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인 러브
로지 술탄 지음, 황소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에 빠진 헬렌 켈러"


10여 년 전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그해 오스카, 골든글러브의 주요 부문을 휩쓴 적이 있죠. "사랑"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설, 신화화한 위인에게서, 의외로 "그도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애정 행각 같은 게 공개되면 사람들은 일종의 즐거운 충격처럼 받아들이나 봅니다. 이 <헬렌 켈러 인 러브>작년 발표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화제을 모으며, 이 무명 작가를 단숨에 유명 인사의 대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이 책의 소재가 화제를 모으는 건 단지 "사랑 이야기"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헬렌 켈러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위인전을 읽으며 알게 된 것처럼, 여러 중증의 장애를 후천적으로 갖게 된, 한 인간으로서 대단히 큰 불행을 맞이하고서도, 이를 총명한 지성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낙관적이고 선한 심성으로 극복하고 일어선 분이었죠. 그러니, "그런 극한적 장애를 지닌 이에게도 과연 사랑이 가능할까?" 하는, 장애를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의 한심하고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은 사실 더 큰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애인(그가 아무리 유명인사였다고 해도)의 사랑"이란, 그것도 같은 장애인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이른바) 정상인과의 사랑이라면, 그것도 장애를 가진 쪽이 여성이고, 정상인 상대가 남성이라면, 우리의 의구심은 더욱 커집니다.


이 소설은, 작가 로지 술탄이 기존의 정평 있는 전기와, 켈러 재단 측이 열람을 허락한 편지와 각종 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대부분 사실에 기반한 채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놀라는 건,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매우 생생하며, 그 대화의 표현이 익살맞으면서도 심각하고, 그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들 간의 관계, 상호 이해의 정도가 대단히 심도 있으며, 특수한 개별적 개인들끼리에서 빚어지는 호감, 애정, 혐오, 불신, 갈등, 화해 등의 모습이 시대와 장소를 크게 달리하는 우리에게까지 주는 공감이 진한 농도로 다가온다는 점에서입니다. 헬렌 켈러 이야기라고 하면, 읽어 보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만 따분한 이야기" 정도로 정리하고 외면하려던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아마 충격이 꽤 클 것입니다. 사실 헬렌 켈러의 사연은, 그 가장 공식적이고 점잖으며 진지한 대목에서도 "따분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토록 심한 장애를 지녔던 한 인간이 스승과 주변의 따뜻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정확하고 감성적으로 세련된" 보호 아래, 결국 평균인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 할 지성을 갖춘 성인으로 자라나는 모습은,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래서 두 차례나 큰 자본을 들여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겠고요. 어지간히 감동도 주고 정서적 고양도 시켜 준 그 위인이, 러브스토리(대단히 드문 타입)의 주 인공까지 겸한 채, 미묘하고 치열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사랑을 틔워 나간다면, 게다가 주위의 결사적인 반대를 등에 지고서 가망 없는 항해를 밀고 나간다면, 독자는 어려서 받은 감동의 구조가 한켠에서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미처 몰랐던 진실의 이면을 비로소 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동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말은 소설 서두에 이미 단정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야반도주를 꾀했지만, 연인 피터 페이건은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관한 서술들은 나중의 일부 반전도 예비하지 않은 채 확정적으로 모든 여지를 차단합니다. 소설의 대단원은 그 처음에 제시된 상황과 대부분 일치하며, 따라서 독자는 "이 아슬아슬한 평행 우주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붕괴를 유발할 정도로 발달 전개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심을 일단 마치고 로망을 관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말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도(작가가 그런 식으로 얼개를 꾸리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작품 외적 객관적 지식으로 이미 "별 일 없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물둘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대단히 미묘하게 꼬여갔다가, 참으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 해소와 봉합, 아니 발전적 승화를 맞이하는 그 모든 드라마를 지켜 보면서, 독자는 "아닌 줄 알지만, 이러다가 진짜 무슨 일 터지는 것 아닐까?"하는 조바심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독자는 객관적 역사의 경과를 알고 있으나, 동시에 이 오밀조밀한 인간관계의 실타래가 이 로지 술탄(이름도 참 특이하죠)이라는 작가의 손 안에서 빚어진 허구임도 역시 충분히 감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정과 한계가 뻔한데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이 읽는 내내 떠나질 않는 드문 체험을 하는 거죠.


