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Change - 가장 위대한 나를 실현하는 삶의 연금술
이승헌 지음, 윤구용 옮김 / 한문화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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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총장은 단학, 기수련, 뇌호흡 등으로 미국에까지 잘 알려진 분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단지 한 개인의 신체와 영혼에 국한된 게 아니고, 크게는 우주와 맞닿아 있고, 작게는 원자 안 소립자, 양자 안의 파동, 에너지, 그 물리적 구조의 미묘한 얼개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나의 현재 삶이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더 나은 상태, 혹은 더 활기 있고 유쾌하며 보람된 상태로 발전해야겠다는 욕구, 다시 말해 "변화"를 위한 모색을 시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할지, 어떤 방법부터 밟아 나가야 바람직한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막막합니다. 건강의 문제, 가족, 친지와의 사랑, 우정 같은 관계 형성의 문제도 중요하고, 더 본질적인 차원의 고민, 즉 "나란 존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문제 역시 깊은 내면으로부터 나를 괴롭히고 자극하는 질문입니다.

 

이승헌 총장은 어려서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왜 존재하며, 나를 둘러싼 우주와의 관계 그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아주 골치가 아파왔다고 회상하는군요. 보통 이런 고민을 어려서 해 보기도 쉽지 않고, 어른이 되어서는 학업 혹은 생업에 바빠 잊고 지내는 게 흔한 모습입니다. 헌데 확실히 특별한 분은 이런 점에서도 우리하고 다른 면이 있는가 봅니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아내와 두 아들에게 생계 수단을 마련해 주고" 산사로 들어가 21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수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몸으로 깨달음이 전해져 오는 체험을 했다는군요. 머리 속으로 생각과 추리를 통해 지식을 알거나, 세속적인 체험과 교류를 통해 감을 익힌다든가 하는 식이 아닌, 영혼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통합적인 깨달음을 경험했다는 술회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가 세계에 보급하고 발전시킨 단학과 뇌호흡의 기초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승헌 총장은 현대물리학의 기초 이론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과학의 언어로 그 기초부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네요. 어떤 운동, 혹은 존재 형태가, 입자면 입자고, 파동이면 파동일 뿐, 둘 사이의 경계에 걸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종래 물리학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듯이 이중 슬릿의 실험이 행해진 후, 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죠. 전자를 그 두 슬릿 사이로 통과하게 발사를 시키니까, 벽면에 난 흔적은 슬릿의 구멍을 따라 평행한 일직선 모양 자국이 나야 마땅한데도, 간섭 무늬의 모양이 그려져더라는 것입니다. (간섭 무늬라는 건 두 동심원이 물결 모양으로 서로 만나서 합쳐지는 걸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파동은 서로 만나면 모양이 찌그러지는 게 아니라 제 3의 모양을 형성하죠) 그럼 이 전자는 파동인가 해서 슬릿에 대고 검출기로 측정을 해 보니 이번에는 입자 모양이 나오더라는 거죠.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처음에는 분명 파동이었는데, 누가 눈을 들이대니 입자로 바뀌었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파동이라는 건 확률의 문제입니다.  어떤 아이가 커서 군인이 될지, 혹은 범죄자가 될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 보면 그 가능성은 현실에서 하나로 확정되죠. 이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개입이 있으니까 가능합니다. 하지만, 검출기를 갖다 대니 (뭔가 확실한 모양을 지닌) 입자였다가, 만약 검출기 없이 그대로 통과시킨다면 "군인 40%, 범죄자 60%"로 분리되어 확률분포를 이룬다면, 이것은 뭔가 섬뜩하기까지 한 일이죠. 이런 역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비유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관적 관념론을 이야기할 때,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의 유명한 진술을 예로 들곤 합니다. 숲에서 나무가 쓰려졌는데, 아무도 그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 소리는 난 것인가 나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 "소리는 나지 않았다."고 대답한 사람이 버클리이고, 이런 태도를 가리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하죠. 이 입장은 수백 년에 걸쳐, 아이들 말대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해도, 소리는 객관적으로 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생각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쉽게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객관론이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전자를 (기계를 통해서건 어떤 방법으로건) 관측을 하면 그 순간 입자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그러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이리 갈 확률 30%, 저것이 될 확률 70% 같은 식으로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승헌 총장은 이게 바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예전에 불렸던 관점의 복권, 명예 회복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현상은, 존재한 적도 없게 된다는 말로도 표현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치환 관계를 규명한 바 있습니다. 이 총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너지와 의식 사이의 상호 전환을 논하고 있네요. 우리의 의식은, 형체 없는 것을 형체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유해하고 구차한 것을 소중한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무의미를 의미로 전환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서 의식이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사물과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 속에 감추어진 에너지를 최대한 건설적으로 끌어내고, 이를 물질계에 구축하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물이라고 하면, H2O라는 화학식으로 이해한다든가, 흰 바탕에 무미한 느낌이라든가 하는 사항으로는 본질적으로 안다고 하기 어렵고, 오직 그 "물"을 자기 몸에 끼얹어 느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식은 이처럼, "경험질"이라고 하는 총체적 인식을 통해 사물을 뇌 안에 정리하게 되는데, 우리가 변화를 통해 에너지를 생성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은 이 같은 참된 앎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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