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색 - 빛의 파편을 줍다
게리 반 하스 지음, 김유미 옮김 / 시드페이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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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피카소, 그 좌절과 모색의 시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의 유년시절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 려서부터 피카소는 그런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하네요. "네가 군인이 되길 원한다면 너는 으뜸가는 대장군이 될 것이요, 네가 성직자가 되길 원한다면 너는 교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내 "파블로"라고만 호칭되는 피카소(기다란 풀 네임도 소설 초반에 제시되어 있어요)는, 그처럼 두뇌의 회전도 빠르고, 체격도 당당한 헌헌장부의 모습으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래들로부터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따르는 이들도 많은 편이었고요. 그런 인물이 붓과 물감을 다루는 솜씨까지 뛰어났으니...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순탄한 전진의 항로만을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 후원의 보장(친지로부터의)까지 있었던 그의 친구(카를로스 카사게마스) 역시 결국에는 순탄한 길을 갈 수가 없었으니, 재능과 열정이라는 신의 축복도 "젊음"이라는 질풍 노도의 시련을 거치며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하는 게 필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꽃 처럼 피어나는 젊음은, 재능을 보존하고 갈고 닦아야 할 인재들에게는, 차라리 거세되어야 할 유혹에의 페로몬 샘이 아닌가. 비극적인 사고 없이 미술 수업만 제대로 마쳤다면, 친구 피카소에 못지 않은 대화가가 될 수도 있었을 카를로스의 최후를 보며 든 생각입니다. 작가 게리; 반 하스의 표현에 의하면,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한계에 도전한" 파블로 피카소 같은 이들도, 그 젊은 시절 자칫하면 소중한 재능과 천재적인 작품 창출 모두를 무(無)로 화하게 할 위기에 여러 번 처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저지르는 게, 예외가 아닌 보통의 사례라는 인상까지 받았습니다. 

자화상. 왼쪽은 1901년, 오른쪽은 1896년입니다.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1901년이면 빛의 도시 파리에 막 도착했을 무렵이죠.


주 위로부터 언제나 기대를 모았고 활력과 야망에 넘쳤으며, 외모나 기질 어느 면에서도 타인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던 젊은 피카소는, 그러나 안전하고 검증된 길을 걷기보다,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재능을 최대로 발화할 수 있는 시련의 행로를 굳이 택합니다. 그것은 돈 한 푼 없이,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로 가서, 세 계 첨단의 조류와 유행을 접하고, 평론가나 미술 애호가의 눈에 들어 큰 성공을 누려보기도 하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그들은, 이 모든 것이 고향 스페인에서 꿈꾸던 바의 이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며, 특히 자신만의 순수 미학의 세계를 파고드는 길과 시장의 구미를 맞추는 일은 결코 양립하지 않음도 절감하기에 이릅니다.

뻬빠 숙모의 초상. 1901

그의 고국 스페인은 이미 많은 빼어난 화성(畵聖)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머나먼 앞선 시대의 엘 그레코와 프 란시스코 고야가 그들이죠. 아무리 천재인 피카소라고는 하나,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입체파 터치와 관점을 완성한 채 자유로운 일필휘지가 가능하지는 않았겠죠? 이 책에서 배운 바로는, 그 역시 많은 대가로부터 쉼 없이 영향을 받고, 그들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때로는 동시대의 앞선 거장(예컨대 마티스)로부터 심한 경계와 모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소설 후반부에, 앙리 마티스와의 격한 갈등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시기는 아니지만)피카소가 노년에 이르러 확고한 명성을 다진 후에도,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을 두고 노골적인 모방을 한 작품이라 하여 그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미 이 시기부터, 고야는 피카소의 어린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던 듯합니다. 영화감독 피터 잭슨은 <킹콩>을 리메이크하여 적절한 칭찬을 받은 반면, 구스 반 산트는 히치콕의 <사이코>를 어설프게 재현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일도 생각나더군요.

제임스 사바르테스의 초상. 1901

절친 카를로스 카사게마스를 매개로 해서, 파블로 피카소는 여러 친구를 알게 됩니다. 그 중에는 위 작품의 주인공 작가 제이미 사바르테스도 있고, 이 소설에서 카사게마스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걸로 설정된 안나 포랭도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는, 카사게마스의 자살에는 다른 여인이 연루되어 있었다고도 합니다.


파블로의 주위에는 여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임차료를 내지 못해 거주지에서 축충당할 위기에 놓이자, 애인이었던 매춘부 페르낭드가 기지를 발휘하여 퇴거의 위기를 모면한 일화도 이 소설에 나오고 있습니다(두번째 연체 때엔 결국 쫓겨나죠). 기욤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여러 명사를 접촉하기도 하지만, 타고난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누구와도 잘 융화하지 못합니다.


파 블로 피카소가 정치에도 상당한 정도로 관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갓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 그가, 1차 세계 대전 발발 소식을 접하고 친우들과 혼동스러운 감회에 젖는 걸로 마무리되고 있네요. 청색 시기를 통과하여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장밋빛 시대로 접어드는 무렵의 그를 만나고 싶다면 이 소설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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