적으로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시청자, 국민이라는 점입니다. 아마 법체계의 원칙만 놓고 보자면, 일단 피해를 입은 시청자(개인 혹은 집단)이 모여 소송을 걸고, 그 소송에서 패소한(패소 가능성이 높겠죠) 재송신 업체가 다시 지상파 측에 소송을 거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허나 이는 그 구제 절차의 번잡성, 비경제성으로 인한 폐해는 물론, 즉시 방송을 향유할 권리를 상실한 시청자에게 근본적인 보상이 되지도 못한다는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방송위 위원들은 사태 발생 당시에 크게 개탄했다고 합니다. "시청자들의 시청권 개념을 이해를 할 소양이 도대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런데 이 말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방송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사업자의 소양에 기댄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방송이란 단지 사업자 개인간의 계약 문제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시청권이라는 공익의 이슈인데, 이런 중대한 사태가 사업자들 간의 의견 다툼이라는 사적(私的)인 원인에서 빚어질 수 있다는 게, 제도의 중대한 미비점이고 부실사항이라는 지적입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방송위원회 혹은 제 3의 국가 기관이, 이런 사태에 즉각 개입해야 하는 쪽으로 법제의 정비가 시급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마치, 의료인, 법조인이 그 의무를 태만히 할 때, 혹은 거대 기업이 불공정행위를 벌일 때 공권력이 개입하여 시정 명령을 발하는 것이나 비슷하게 말입니다. 현재는 법적 근거가 명확지 못하여, 분쟁 발생시 그 시정 조치를 내릴 기관도, 그 내용의 한계와 효력도 분명치 못한 상황이죠.
그런데 왜 법제 마련이 미뤄지고 있는가? 전혀 납득 못할 이유는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망 중립성 이슈와도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통신사와 카카오톡 사이에 큰 알력이 빚어지고, 네티즌 사이에서도 설전이 오간 것을 기억들 하실 텐데요. 통신사는 여튼 트래픽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막 확충, 소프트웨어 정비 등 여러 조치를 해야 하는데, 수익은 오로지 컨텐츠 개발사가 빼 갑니다. 이러니 "덤프 파이프" 론이 나오기도 하는 거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터넷 종량제, 즉 향유자가 그 사용량만큼 요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논란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장 과격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최종 이용자인 시청자, 통신 가입자(인터넷, 전화, 모바일, TV 포함)에게 시장 원칙에 충실하게, 종량제 원칙으로 부과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이것이 과연 국민의 저항을 부르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전문가들은 상황이 성숙하고, 사업자들이 혁신을 통해 생태계 "진화"를 이룰 때까지 법제 정비를 미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의료, 법무 규제나 공정거래 법규는 선진 외국의 선례를 그대로 따 왔기 때문에 도입 과정에서 별 문제 없이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방송 통신 분야는 한국이 세계 첨단의 발전상을 보이기 때문에, 이를 규제할 제도 마련에 참고할 사례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섣부른 규제는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여 소비자 불편만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소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중지(衆智)가 모아지게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소할 수 있는 이슈에 주의를 환기해 준 유익한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