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왕 박태준 - 쇳물보다 더 뜨거운 열정
신중선 지음 / 문이당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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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난 시대 한국의 급속한 개발 독재 시기에 대해서는 찬반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그 와중에서 어느 시각으로부터건 일관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는 (딩연하게도) 참 드문데요. 그 중에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이라면 바로 박태준 초대 포철(현 포스코) 회장입니다. 그가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군 장교 시절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 왔으며, 군사정변 이후에는 (바로 이 책의 주제가 되고 있는 내용에서 보듯) 철 강 산업은 물론 소규모 영세 공장 하나 변변한 꼴이 없었던 한국에, 국가 기간 산업이자 경제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거대 종합 제철소를 처음으로 건설하고,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영리적, 산업적 성취를 이뤄 낸 기적의 주역으로, 거의 이견이 없이 국민 모두의 가슴과 뇌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박태준 씨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정치계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자당(自黨)의 대톨령 후보로 선출된 김영삼과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김의 대통령 당선 후에는 정계 은퇴는 물론 도일(渡日)까지 감행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은 그의 비리를 조사한답시고 갖은 수모를 주고 곤욕을 치르게 했으며, 그는 이 때문에 모친상도 치르지 못한 채 이국에서 처량한 시절을 보내야 했었죠. 그가 공적(公的) 커리어에 있어 재 기의 기회를 맞은 건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였습니다. 이때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선거를 앞두고 대연합 전선을 결성하여 그 찰떡 공조를 과시하고 있을 시절이었습니다. 만약 대구, 경북 지방을 대표할 만한 인사 한 명이 추가로 합류한다면 대세를 확정지을 수 있는 분위기였죠. 박 전 회장은 흔쾌히 김대중 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칭 DJT 연대의 결성에 한몫을 하게 됩니다. 새 정부에서 그는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퇴임한 후에는 북한 경제특구에 파견되어 황무지에 가까운 척박한 현황을 극적으로 타개하는 대역사에 관여할 것을 희망하지만 결국 좌절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건강악화와 노환으로 타계하지만, 만약 이때 박 회장이 북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아무도 장담 못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그의 인생 최절정기인 대한중석 회장, 포철 창업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던 바로 그 시절입니다. 성공한 인물에 대해서는, 흔히 과장되고 불필요하거나 부당한 포폄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벌써 당시만 해도, "박정희가 그처럼 감싸고 돌며 특혜를 주는 사업이라면 누가 못 하겠는가? 땅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며, 개인 착복이나 없는지 조사해 봐야 한다."는 말이 수 없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히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이 위인은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개발독재 시절의 사업 추진에 대해서는, 은행 돈을 사금고처럼 쓰며 파렴치한 운용이 당연시되던 암흑시절로 간주되곤 합니다만, 최근의 저축 은행 비리나 국민은행 사태에서 보듯 오히려 지금보다 당시가 더 깨끗한 일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보면,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라고 이 책에서 내내 약칭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컨소시엄 같습니다) 프로젝트를 당시 정부에서 간신히 마련하여, 장기영 부총리(한국일보사의 오너이고 당시 정계의 거물입니다)의 지휘 하에, 박태준을 실무 총책으로 하여 진행되게 합니다. 문제는, 내자건 외자건 말은 여기저기서 (대의에는 공감한다며) 흔히 나오지만, 아무도 선뜻 실물의 자금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더라는 거죠. 박정희가 싸인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하는 사업이었건만, 외국은 물론 국내은행조차 선뜻 돈을 내놓으려고(융자) 하지 않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이때, 한일은행측에서, 아무 담보물도 없는 박태준에게 "당신의 열의를 담보로 하겠다."며 선뜻 투자에 나섰으니, 만약 이 손길이 아니었으면 한국 제철 산업 뿐 아니라 전체 경제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을 터입니다. 5공 시절만 해도 재벌들은 정계 수뇌부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탈법적 수단으로 은행 돈을 끌어다 썼는데, 그 검은 커넥션에 관여한 대표적 인물이 이원조 같은 사람이 죠. 