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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의병장의 꿈 -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30년, 제2판 ㅣ 나남신서 1450
조상호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남출판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상호 회장님의 이 자서전을 읽고서, 전에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의 나남출판사에 대한 인상이라면 "책이 비싸다."는 게 일단 맨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대학교재 제작을 많이 하는 출판사라는 이미지였지, 이 책에서 대단히 강조되고 있는 사항처럼 "사회과학 전문", "좌파 서적" 이라는 생각은 못 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 세대라면 아마 이런 인식에 혀를 찰지도 모르겠지만요("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나남하면 바로 불온서적이야!"), 최소한 저는 하 모 교수님의 <국제정치학 개론>, 2001년에 간행된 박명림 교수님의 <한국전쟁의 원인> 등의 책들 때문에, 좌파는 고사하고 그 정반대의 경향을 띤 출판사인 줄 알았습니다. 공교럽게도 저는 작년 이맘때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그 책 역시 좌우로 굳이 나누자면 우파 쪽이라서, 이런 잘못된 선입견이 더욱 굳었네요.
아닌게아니라 바로 이 책 중에서도, 박명림 교수의 출판에 대한 이면의 사연이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하긴 그 책의 서문을, 바로 다름 아닌 최장집 교수님이 (지도교수의 자격으로) 썼으니 그때 바로 알아봤어야 할 일입니다. 학술서에 대고 그 성향의 좌우를 가를 게 애초에 아닙니다만, 종래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계의 지배적 이론은 브루스 커밍스의 이른바 수정주의 경향이 크게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 교수의 이 최신 성과가 그 중 상당수의 이론 기반을 허물어뜨린 셈이니, 좌파 성향의 독자라면 그리 정서적으로 환영할 책은 아니었다고 봐야겠죠. 어찌 보면 아끼는 제자의 연구 진로에 있어, 당신과는 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방향을 전환함을 독려하기까지 한 최 교수의 아량과 덕망에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
아무튼 같은 논리가 이 저자, 조상호 사장에게도 적용됩니다. 좌파 성향을 출판인이 지니고 있다 해서, 그 간행하는 출판물 모두가 좌파 성향이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겠죠. 이 책 말미에 보면,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와의 공격적(조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곤욕을 치르는 듯한)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내가 경북 영양 출신의 조지훈 시인을 기린 문학상도 수여하고 있고, 젊어서부터 시인을 사무치게 흠모해 왔거늘 호남 편향이라니 말이 안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책을 (최근 기준으로) 출판한 곳은 우리 회사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조지훈 시인에 대한 열정과 존경의 진정성은 누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보수 언론과의 대담을 수세적 입장에서 내내 치러 낸 것도, "의병장"을 자처하는 그의 언사적 공격성과는 달리, 유순하시고 포용적인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책에서 대단히 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는 분은 고 김준엽 고대 총장입니다. 요즘은 공격적 CEO 타입이 주로 그 자리에 오르지만, 전통적으로 이 학교는 점잖은 학자풍의 귀골이 총장직에 자주 올랐던 편이죠. 뭐 김준엽 선생에 대해서는 소개가 필요 없는, 학계의 거목이자 존경 받은 재야인사, 소시적의 독립 운동 경력까지 해서(이 대목에서 고 장준하 선생과 연결되죠) 너무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조상호 회장이 바로, 이 김준엽 선생과 거의 평생에 걸쳐 사제지간, 출판 편집계의 대선배와 직원의 인연으로 이어진 분임을 저는 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거의 1/3 은 김준엽 선생과의 인연에 얽힌 사연입니다.
책 제목에 "언론"이 들어가 있는데, 조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사형 언론인 김중배 선생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간지 <신동아>는 군사 정권 당시에도 이미 비판적인 논조로 유명했죠. 조 선생의 동아일보 쪽 인맥은 이렇게 열려 있었던 줄 처음 알았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저 역시, 옛 삼성출판사에서 솔 출판사, 그리고 지금의 나남에 이르기까지 그 판권이 옮아간 경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요, 출판계의 산 증인이신 필자를 통해 이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네요.
이 책에는 조 회장이, 오타가 난 책을 일일이 수거한 후, 바로잡혀진 책을 서점가에 재배포했다는 감동적인 실화도 실려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은 개정판인데도, 여전히 오타가 바로잡혀져 있지 않은 모습이 몇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p164: 5에서 "장학금은 → 장학금을"으로 바로잡혀야 합니다. 보조사의 운용은 대체로 너그럽게 봐 넘길 수 있지만, 책에 나온 대로라면 그 의미가 심히 교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