이성과 충동 사이의 갈등이라고 한 마디로 정리하는 건 그 자체로 진부할 뿐 아니라, 이 개성 넘치고 독창적이며, "세련된" 이야기에 베풀 합당한 대접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는 내내, 켈러의 안타까운 마음, 비록 강도 높은 훈련 과정을 통해 고도로 단련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육신, 맨살, 혈관의 깊고도 가느다란 그 모든 은밀한 지점까지 흐르고 지나갈 욕정(가장 저평가된 채로 말한다면요)과 본연의 심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이점 위에 사서 속 편한(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타당한) 충고를 애니 설리번의 등에 업혀 내내 내뱉습니다. "켈러 양(이 당시 그녀는 삼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충 분히 공감은 합니다. 어쩔 수 없을 테죠.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세요. 그분은 오늘의 당신 존재를 빚어낸 분입니다. 당신의 인격은 양도할 수 없는 당신 고유의 자산이요 본체의 일부지만, 오늘의 상태로서의 그것은 선생님께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봐서라도 당신은 그녀를 거역할 수 없고, 게다가 그녀의 충고는 당신을 둘러싼 현실을, (대단히 죄송하지만) 눈이 불편하고 귀가 온전하지는 않을 당신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텝니다."


그런데 우리 독자도 확신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끝까지 전개되며, 우리는 켈러 양의 진술로 걸러진 진상밖에 접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피터 페이건이라는 남자의 눈빛, 행동거지, (만약 숨기는 바가 있었다면) 이로부터 유츄할 수 있는 딴속셈 등은, 우리가 누군가의 설명이라는 매개 없이 접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떠셨는지요. 페이건이, 우리가 알고 있듯 공식적인 역사에서 석연찮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루저"라는 작품 외적 지식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켈러 양이 그를 좇았다면 두 사람 다, 최소한 켈러 양 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인생의 다차원적 비극을 남기고 말았을 못 미덥고 마땅찮은 인물 아니었을까 하는 쪽으로 결론이 기울지들 않으셨는지. 페이건의 인품과 됨됨이에 대해서는, 우선 애니 설리번의 "입"이 맹폭격을 가하는 중입니다. 이 작품은 어림으로 1/10 정도의 분량이, "피터 페이건의 변변치 못함"을 질타하는 애니의 대사로 이뤄져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녀가 바라본 페이건은, 어딘가 좀 모자랍니다(음식을 입에 묻히고 흘리는 모습이라든가). 그러면서도 명성과 관심을 사냥하는 천박한 근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뺀질뺀질한 눈빛"은, 설리번 선생의 눈에 맺히고 전두엽에 각인된 그의 첫인상입니다. 그럼 어딘가 앞뒤가 잘 안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분명 속물이고 위선자라도, 두뇌가 좋지 못해서 속셈을 쉬이 노출하는 무능한 타입도 있을 것으므로 그닥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애니는 어느 시점 이후, 그녀의 지병 때문에 도저히 켈러 양의 곁에 머물 수 없어 따뜻한 남쪽으로 요양을 떠납니다(푸에르토 리코).