이첧희, 장영자 등이 저지른 부정으로 대형 시중 은행 하나가 치명타를 입기도 했고(조흥은행), 제일은행은 바로 대우조선 부실을 떠맡느라 은행으로서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면, 금융계의 풍조라는 게 세상이 투명해지고 발전하는 추세에 오히려 역행해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박 회장이 고작(?) 은행 융자 하나를 받는 데 그런 고생을 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박 회장이 모셔야 했던 상전은 박정희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장기영 부촐리는, 이 KISA와 계약을 대단히 부실하게 체결했었는데, 일이 도중에 잘못되어도 채권단에 약속 이행을 전혀 강조할 수 없는 허술한 구조였음을 박태준은 알게 됩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추진한 사업이 부실덩어리가 되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그는, 제철소 기공식에 불참을 통보합니다. 당연히 정부에서는 발끈하고 나섰으며, 박정희에게 보고가 들어가서 그는 청와대로부터 긴급한 소환을 당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진상을 차분히 털어 놓고, 낯빛이 변한 박정희는 바로 다음 날 장기영 경제 부총리를 해임하게 되었다는군요. 이런 사실 역시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참고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행사가 지금까지도 한국일보 주관이며, 지금도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백상예술대상은 바로 이 장기영씨의 아호에서 그 이름을 딴 것입니다. 당시 이 인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고 이 대목을 읽으면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참 고로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백상 장기영이 자신의 해임 통보를 받고 나서도 행사자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축사 등의 진행을 맡아 치르더란 사실까지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거구의 사업가가 어느 정도 배포가 크고 걸물급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박 회장은 그 이후에도 까다롭고 권위적인 관료들을 상대하느라 곤욕을 치릅니다. 해외의 투자자들을 상대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는데, 비록 박 회장이 일본통이었다고는 하나 입맛 까다로운 일인 돈줄을 컨트롤하기란 거의 곡예에 가까웠다는 회고입니다. 기껏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의 싸인을 받으려 하니, 그 고압적인 태도로 유명한 김학렬 부총리(장기영씨의 후임은 박충훈씨였고, 이분은 그 다음을 이었습니다. 박충훈씨는 1026 직후 잠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기도 합니다)는 여러 번에 걸쳐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때 박 회장은 정말 설움이 북받쳤다고 하는군요. 참고로 김학렬 부총리 역시 대한민국 경제 기획 콘트롤 타워로서 혁혁한 공적을 남긴 분이니 독자들이 너무 나쁘게 볼 건 아닙니다. 그분 역시 반 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한 천재형 관료였습니다.


박 회장 하면 우리는 "쪼인트까기" 같은, 군대식으로 돌아가는 강철 같은(?) 강압적 경영자로만 인상을 갖기 쉽습니다.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면 뭘 못하겠느냐는 쉬운 선입견도 여전히 두텁죠. 그런데 이 책을 보시면, 1968년 당시에 박 회장은 직원들(임원이 아니라 평직원입니다)을 위해, 당시 한국으로서는 상상이 안 될 만큼 깨끗하고 쾌적한 사원 주거 단지를 건설한, 사원 복지제도의 선구자였습니다. 재벌들도 본격적인 복지 시스템을 갖춘 건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이 당시 새로 건축된 사원용 거주단지를 보고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세계 경제 대국 반열에 든 한국의 대기업 처우와 비교할 건 아니죠. 당시에는 이런 게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직원들이 자기 일에 신나게 몰입할 수 있어야 좋은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한 판단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이처럼,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 스타일은커녕,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여우처럼 읽을 줄 아는 대인 전술의 귀재이기도 했던 거죠. 이런 수완은 일본인 은행가들을 상대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가망이 없던 투자 계획을 오로지 현장에서의 멋진 접대로 성사시킨 일이 꽤 된다고 합니다. 정말 배워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분량은 그리 두텁지 않은데, 다룬 내용이 압축적이고 필치가 박력있어서 책을 덮고 뿌듯한 보람이 밀려 왔습니다. 10년 전에 이 책보다 훨씬 두꺼운 전기가 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그 책은 작가의 주관이 좀 많이 개입한 픽션에 가까워서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이 책은 선택과 집중 면에서 현명한 태도를 취한, 근래 나온 중에서 가장 내실 있는 박태준 관련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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