이후부터는 더 단호하고 더 실력을 갖춘 방해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케이트 애덤스 켈러,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도 물론 피터 페이건의 실물을 보았지만(고용인이니까요), 그런 직관적인 인 상보다는 다른 이유와 필요에서 그를 반대합니다. 소설 중반을 넘기면서 명확히 드러나지만, 켈러 가문은 남부 지방에서 유서 깊은 명문에 속합니다. 하잘것없는 아일랜드 뜨내기 혈통을 받아들일 의향은 없습니다. 큰 불명예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나 볼 법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의식이 있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페이건이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리버럴이라는 점입니다. 이 가문에서 진보 성향을 갖춘 인사는 헬렌 뿐인데, 사위(헬렌에게는 제부) 워런을 포함해 모든 성원은 옛 남부의 긍지, 그리고 면도날만한 틈도 허용하지 않을 배타적 신분의식, 보수적 정치관으로 가득합니다. 페이건은 어떤 관점에서도 가망이 없는 구혼자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갈수록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페이건은 다소 불공정한 대접을 받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우 선 애니 설리번은, 유년 시절에는 켈러 가문의 피용인, 지금은 유명인사로서 독자 회계가 가능한 헬렌의 보조자 신분입니다. 선생님이다 뭐다 해도 여기는 동양이 아닌 이상 엄연히 계약 관계의 한 당사자일 뿐입니다. 만약 피터든 그 누구든 헬렌의 곁에 반려자가 등장하면, 그녀의 입지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헳렌이라는 존재의 양성, 완성, (냉혹하게 말하면) 흥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게다가 애니는, 놈팽이 스타일의 어떤 남성(존 메이시)와 실패한 사랑을,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처지입니다. 여러 사정 때문에 객관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반전이 있습니다!). 어머니인 케이트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피터가 케이트라고 호칭하자, "미시즈 켈러라고 부르시오."라고 받아치는 장면도 있죠). 뭔가 변변찮은 인물이긴 한데, 그대로 내치기엔 좀 불공정하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 모호한 느낌도 듭니다. 이 소설의 빼어난 점은, 결국 이처럼 모든 것을 흐릿한 장막 속에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방치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경계가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진상을 고스란히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헬렌 켈러는 선하디 선한, 신의 계시자라기도 합니까? 소설 후반의 밀드레드(헬렌의 더동생)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언니는 지독한 고집 불통이었지.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어. 마사(마사 워싱턴은 집안 흑인 요리사의 어린 딸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사는 설리번의 고용 이전에 헬렌의 발달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동반자였다고 합니다)가 언니 손에 잡혀서 머리칼을 다 깎여야 했던 일 생각 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이 모든 내러티브는 헬렌 개인의 주관적 관점을 짙게 품은, 변형 왜곡의 그림자가 만만찮은 범위로 드리우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일은 누가 보는지의 각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성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죠. 눈이 심하게 멀었느냐, 그렇지 않고 일곱 빛깔 가시 광선을 인지할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는 기실 눈 멀고 귀 먹은 장애인에 불과합니다.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은, 등장 인물 사이의 대사가 너무도 재치있고, 신랄하며, 유머러스한 표현이 많아 그를 곱씹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거죠. 오 가는 말이 너무도 재밌어서, 이게 과연 작가 개인의 상상인지, 실제 서신에 그 비슷한 표현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라고 하면, 아마 당사자들 사이에선 입에 올리기도 꺼려지는 금기이자 저주일 겁니다. 그런데 헬렌과 애니, 심지어 나중의 피터 페이건까지, 장애 소재 말고는 농담거리가 없나 싶을 만큼, 쉬지도 않고 조크와 위트를 "눈멂, 귀먹음"에 대해 주고받습니다. 저주를 따뜻한 여유로 승화하는 이런 성숙한 태도야말로, 한 인간의 위대함과 그가 속한 문화의 숭고한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헬렌 켈러가 대단히 강경한 사회주의자였음은, 생각 외로 어느 정도는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시기의 미국은 욱일승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게, 고도의 자본주의 발달이 세계를 집어삼킬 듯 기세를 뻗는 모습이었습니다. 취임 전에는 가장 온화하고 기품 있는 박애주의자였던 윌슨 대통령이, 이 소설의 배경인 1916년(따라서 아직 선전 포고는 이뤄지지 않을 시점입니다) 즈음에 개입주의로 국가 노선을 바꾸고 드는 것도, 이제 커질 만큼 커진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어 보겠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죠. 헬렌은 이런 그를 두고 "나보다 더 눈이 먼 사람"이라며 맹공을 가하는 대목이 소설에도 나옵니다. 자본주의의 극적인 발달은 물질위주의 태도와 사고 방식을 곳곳에 스며들게 합니다. 예를 들면 헬렌의 아버지 아서 켈러 예비역 대령은, 설리번 선생에게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남부의 노예제가 벌어들인 돈으로, 당신의 봉급이 지불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라는 치명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대독 개전에 반대("우리는 독일을 향해 전쟁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하 며 서부 전선에서 부상하여 눈이 먼 독잂 병사에게 구호 기금을 전달하려는 헬렌에게 기자들은 "당신은 참전을 찬성하는 그 자본가들로부터 후원을 받으면서, 이 시점에 국가 반역을 꾀하는 건가요?"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아기자기한 심리의 변화와 재치 있는 대사, 심오한 인간 정신의 미덕을 깨우치는 재미 외에도, 이처럼 역사의 단면을 배울 수 있는 다른 교육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번역이 정말 정확하고, 원문의 미묘한 뜻이 잘 전달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겨진 것 같고, 제가 본 범위 안에서는 오타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책이 참 아담하고 예쁘게 만들어졌습니다. 약간 폰트가 작게 느껴질 분도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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